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번갯불 번쩍 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며 독립운동을 앞에 놓고 이리저리 재지 말고 곧바로 힘을 모으자고 한 백초월 선생은 승려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백초월(白初月, 1878. 2. 17. ~ 1944. 6. 29.)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승려 신분으로 30대 초반에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식인이었다.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활약한 한용운, 백용성이 일제에 체포되자 선생은 항일이념인 일심교 전파를 통해 불교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에게 조달할 군자금 모집 및 용산역 대한독립만세 격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였다. 선생은 1878년 경남 고성에서 아버지 백하진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수원 백씨 26세손으로 소년 시절인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였다. 해인사에서 경학과정을 마친 후 교종의 최고 단계인 대교사(大敎師) 법계를 받았다. ▲ 백초월 애국지사 선생은 기독교와 천도교 등 여타 종교에서는 3.1운동에 적극 가담한데 반해 불교계가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면서 진관사를 비롯한 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선 여성을 무지 속에서 해방한 차미리사 이윤옥 시집살이에 쪼들리는 여자 무식하다고 남편에게 구박받는 여자 집안에만 들어앉아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들 야학에 불러 모아 글 깨우치고 나라의 위기를 가르치길 수십 성상 배우지 않는 게으름으로 조국 광복 논할 수 없어 불철주야 조선 여자 일깨우려 삼천리 방방곡곡 밟지 않은 곳 그 어디랴 무궁화 꽃 심듯 일군 근화학교 왜놈들 이름 바꾸라 총 들이대 바꾼 이름 덕성은 조선 여자교육의 요람 매국의 더러운 돈 한 푼 섞지 않고 깨끗한 조선의 돈으로만 일구어 더욱 값진 학문의 전당 청각장애 딛고 일어나 조선 독립의 밑거름을 키워낸 영원한 겨레의 스승 그 이름 차미리사여! ▲ 미국 스캐리트 신학교 재학시절의 차미리사(1910~1912) 차미리사(車美理士, 金미리사, 1880.8.21-1955.6.1)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조선 여자에게는 지금 무엇보다도 직업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인해방이니 가정개량이니 하지만은 다 제 손으로 제 밥을 찾기 전에는 해결이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구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여성이여 비굴치마라 사자후 토한 김조이 이윤옥 창원의 딸 푸른 꿈 안고 경성의 다락방에서 헐벗고 무지한 여자들 불러 모아 환난 중인 조국을 일깨웠네 비바람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꿋꿋이 독립의 그날까지 여성이여 비굴치마라 사자후 토해내며 독립투쟁 앞장선 불굴의 정신 조국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하리 김조이 (金祚伊, 1904. 7. 5 ~ 납북) ▲ 김조이 애국지사의 서대문형무소 수감 사진(1935.1.17.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김조이 애국지사는 1904년 경남 창원군 웅천면 성내리에서 아버지 김종태와 어머니 배기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사립학교인 '계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을 떠났는데 할아버지가 '300석지기'로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1922년 1월 고향에서 계광학교를 마치고 18살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고학을 하던 중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에 가입해 1926년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21일 서울에서 허정숙주세죽김필순정봉배혁수박정덕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자청년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의 창립 발기인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동포의 비분강개를 토해내던 여장부 ‘최형록’ 이윤옥 이백만 동포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길은 동북아를 강점한 일제를 몰아내는 일 이백만 동포가 살아 갈 길은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국토를 회복하여 돌아가는 길 사자후를 토해 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동포의 비분강개를 대신하던 여장부 중국신문 앞 다투어 당찬 홍일점 여장부의 애국정신 만고에 적어 전했네. ▲ 최형록 애국지사 최형록(崔亨祿 1895. 2.20 ~ 1968. 2.18) “일본이 동북을 강점한 이래 상해에 거주하고 있는 각계 한국인들은 침통함을 금하지 못했다. 어제 오후 2시 무렵 한국 교포들은 또 민국로의 한 교회당에서 전체대회를 소집했다. 대회 참석자는 무려 300여 명이나 된다. 장내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중국인과 함께하자는 플래카드로 넘쳐났다. 