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무등산 소녀회로 왜경을 떨게 한 박옥련 이윤옥 무등산 푸른 정기 누천년 흐르는 땅 청운의 꿈동산에 어린 소녀 불러 모아 아픈 조국의 상처 매만지며 민족의 새살 돋게 한 임이시여 꿈 많은 열여섯 소녀 차디찬 감옥에서 모진 박해 견디며 독립의 끈 놓지 않았던 임은 티 없이 맑고 강한 소녀였어라 ▲ 증손자와 다정한 한때(증손녀 한서인, 규일과 1997년 2월 8일 설날) 박옥련(朴玉連, 1914.12.12~ 2004.11.21)애국지사 형님이 돌아가시고 제가 어머니를 4년간 모셨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앓아누우시지 않고 잠자듯이 운명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해요 박옥련 애국지사의 차남 한상철(79살) 씨는 고양시 중산마을 집으로 찾아간 글쓴이에게 이렇게 운을 떼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에 대해 그다지 많은 말씀은 안 해주셨습니다. 다만 감옥에 끌려가셔서 고통을 받으셨다는 말씀은 조금 하셨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아드님의 모습은 꾸미지 않은 겸손함 그 자체였다. 박옥련 애국지사를 살아생전 뵙지는 못했지만 왠지 당신을 많이 닮은 아드님을 뵙는 순간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군자금 모아 광복 꽃피운 한영신 이윤옥 한 땀 한 땀 자수 놓아 수예품 만들며 다진 마음 은비녀 빼고 머리카락 잘라 독립의 꿈을 키우던 마음 여자들이 움직여야 산다 여자들이 움직여야 산다 독려하며 앞장서서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든 이여 임이 모은 군자금 독립의 밑거름 되어 고귀한 광복의 꽃으로 피어났어라 한영신(韓永信,1887. 7.22 ~ 1969.2.20) 평북 신의주사람으로 1919년 6월 평양에서 김용복 김보원 김신희 등 장로파 부인 신도들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이 부인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평양 장대현 예배당에서 결성된 애국부인회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집 및 임시정부의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는 한편 평안도일대의 장로파 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때 그는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하여 노파로 변장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 무렵 평양에서는 장로파를 중심한 애국부인회 외에도 감리파를 중심으로 생겨난 애국부인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양파의 여성조직들은 합동을 모색하여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로 통합하였는데, 이때 한영신 애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육아일기 쓰며 독립의 횃불 든 최선화 이윤옥 중일 전쟁 쏟아지는 포탄 속 숨어든 방공호에서 철없이 보채는 아이 보듬으며 가슴 졸였지 나라 잃고 동굴 집 삼아 떠돌던 통한의 세월 사랑스런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 나라 기필코 되찾으리라 굳은 각오 새기며 상해에서 중경까지 칠천 리 고단한 길 이 악물고 광복의 그날까지 뛰고 또 뛴 항일투사여 ▲ 최선화 ․ 양우조 부부 독립운동가(1937.3.22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최선화(崔善嬅, 1911. 6.20 ~ 2003.4.19) 아침 열시쯤 되어 공습경보가 울렸다. 유주의 하북은 유주시(柳州市)였고 하남은 새로 개척하고 있는 지대라 가옥과 상점이 별로 많지 않았다. 유주시를 북으로 하고 흘러가고 있는 강의 남쪽엔 병풍 모양으로 길게 산이 연결되어 있는데 천연동굴이 99개나 뚫려 있다고 한다. 이곳이 임시 방공호로 이용되고 있는 굴이다. 하지만 이 천연동굴의 단점은 입구에 작탄을 맞으면 그대로 무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공습이 울리고 나면 피난민들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가운데 줄임)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일본 비행기가 작탄을 수없이 떨어뜨리는 모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총부리도 두렵지 않은 파주의 여전사 임명애 이 윤 옥 심학산 깊은 골 고고한 학 고요히 내려앉은 맑고 고운 땅 교하리 장터에 낭자히 흐르던 핏자국이 웬 말이냐 동포의 가슴에 겨누던 일제의 총부리 맞서 당당히 호령하던 여전사 만세운동 앞장서다 쇠창살 속 갇혔어도 불굴의 그 투지 굽히지 않았어라 ▲ 임명애 애국지사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20년 초 찍은 것으로 추정) 임명애(林明愛,1886. 