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2014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재선이라고 합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편지를 쓰기 전에 감사인사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신 선생님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삶을 영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들께서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놓아가며 지키신 이 나라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제 나름
[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가 독립기념관, 광복회와 공동으로 연병호 선생을 지난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았었다. 선생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와의 연계역할을 담당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한국혁명당의 조직 및 신한독립당으로 통합 등 정당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친일파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처단 활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894년 11월 22일 충북 괴산 도안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형 연병환(1878~1926)의 영향을 받아 1915년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를 다니며 안재홍, 조용주 등과 교류하고, 조선기독청년회, 조선인유학생학우회 등을 통해 민족현실을 논의하는 등 동지적 유대를 쌓아 나갔다. ▲ 연병호 애국지사 선생이 독립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면서였다. 청년외교단의 외교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활동을 위해 1919년 말 북간도에 근거를 둔 대한정의단군정사에 합류해 그 역할을 수행하였고,〈외교시보〉를 발행해 국내 인사들에게 내외정세의 동향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 2세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기자]구국의 책임이 어찌 남자들만의 몫이겠습니까? 우리 3천만 한국민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 아닙니까? 남녀의 역량을 합하여 각기 맡은바 직분과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세계, 진선진미의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방순희 선생이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한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선언서 중에서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방순희 선생을 2014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대소련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한국독립당 중경구당 간부, 한국애국부인회 부주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1904년 1월 30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11년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하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1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와 여성교육의 전당인 정신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4년 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 백산소학교의 교사가 되어 재러 한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한인학교 폐쇄 정책에 따라 더 이상 교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번갯불 번쩍 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며 독립운동을 앞에 놓고 이리저리 재지 말고 곧바로 힘을 모으자고 한 백초월 선생은 승려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백초월(白初月, 1878. 2. 17. ~ 1944. 6. 29.)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승려 신분으로 30대 초반에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식인이었다.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활약한 한용운, 백용성이 일제에 체포되자 선생은 항일이념인 일심교 전파를 통해 불교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에게 조달할 군자금 모집 및 용산역 대한독립만세 격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였다. 선생은 1878년 경남 고성에서 아버지 백하진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수원 백씨 26세손으로 소년 시절인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였다. 해인사에서 경학과정을 마친 후 교종의 최고 단계인 대교사(大敎師) 법계를 받았다. ▲ 백초월 애국지사 선생은 기독교와 천도교 등 여타 종교에서는 3.1운동에 적극 가담한데 반해 불교계가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면서 진관사를 비롯한 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선 여성을 무지 속에서 해방한 차미리사 이윤옥 시집살이에 쪼들리는 여자 무식하다고 남편에게 구박받는 여자 집안에만 들어앉아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들 야학에 불러 모아 글 깨우치고 나라의 위기를 가르치길 수십 성상 배우지 않는 게으름으로 조국 광복 논할 수 없어 불철주야 조선 여자 일깨우려 삼천리 방방곡곡 밟지 않은 곳 그 어디랴 무궁화 꽃 심듯 일군 근화학교 왜놈들 이름 바꾸라 총 들이대 바꾼 이름 덕성은 조선 여자교육의 요람 매국의 더러운 돈 한 푼 섞지 않고 깨끗한 조선의 돈으로만 일구어 더욱 값진 학문의 전당 청각장애 딛고 일어나 조선 독립의 밑거름을 키워낸 영원한 겨레의 스승 그 이름 차미리사여! ▲ 미국 스캐리트 신학교 재학시절의 차미리사(1910~1912) 차미리사(車美理士, 金미리사, 1880.8.21-1955.6.1)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조선 여자에게는 지금 무엇보다도 직업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인해방이니 가정개량이니 하지만은 다 제 손으로 제 밥을 찾기 전에는 해결이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구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여성이여 비굴치마라 사자후 토한 김조이 이윤옥 창원의 딸 푸른 꿈 안고 경성의 다락방에서 헐벗고 무지한 여자들 불러 모아 환난 중인 조국을 일깨웠네 비바람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꿋꿋이 독립의 그날까지 여성이여 비굴치마라 사자후 토해내며 독립투쟁 앞장선 불굴의 정신 조국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하리 김조이 (金祚伊, 1904. 