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영국인 베델( 裴說 ernest thomas bethell, 1872. 11. 3. ~ 1909. 5. 1. )은 일제강점기 한국민의 입장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저항한 인물이다.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입국하였다. 당시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로 전국에서 반일 민족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선생은 양기탁과 함께 국한문판 및 순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 활동을 보도하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벌였다. ▲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알리고 합세했던 베델 일제의 사전 검열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는 실을 수 없었던 강력한 반일 논조의 기사를 외국인 신분을 이용해 보도했다. 특히, 고종 친서를 영국 트리뷴지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해 을사조약의 무효를 알리는 등 일본의 강압적인 침략상을 국내외에 폭로했다. 한편, 일제는 한반도 침략에 큰 걸림돌이던 베델을 추방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선생의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결국 선생은 영국 법정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차경신 선생은 국내에서 부인회, 간호대 및 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어학교 초대교장 및 대한애국부인단 총단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각한 평등관을 정립하고, 민족대표 양전백 선생이 세운 보성여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였다. 졸업 후 명신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다시 정신여학교 사범과에서 수학한 선생은 이후 함남 영생학교, 진성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918년 선생은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평생의 동지인 김마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요코하마 유학생 대표였던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2.8독립선언서 전문을 국내 반입할 것을 논의하고 부친의 사망을 구실로 국내로 들어왔다. 여성독립운동가 차경신 선생 2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한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비밀장소인 백산상회에서 신한청년단 당수 서병호 등을 만나 여성 단체 조직을 계획하였고, 평북 선천에서 신한청년당 회원 50여 명을 모집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양전백(梁甸伯,1870.3.10. ~ 1933.1.17.)선생은 평북 선천의 명신학교, 신성중학교, 보성여학교 등의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105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자주독립을 주창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리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의 후예로 증조부 슬하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한 선생은 15세에 과거 준비를 하기도 하였으며, 1892년 김관근과 함께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접하고 평북 구성으로 돌아와 한문과 함께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 양전백 선생 1894년 12월 청일전쟁으로 평안도 일대가 온통 싸움터가 되어 학당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선생은 1896년 12월 평양에서 휘트모어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통역을 하였다. 평북지역에서 휘트모어와 함께 선천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를 세우고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선천 유지와 교인들의 찬조를 받아 초등교육기관으로 명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평북 일대의 교회들은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막사 또는 병원으로 징발되어 시설이 파괴되거나 불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한상렬((1876. 4. 2.~1926. 9. 19.) 선생은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뒤 횡성에서 의병을 조직, 민긍호 의진 등과 연합의진을 형성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였으며, 만주 망명 후 독립군 참모로 보급품 확보 등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 쉰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밀사를 파견한 광무황제의 책임을 물어 강제로 퇴위시킨 후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국권침탈의 길로 들어섰다. ▲ 열악한 의병의 무기 1907년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본격화되자 제1연대 1대대 대장 박승환 참령은 자결로 항거하였으며, 이는 시위대 대원들에 이어 지방 진위대의 봉기로 확산되었고,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어 후기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원주진위대가 가장 먼저 봉기하였고 그 중심에 민긍호 의병장이 있었다. 한상렬 선생은 고향인 강원도 횡성에서 일어나 지역민을 중심으로 의진을 형성하였다. 선생은 민긍호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약 2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의병
[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이민화 선생(1898-1923)은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북로군정서 교성대 소대장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선생은 1898년 충남 아산군 염치면에서 태어났다. 충무공 이순신의 11대손인 선생은 어릴 때부터 충무공의 무훈을 마음에 새겼고, 결혼 후 1917년 12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선생의 망명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세영(이천민)의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충무공의 후손으로 일제에 항거할 것을 다짐하고 망명을 결행한 선생은 무장투쟁을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삼고 군사간부로서의 능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 이민화 독립투사 만주지역은 1911년 삼원포 추가가의 신흥강습소로부터 시작하여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의 요충지였다.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배출된 3천5백여명의 졸업생들은 만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이후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선생은 1920년 왕청현 십리평의 군사간부학교인 사관연성소 제2구대장으로 생도를 통솔하면서 교관으로 활동하였고, 북로군정서에서 가장 강력했던 엘리트 군대인 교성대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봉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나라를 빼앗기자 우리 선열들은 가만히 좌시하지 않고 독립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력을 양성하는 사람, 임시정부를 세워 나라의 뼈대를 만드는 사람, 자라나는 2세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 독립자금을 모으는 사람 등 각자의 위치에서 단 한치의 흐트럼 없이 우리 동포들은 뛰고 뛰었다. 친일파 매국노들을 빼고 우리 겨레는 합심으로 조국광복을 위해목숨을 바쳤다. 거기에는 남여가 따로 없고 늙은이나 어린이도 따로 없었다. 최중호 애국지사는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격인 조선총독 데라우치 암살 계획에 앞장서다 투옥되는 등 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뛰신 분이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최중호(崔重鎬, 1891. 1. 20.~ 1934. 3. 28) 애국지사를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최중호 애국지사 선생은 1891년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양산학교(황해도 안악 소재)를 다니면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김구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1911년 선생은 일제가 항일운동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소위 테라우치(寺內)총독 암살음모사건(소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전덕기 선생은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아버지 전한규, 어머니 임씨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 부모 모두를 여의고 숯장수인 삼촌댁 양자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17살 되던 해 당시 서울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선생의 삶은 결정적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시병원을 설립하고 민중 지향적 선교를 전개한 인물로서 선생은 그의 민중 지향적 목회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시병원의 고용인으로 스크랜턴의 활동을 돕던 선생은 21살 되던 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상동교회 창설사업에 참여하였고, 1902년 마침내 정식으로 전도사가 되었다. 이후 선생은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한 결과 '민중 전도자'로서의 이름이 점차 교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덕기 선생 1903년 선생은 상동교회 내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정순만, 박용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 해체 이후 흩어졌던 민족운동 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힘썼다. 이후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을사늑약 반대, 일제의 군용지 매수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2014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재선이라고 합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편지를 쓰기 전에 감사인사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신 선생님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삶을 영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들께서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놓아가며 지키신 이 나라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제 나름
[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가 독립기념관, 광복회와 공동으로 연병호 선생을 지난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았었다. 선생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와의 연계역할을 담당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한국혁명당의 조직 및 신한독립당으로 통합 등 정당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친일파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처단 활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894년 11월 22일 충북 괴산 도안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형 연병환(1878~1926)의 영향을 받아 1915년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를 다니며 안재홍, 조용주 등과 교류하고, 조선기독청년회, 조선인유학생학우회 등을 통해 민족현실을 논의하는 등 동지적 유대를 쌓아 나갔다. ▲ 연병호 애국지사 선생이 독립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면서였다. 청년외교단의 외교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활동을 위해 1919년 말 북간도에 근거를 둔 대한정의단군정사에 합류해 그 역할을 수행하였고,〈외교시보〉를 발행해 국내 인사들에게 내외정세의 동향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 2세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기자]구국의 책임이 어찌 남자들만의 몫이겠습니까? 우리 3천만 한국민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 아닙니까? 남녀의 역량을 합하여 각기 맡은바 직분과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세계, 진선진미의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방순희 선생이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한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선언서 중에서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방순희 선생을 2014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대소련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한국독립당 중경구당 간부, 한국애국부인회 부주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1904년 1월 30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11년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하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1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와 여성교육의 전당인 정신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4년 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 백산소학교의 교사가 되어 재러 한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한인학교 폐쇄 정책에 따라 더 이상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