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그림 한국화가 이무성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 낸 겨레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 '김락' 이윤옥 나라의 녹을 먹고도 을미년 변란 때 죽지 못하고 을사년 강제 조약 체결을 막아 내지 못했다며 스무나흘 곡기를 끊고 자결하신 시아버님 아버님 태운 상여 하계마을 당도할 때 마을 아낙 슬피 울며 하루 낮밤 곡기 끊어 가시는 길 위로 했네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의 삼천 석 댁 친정 큰 오라버니 백하구려 모여든 젊은이들 우국 청년 만들어 빼앗긴 나라 찾아 문전옥답 처분하여 서간도로 떠나던 날 내앞 마을 흐르던 물 멈추어 오열했네 의성 김 씨 김진린의 귀한 딸 시집와서 남편 이중업과 두 아들 동흠 중흠 사위마저 왜놈 칼 맞고 비명에 보낸 세월 쉰일곱 늘그막에 기미년 안동 예안 만세운동 나간 것이 무슨 그리 큰 죄런가 갖은 고문으로 두 눈 찔려 봉사 된 몸 두 번이나 끊으려 한 모진 목숨 11년 세월 그 누가 있어 한 맺힌 양가(兩家)의 한을 풀까 향산 고택 툇마루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말 걸어본다 머무는 하늘가 그 어디에 김락 여사 보거들랑 봉화 재산 바드실 어르신과 기쁜 해후 하시라고 해거름 바삐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황학수 선생은 대한제국 군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만주에서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광복군사령부 총사령 대리 및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선생은 1877년 서울 화동에아버지 황두연과 어머니홍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 참위로 임관되어 시위 제1연대 제3대대로 부임하였다.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복무할 당시, 경북일대의 의병진압 명령을 받은 선생은 안동진위대 대장직을 사퇴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병의 사살을 막고 체포 후 모두 석방 조치하였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 당하자, 제천으로 내려가 보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활동에 전념하였고 육군무관학교 동기생 다수가 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망명을 결심하여 1919년 3.1운동 발발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선생은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1919년 11월 군무부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군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이듬해 12월 군사간부학교가 문을 닫게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강영소 선생은 미국 하와이에서 에와친목회, 합성협회, 국민회 등을 조직하고, 흥사단 간부 및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맡아 동포사회를 이끈 지도자이다. 선생의 부친과 5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가족 4명이 건국훈장에 추서되는 등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선생은 평안남도 증산에서 1886년 2월 18일 태어났다. 1903년 증산군 공립소학교를 마치고 1905년 4월 부친 강명화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민한 선생은 에와농장에서 설립된 친목회와 호놀룰루에서 설립된 공진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 강영소 선생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에 국권회복의 후원과 교민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와이 한인단체들이 합동하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할 때 선생은 총무와 서기 등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09년 2월 한인합성협회와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가 합동하여 국민회가 결성될 때 양 단체의 합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1910년 2월 미주의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로 출범하자 선생은 하와이지방총회의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 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영국인 베델( 裴說 ernest thomas bethell, 1872. 11. 3. ~ 1909. 5. 1. )은 일제강점기 한국민의 입장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저항한 인물이다.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입국하였다. 당시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로 전국에서 반일 민족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선생은 양기탁과 함께 국한문판 및 순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 활동을 보도하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벌였다. ▲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알리고 합세했던 베델 일제의 사전 검열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는 실을 수 없었던 강력한 반일 논조의 기사를 외국인 신분을 이용해 보도했다. 특히, 고종 친서를 영국 트리뷴지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해 을사조약의 무효를 알리는 등 일본의 강압적인 침략상을 국내외에 폭로했다. 한편, 일제는 한반도 침략에 큰 걸림돌이던 베델을 추방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선생의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결국 선생은 영국 법정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차경신 선생은 국내에서 부인회, 간호대 및 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어학교 초대교장 및 대한애국부인단 총단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각한 평등관을 정립하고, 민족대표 양전백 선생이 세운 보성여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였다. 졸업 후 명신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다시 정신여학교 사범과에서 수학한 선생은 이후 함남 영생학교, 진성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918년 선생은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평생의 동지인 김마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요코하마 유학생 대표였던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2.8독립선언서 전문을 국내 반입할 것을 논의하고 부친의 사망을 구실로 국내로 들어왔다. 여성독립운동가 차경신 선생 2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한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비밀장소인 백산상회에서 신한청년단 당수 서병호 등을 만나 여성 단체 조직을 계획하였고, 평북 선천에서 신한청년당 회원 50여 명을 모집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양전백(梁甸伯,1870.3.10. ~ 1933.1.17.)