7. 5 ~ 납북) ▲ 김조이 애국지사의 서대문형무소 수감 사진(1935.1.17.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김조이 애국지사는 1904년 경남 창원군 웅천면 성내리에서 아버지 김종태와 어머니 배기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사립학교인 '계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을 떠났는데 할아버지가 '300석지기'로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1922년 1월 고향에서 계광학교를 마치고 18살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고학을 하던 중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에 가입해 1926년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21일 서울에서 허정숙주세죽김필순정봉배혁수박정덕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자청년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의 창립 발기인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동포의 비분강개를 토해내던 여장부 ‘최형록’ 이윤옥 이백만 동포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길은 동북아를 강점한 일제를 몰아내는 일 이백만 동포가 살아 갈 길은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국토를 회복하여 돌아가는 길 사자후를 토해 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동포의 비분강개를 대신하던 여장부 중국신문 앞 다투어 당찬 홍일점 여장부의 애국정신 만고에 적어 전했네. ▲ 최형록 애국지사 최형록(崔亨祿 1895. 2.20 ~ 1968. 2.18) “일본이 동북을 강점한 이래 상해에 거주하고 있는 각계 한국인들은 침통함을 금하지 못했다. 어제 오후 2시 무렵 한국 교포들은 또 민국로의 한 교회당에서 전체대회를 소집했다. 대회 참석자는 무려 300여 명이나 된다. 장내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중국인과 함께하자는 플래카드로 넘쳐났다. 민단장 김구가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개회를 선포하는 동시에, 대회 취지를 설명했다. 이를 뒤이어 이동녕을 주석으로 선출하여 대회를 진행했다. 조소앙이 일본이 동북을 강점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였고, 뒤이어 차리석, 조완구, 박창세, 최형록과 중국 기자 진 씨 등이 전후하여 비분강개한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양대리 만세운동 14살 소녀 한이순 이윤옥 열네 살 광명학교 어린 소녀 읍내에 번진 만세운동 눈감을 수 없어 태극기 높이 들고 양대리 시장으로 떨쳐 나갔네 다시는 조국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다짐한 태극의 물결 아우내의 유관순 양대리의 한이순 꺼지지 않는 횃불 두 소녀 높이 들어 독립의 투지 만천하에 비추었네 한이순(韓二順,1906.11.14 ~ 1980. 1.31) ▲ 한이순 애국지사 피고 한이순은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사립광명학교 학생으로 대정 8년(1919) 3월 10일 무렵 학교 안에서 입장 장날(20일)을 기하여 이 학교의 학생 다수를 선동하여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만세를 부르기로 공모하였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학교 안에서 서로 공동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17일 무렵 학교 학생을 상대로 만세운동을 미리 공모하였고 20일 오전 10시 양대리 장날을 이용해 이 학교 학생 80명을 인솔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 위 기록은 조선총독부 검사 야마다 순페이(山田俊平)가 한이순 애국지사에게 사립광명학교 학생으로 동교생을 선동 일반주민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치안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무등산 소녀회로 왜경을 떨게 한 박옥련 이윤옥 무등산 푸른 정기 누천년 흐르는 땅 청운의 꿈동산에 어린 소녀 불러 모아 아픈 조국의 상처 매만지며 민족의 새살 돋게 한 임이시여 꿈 많은 열여섯 소녀 차디찬 감옥에서 모진 박해 견디며 독립의 끈 놓지 않았던 임은 티 없이 맑고 강한 소녀였어라 ▲ 증손자와 다정한 한때(증손녀 한서인, 규일과 1997년 2월 8일 설날) 박옥련(朴玉連, 1914.12.12~ 2004.11.21)애국지사 형님이 돌아가시고 제가 어머니를 4년간 모셨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앓아누우시지 않고 잠자듯이 운명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해요 박옥련 애국지사의 차남 한상철(79살) 씨는 고양시 중산마을 집으로 찾아간 글쓴이에게 이렇게 운을 떼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에 대해 그다지 많은 말씀은 안 해주셨습니다. 다만 감옥에 끌려가셔서 고통을 받으셨다는 말씀은 조금 하셨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아드님의 모습은 꾸미지 않은 겸손함 그 자체였다. 박옥련 애국지사를 살아생전 뵙지는 못했지만 왠지 당신을 많이 닮은 아드님을 뵙는 순간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군자금 모아 광복 꽃피운 한영신 이윤옥 한 땀 한 땀 자수 놓아 수예품 만들며 다진 마음 은비녀 빼고 머리카락 잘라 독립의 꿈을 키우던 마음 여자들이 움직여야 산다 여자들이 움직여야 산다 독려하며 앞장서서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든 이여 임이 모은 군자금 독립의 밑거름 되어 고귀한 광복의 꽃으로 피어났어라 한영신(韓永信,1887. 7.22 ~ 1969.2.20) 평북 신의주사람으로 1919년 6월 평양에서 김용복 김보원 김신희 등 장로파 부인 신도들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이 부인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평양 장대현 예배당에서 결성된 애국부인회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집 및 임시정부의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는 한편 평안도일대의 장로파 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때 그는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하여 노파로 변장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 무렵 평양에서는 장로파를 중심한 애국부인회 외에도 감리파를 중심으로 생겨난 애국부인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양파의 여성조직들은 합동을 모색하여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로 통합하였는데, 이때 한영신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