3.25 ~ 1938. 8.28)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 율곡이이와 청백리 황희 정승의 고장 파주에서도 3․1만세운동은 비껴 갈 수 없었다. 아니 비껴가는 게 아니라 불같이 타올랐다고 해야 옳을 정도로 거센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다. 파주는 지리적으로 서울 가까이에 자리 할뿐더러 북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다른 지역에 견주어 서울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 활동에 발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따라서 파주지역은 3․1만세운동 당시에도 서울의 상황이 잘 전해졌으며, 이는 파주의 3․1만세운동에 일정한 활력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2014년 3월 8일 토요일 오후 2시. 도쿄 한복판 신오쿠보에 있는 고려박물관 7층 전시실 안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모여들었다. 특강 강연자인 필자는 하루 전날 고려박물관을 찾아 이날 있을 특강 준비를 하면서 와타나베(渡辺泰子)간사와 차를 마시면서 “몇 명이나 올까요?” 라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 와타나베 간사는 “글쎄요. 많이 알렸는데...걱정이네요” 라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다음날 특강 장소를 찾고는 깜짝 놀랐다. ▲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일본 고려박물관 전단 (표지 그림 김향화 애국지사, 한국화가 이무성 ) 2시 강연인데 숙박 장소인 아사쿠사에서 여러 번 차를 갈아타고 가는 바람에 1시 30분이나 되어 도착해서 보니 강연장인 고려박물관 안은 이미 강연을 듣기 위해 입장한 청중들로 초만원 상태였다. 1천 엔씩 내는 유료 입장인데도 153명이 입장하여 고려박물관이 생긴 이래 (23년째) 최고의 참석자였다는 후문을 듣고 강연자인 필자는 물론이고 주최자인 고려박물관 쪽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한 장소가 협소하여 발걸음을 돌린 사람들도 많았다는 이야길 듣고 나는 ‘일본의 양심’을 확인 했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편집국장] 시내버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청년이 버스를 타려다 말고 묻는다. 경교장 가나요? 경교장??? 서울역사박물관요. 서울역사박물관이라 해야지. 거긴 가는데 경교장은 몰라.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金九) 선생이 암상당하기 전까지 겨레를 위해 일했던 서울 서대문 사적 제465호 경교장 그 청년은 고개를 흔들며 버스를 탄다. 아마도 경교장을 모르다니 배달겨레 맞아?라고 속으로 되뇌었을 것이다. 경교장이란 어떤 곳인가? 경교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金九) 선생이 1945년 11월 중국에서 환국한 이래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당하기까지 민족을 위해 일했던 곳이다. 서울 서대문 서울역사박물관 옆 삼성병원 구내(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29)에 있는 사적 제465호로 지정된 문화유적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득중 편사연구사에 따르면 선생이 암살당한 6월 26일부터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 명이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 김 연구사는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진 만큼 조문객수는 200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며, 영결식 당일에는 인근 상가가 가게 문을 닫았고, 경교장에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까지 인파가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병약한 몸 이끌고 독립의 노래 부른 신의경 이윤옥 금지옥엽으로 기른 귀한 딸 왜경의 군홧발에 치어 학교 안에서 잡혀가던 날 담담히 수갑 차고 돌아서던 병약한 외동딸 다신 못보고 무더위 속 가슴 앓다 끝내 숨져간 어머니 쇠창살 속에서 오매불망 그리던 어머니 영정으로 만나 어머니 몫까지 독립의지 다지며 묵묵히 걸어온 고난의 길 천국의 어머니도 장하다 웃음 지으시겠지 대한애국부인회와 신의경(辛義敬, 1898. 