[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안경신 (1888~미상) 선생은 평남 대동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전국적으로 항일운동단체가 조직될 때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의 교통부원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일제경찰에 발각되어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하였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7~8월경 미국의원시찰단의 방한을 계기로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고자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 안경신 선생의 유일한 사진 결사대 중 제2대에 파견된 선생은 폭탄을 직접 소지하고 평양으로 잠입하였다. 거사 분위기 조성을 위해 평양 시내에 뿌린 경고문의 영향으로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비가 있었으나nbsp1920년 8월 3일 밤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등에 폭탄을 투척하여nbsp평남도청 제3부인 평남경찰부 건물을 파괴하였다. 선생은 당시 임신한 상태임에도 거사를 주도하였으며, 출산 직후인 1921년 3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선생은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평양복심법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현익철(玄益哲)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이 고향으로 1911년 뜻한 바 있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이래 1918년 봉천성(지금의 요녕성) 흥경현(興京縣)에 자리 잡고 많은 한인동포와 농업을 일구었다. 이 무렵 흥경현의 한인동포 인구는 무려 6만 5천여명에 달하는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이에 따라 이곳의 한인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 조직이 결성되어 크게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흥경현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한인공회(韓人公會), 대한독립의용단(大韓獨立義勇團) 등이 있었다. 선생은 이 해에 흥경현의 민족학교인 흥동학교(興東學校)의 교사로 아동들을 가르치면서 이들 조직에 가담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어 독립운동의 열기가 크게 고조되자 선생은 새로운 결심을 굳혀 한인동포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북간도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특히 김좌진 장군이 활약한 북로군정서로 널리 알려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대한군정서는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조직으로 강력한 독립전쟁을 목표로 독립군양성과 훈련사업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서(翰西) 선생님, 무궁화 사랑을 기억합니다 -권용우- 4월 5일, 이 날은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날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신 채 1939년 4월 5일 76세를 일기로 영면하셨습니다. 올해가 선생님의 76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선생님의 삶은 참으로 파란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의 청소년기에는 외세의 물결이 거세게 몰려들 때였습니다. 1882년 4월 미국과 한∙미 수호조규(韓∙美修好條規)와 한∙영 수호조약(韓∙英修好條約)의 체결을 시작으로 하여, 7월엔 한∙일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 8월에는 한∙중 상민수륙무역장정(韓 ∙ 中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됨으로써 외국의 선진문물이 조선땅을 뒤덮었습니다. 한편, 1884년 10월에는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하여 청(淸)∙일(日) 두 나라의 군대가 충돌함으로써 나라의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형국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이들 두 나라의 조선에 대한 주도권 싸움은 우리 조정(朝廷)을 참으로 곤욕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열(朴烈, 1902. 2. 3~1974. 1. 17)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중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어 온 그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秋田)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의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선생은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 98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성면 오천리 일대는 일찍이 일제에 의한 광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개 조선총독부의 후원아래 일본 자본가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동착취와 저임금, 인권유린 등의 각종 폐해가 뒤따랐던 만큼, 지역주민들의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일찍이 오천리에는 인근 산지의 삼림과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 마을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1919년 1월 권농조합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운동가인 동오 신홍식 (申洪植, 1872. 3. 1 ~ 1939. 3. 18) 선생은 한국기독교사는 물론 민족운동사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인물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민족운동을 벌인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부흥사 출신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3.1운동 당시 기독교 대표 16인 중의 1인으로 선정되어 감리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에 서명하여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신홍식 선생은 1872년 3월 1일 충청북도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에서 부친 신기우(申驥雨)씨와 모친 최살랍(崔撒拉)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양반가문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사람들로부터 신동 또는 천재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13세 때 시율(詩律)을 지었으며, 16세 때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할 정도로 한문수학에 남다른 탁월성을 드러냈다. 그는 1887년에 부친이 별세하며 가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가운데서 1891년에 결혼하여 분가한 신홍식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를 모시며 25세 때까지 당시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사회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운강 할아버님! 