선생은 평북 선천의 명신학교, 신성중학교, 보성여학교 등의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105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자주독립을 주창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리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의 후예로 증조부 슬하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한 선생은 15세에 과거 준비를 하기도 하였으며, 1892년 김관근과 함께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접하고 평북 구성으로 돌아와 한문과 함께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 양전백 선생 1894년 12월 청일전쟁으로 평안도 일대가 온통 싸움터가 되어 학당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선생은 1896년 12월 평양에서 휘트모어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통역을 하였다. 평북지역에서 휘트모어와 함께 선천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를 세우고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선천 유지와 교인들의 찬조를 받아 초등교육기관으로 명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평북 일대의 교회들은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막사 또는 병원으로 징발되어 시설이 파괴되거나 불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한상렬((1876. 4. 2.~1926. 9. 19.) 선생은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뒤 횡성에서 의병을 조직, 민긍호 의진 등과 연합의진을 형성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였으며, 만주 망명 후 독립군 참모로 보급품 확보 등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 쉰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밀사를 파견한 광무황제의 책임을 물어 강제로 퇴위시킨 후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국권침탈의 길로 들어섰다. ▲ 열악한 의병의 무기 1907년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본격화되자 제1연대 1대대 대장 박승환 참령은 자결로 항거하였으며, 이는 시위대 대원들에 이어 지방 진위대의 봉기로 확산되었고,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어 후기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원주진위대가 가장 먼저 봉기하였고 그 중심에 민긍호 의병장이 있었다. 한상렬 선생은 고향인 강원도 횡성에서 일어나 지역민을 중심으로 의진을 형성하였다. 선생은 민긍호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약 2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의병
[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이민화 선생(1898-1923)은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북로군정서 교성대 소대장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선생은 1898년 충남 아산군 염치면에서 태어났다. 충무공 이순신의 11대손인 선생은 어릴 때부터 충무공의 무훈을 마음에 새겼고, 결혼 후 1917년 12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선생의 망명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세영(이천민)의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충무공의 후손으로 일제에 항거할 것을 다짐하고 망명을 결행한 선생은 무장투쟁을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삼고 군사간부로서의 능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 이민화 독립투사 만주지역은 1911년 삼원포 추가가의 신흥강습소로부터 시작하여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의 요충지였다.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배출된 3천5백여명의 졸업생들은 만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이후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선생은 1920년 왕청현 십리평의 군사간부학교인 사관연성소 제2구대장으로 생도를 통솔하면서 교관으로 활동하였고, 북로군정서에서 가장 강력했던 엘리트 군대인 교성대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봉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나라를 빼앗기자 우리 선열들은 가만히 좌시하지 않고 독립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력을 양성하는 사람, 임시정부를 세워 나라의 뼈대를 만드는 사람, 자라나는 2세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 독립자금을 모으는 사람 등 각자의 위치에서 단 한치의 흐트럼 없이 우리 동포들은 뛰고 뛰었다. 친일파 매국노들을 빼고 우리 겨레는 합심으로 조국광복을 위해목숨을 바쳤다. 거기에는 남여가 따로 없고 늙은이나 어린이도 따로 없었다. 최중호 애국지사는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격인 조선총독 데라우치 암살 계획에 앞장서다 투옥되는 등 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뛰신 분이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최중호(崔重鎬, 1891. 1. 20.~ 1934. 3. 28) 애국지사를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최중호 애국지사 선생은 1891년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양산학교(황해도 안악 소재)를 다니면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김구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1911년 선생은 일제가 항일운동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소위 테라우치(寺內)총독 암살음모사건(소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전덕기 선생은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아버지 전한규, 어머니 임씨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 부모 모두를 여의고 숯장수인 삼촌댁 양자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17살 되던 해 당시 서울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선생의 삶은 결정적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시병원을 설립하고 민중 지향적 선교를 전개한 인물로서 선생은 그의 민중 지향적 목회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시병원의 고용인으로 스크랜턴의 활동을 돕던 선생은 21살 되던 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상동교회 창설사업에 참여하였고, 1902년 마침내 정식으로 전도사가 되었다. 이후 선생은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한 결과 '민중 전도자'로서의 이름이 점차 교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덕기 선생 1903년 선생은 상동교회 내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정순만, 박용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 해체 이후 흩어졌던 민족운동 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힘썼다. 이후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을사늑약 반대, 일제의 군용지 매수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