2.21 ~ 1997.8.11)애국지사 ▲대구감옥소 동지들 1 김영순 2 황애덕 3 이혜경 4 신의경 5 장선희 6 이정숙 7 백신영 8 김마리아 9 유인경 (사진 연동교회 제공)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했거니와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 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사람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하려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되 후퇴 할 수는 없다. 의식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해 그 이상(理想)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 구한말 국권을 잃자 왜군에 항쟁하며, 의병의 후원자로 식량과 가축(소)을 지원하고 호군활동을 하였다. 왜군이 감나무에 결박 고문과 폭행 장독으로 현장에서 절명하신 증조부 정환종.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 아들을 살리기 위해 숨겨주고 의병의 군량지원과 호군활동을 하다 발각되어 역적으로 몰려 고문 폭행의 장독으로 돌아가신 증조모 선갈음. * 국권쟁취의 의를 행함이 사람의 도리다. 라며 변성명하고 항쟁하여 투옥 되어서도 탈옥하는 담대함과 용맹한 의병장인 조부 정태화. * 의병장 남편 덕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미국에서 독립운동 뒷바라지한 차경신 이윤옥 일제가 조선의 독립투사에게 극악한 일을 했다 해도 장작 피고 그 위에 사람 집어넣긴 임의 엄니가 처음일 거외다 어머니 불구덩이에서 건져 올려 벗겨진 살 틈으로 벌건 피고름 흐르던 날 딸로서 해드릴 것 없던 그 통한의 눈물은 한 평생 임의 독립투지 자양분 되었어라 누렁 호박 익어 가는 고향 평안도 떠나 북풍한설 만주 땅 누비다가 이역만리 미국에서 목 터져라 부른 독립의 노래 고향땅 그 누구 있어 귀담아 들어줄거나 ▲ 중국 망명시절 차경신 애국지사(왼쪽) 언어와 의복 같은 동족이 한마음 한뜻 든든하구나 원수가 비록 산해 같으나 자유의 정신 꺾지 못하네 -국혼가 가운데서- 역사가 오래된 나의 한반도야 내 선조와 유적을 볼 때에 너를 사모함이 더욱 깊어진다. 한반도야 -한반도 가운데서- 차경신(車敬信, 모름 ~ 1978.9.28) 애국지사의 동생 차경수 선생은 경신 언니가 죽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언니 수첩에 고국을 사모하는 노래, 절개의 노래가 여러 종류 적혀 있었다면서 《호박꽃 나라사랑》에 여러 편의 시를 소개했다. 위 시는 그 가운데 일부다. 낯설고 물선 남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부른 독립의 노래 고수복 이윤옥 노란봉 정기 받고 자란 몸 경성에 올라와 푸른 꿈 펴렸더니 가지에 푸른 순 돋기도 전 밑동 잘렸네 방적공장 다니면서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뜨거운 독립의 노래 목터져라 불렀어라 일제에 잡혀 모진 고문 당하지 않았다면 스물 둘 꽃다운 나이 접고 눈 감지 않았을 것을 고향집 동구 밖서 손 흔들던 어머니 귀한 딸 주검에 끝내 오열 터뜨렸네 ▲ 어여쁜 처녀 고수복 애국지사의 수감당시 모습 고수복 (高壽福, 1911 ~ 1933. 7. 28) 고수복 애국지사는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올라와 스무 살 되던 해인 1931년 9월 종방방직회사(鐘紡紡織會社) 경성제사공장(京城製絲工場) 직공으로 입사하였다. 1932년 1월 말 정길성, 김응룡 등과 협의하여 좌익노동조합준비회(左翼勞動組合準備會)를 결성하기 위해 경성부내 각 공장으로 분담 활동을 하였으며, 3월 하순 경성부 팔판동에 거주하는 강응진의 집에서 정길성, 김응룡, 권오경과 만나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단체인 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준비위원회의 총책임자에 권오경, 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