저는 할아버님이 목숨으로 지켜낸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는 증손녀 순희 입니다. 다른 집안 같으면 증조부를 그냥 증조할아버님이라고 부르지만 가문에서는 제가 태어날 때 이미 아호 그대로 운강 할아버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른들께 여쭤보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우리 할아버님이 의병장, 그것도 전국 의병들의 수장이셨다는 가슴 벅찬 자긍심을 담았던 것입니다. ▲ 운강 이강년 의병장 어린 시절, 고향집에는 할아버님 초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지금 운강기념관에 있는 무관대례복을 입고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풍채가 크고 잘 생긴 영정 그 모습 말입니다. 저는 오빠들과 함께 할아버님의 초상을 올려다보며 옷깃을 여몄습니다. 아버지께서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할아버님의 생애를 말씀하셨습니다. 운강 할아버님은 스물세 살에 무과에 급제, 정3품인 선전관까지 지내시고 갑신정변 때 낙향하셨다.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두 차례 의병을 일으키셨다. 첫 번은 1896년 국가 자존과 민족자존을 지키려고 일어서셨고, 제천의 의암 유인석 의병진과 합류해 세력을 확장한 뒤 수많은 전투를 치르셨다. 그리고 만주로도 가서 투쟁하셨다. 둘쨋 번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승희(李承熙, 1847. 2. 19 ~ 1916. 2. 27) 선생은 1847년(헌종 13) 2월 19일(음) 경상도 성주 대포리(지금의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 1동)에서 아버지 이진상(李震相)과 어머니 흥양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아버지 이진상의 가르침을 받아 이후 가학(家學)을 이어 큰 학자가 되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이진상과 이승희 부자의 학문적 계승 관계를 중국 송나라 때의 큰 학자인 채원정(蔡元定)과 채침(蔡沈) 부자의 관계에 견주어 서산씨부자(西山氏父子)라고 말하였다. 선생은1867년 21세 때 흥선대원군에게 성학(聖學),호적(戶籍),전제(田制),선거(選擧),제병(制兵) 등 폐정개혁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개항 이후 1880년대 초에 개화정책의 흐름이 확산되면서 척사파와의 갈등은 고조에 달하였다. 1880년 말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을 해야 한다는 조선의 외교방략을 담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일본에서 가지고 와 고종에게 바치자, 이듬해 1월 이만손(李晩孫)을 중심으로 영남유생 만여 명은 연명으로 만인소를 올리기 위해 상주의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무역회사인 이륭양행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지우리스. 쇼(george lewis shaw, 1880. 1. 25. - 1943. 11. 13., 건국훈장 독립장 1963 )는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조지 루이스. 쇼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중국 안동현(오늘날 단둥시)에서 무역 및 선박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운영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사무국을 설치토록 해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토록 하였다. 자신의 선박을 이용해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송하였으며, 무기, 출판물 등을 안전하게 수송해 주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조달한 독립운동 자금을 자신이 발행하는 수표로 임시정부에 안전하게 송금해 주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중요 문서와 물자를 이륭양행 명의의 사서함을 통해 수령케 함으로써 안전하게 운반될 수 있도록 도왔다. 1920년 7월 일제에 의해 내란죄로 기소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보석으로 석방된 뒤에도 변함없이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 조선의 독립자금을 돕던 단둥의 이륭양행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늦은 밤 평범한 대학생이 지친 어깨를 이끌고 이곳저곳 골목길을 헤매입니다.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에서 마음 한켠이 무거워 진채 어떻게 이 마음을 짊어지고 미래를 설계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앞길은 막막하고 세상은 많은 것들을 원하고 가고자 하는 길은 불투명 합니다. 꿈도 없이 그저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세상의 기류에 휩쓸려 남들이 갔던 길 그렇게 보이는 길만을 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문득 증조부님이 걸어가신 길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증조부님께서 어떤 분이셨을지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길이 없는 줄로 알았건만 부족한 제 능력으로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곳에 증조부님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비밀결사인 대동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해 친인척, 동지들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치시다가 옥고를 치르셨지요. 구체적인 상황은 옛 동아일보와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을 토대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 대부분의 민중들이 서슬퍼런 일제 치하에서 숨죽이면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연명하면서 견디어 내고 있을 시기에, 증조부님이 가신 길은 너무나도 좁고 무겁고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독립이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류자명 선생[1894~1985]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의열단 단원, 조선혁명자연맹 대표, 조선민족전선연맹 이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한,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중 한 분이다. 중국대륙에서 활동한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하고, 중국인사회 속의 외국인으로 고립적인 삶을 살아갔던 데 견주어, 류자명은 중국어 회화와 문장에 능숙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인 친구, 동지들과 친교(親交) 차원 이상의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청싱링(程星齡), 바진(巴金) 등 거물급 인물들의 우정과 신뢰는 류자명이 중국사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러한 류자명 선생의 중국사회 적응력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무정부주의사상과의 만남, 중국측 인사들과의 교류 및 그들의 활동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자신의 활동공간을 넓혀갔던 사실, 일제 패망 후 중국사회에서 새로운 자신의 삶의 궤적을 남길 수 있었던 사실 등은, 자신의 앞길에 펼쳐지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며 이를 앞질러 나가려 하기까지 한 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세계관의 반영으로 해석될 수 있다. ▲ 류자명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