민단장 김구가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개회를 선포하는 동시에, 대회 취지를 설명했다. 이를 뒤이어 이동녕을 주석으로 선출하여 대회를 진행했다. 조소앙이 일본이 동북을 강점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였고, 뒤이어 차리석, 조완구, 박창세, 최형록과 중국 기자 진 씨 등이 전후하여 비분강개한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양대리 만세운동 14살 소녀 한이순 이윤옥 열네 살 광명학교 어린 소녀 읍내에 번진 만세운동 눈감을 수 없어 태극기 높이 들고 양대리 시장으로 떨쳐 나갔네 다시는 조국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다짐한 태극의 물결 아우내의 유관순 양대리의 한이순 꺼지지 않는 횃불 두 소녀 높이 들어 독립의 투지 만천하에 비추었네 한이순(韓二順,1906.11.14 ~ 1980. 1.31) ▲ 한이순 애국지사 피고 한이순은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사립광명학교 학생으로 대정 8년(1919) 3월 10일 무렵 학교 안에서 입장 장날(20일)을 기하여 이 학교의 학생 다수를 선동하여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만세를 부르기로 공모하였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학교 안에서 서로 공동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17일 무렵 학교 학생을 상대로 만세운동을 미리 공모하였고 20일 오전 10시 양대리 장날을 이용해 이 학교 학생 80명을 인솔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 위 기록은 조선총독부 검사 야마다 순페이(山田俊平)가 한이순 애국지사에게 사립광명학교 학생으로 동교생을 선동 일반주민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치안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무등산 소녀회로 왜경을 떨게 한 박옥련 이윤옥 무등산 푸른 정기 누천년 흐르는 땅 청운의 꿈동산에 어린 소녀 불러 모아 아픈 조국의 상처 매만지며 민족의 새살 돋게 한 임이시여 꿈 많은 열여섯 소녀 차디찬 감옥에서 모진 박해 견디며 독립의 끈 놓지 않았던 임은 티 없이 맑고 강한 소녀였어라 ▲ 증손자와 다정한 한때(증손녀 한서인, 규일과 1997년 2월 8일 설날) 박옥련(朴玉連, 1914.12.12~ 2004.11.21)애국지사 형님이 돌아가시고 제가 어머니를 4년간 모셨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앓아누우시지 않고 잠자듯이 운명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해요 박옥련 애국지사의 차남 한상철(79살) 씨는 고양시 중산마을 집으로 찾아간 글쓴이에게 이렇게 운을 떼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에 대해 그다지 많은 말씀은 안 해주셨습니다. 다만 감옥에 끌려가셔서 고통을 받으셨다는 말씀은 조금 하셨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아드님의 모습은 꾸미지 않은 겸손함 그 자체였다. 박옥련 애국지사를 살아생전 뵙지는 못했지만 왠지 당신을 많이 닮은 아드님을 뵙는 순간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군자금 모아 광복 꽃피운 한영신 이윤옥 한 땀 한 땀 자수 놓아 수예품 만들며 다진 마음 은비녀 빼고 머리카락 잘라 독립의 꿈을 키우던 마음 여자들이 움직여야 산다 여자들이 움직여야 산다 독려하며 앞장서서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든 이여 임이 모은 군자금 독립의 밑거름 되어 고귀한 광복의 꽃으로 피어났어라 한영신(韓永信,1887. 7.22 ~ 1969.2.20) 평북 신의주사람으로 1919년 6월 평양에서 김용복 김보원 김신희 등 장로파 부인 신도들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이 부인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평양 장대현 예배당에서 결성된 애국부인회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집 및 임시정부의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는 한편 평안도일대의 장로파 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때 그는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하여 노파로 변장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 무렵 평양에서는 장로파를 중심한 애국부인회 외에도 감리파를 중심으로 생겨난 애국부인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양파의 여성조직들은 합동을 모색하여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로 통합하였는데, 이때 한영신 애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육아일기 쓰며 독립의 횃불 든 최선화 이윤옥 중일 전쟁 쏟아지는 포탄 속 숨어든 방공호에서 철없이 보채는 아이 보듬으며 가슴 졸였지 나라 잃고 동굴 집 삼아 떠돌던 통한의 세월 사랑스런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 나라 기필코 되찾으리라 굳은 각오 새기며 상해에서 중경까지 칠천 리 고단한 길 이 악물고 광복의 그날까지 뛰고 또 뛴 항일투사여 ▲ 최선화 ․ 양우조 부부 독립운동가(1937.3.22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최선화(崔善嬅, 1911. 6.20 ~ 2003.4.19) 아침 열시쯤 되어 공습경보가 울렸다. 유주의 하북은 유주시(柳州市)였고 하남은 새로 개척하고 있는 지대라 가옥과 상점이 별로 많지 않았다. 유주시를 북으로 하고 흘러가고 있는 강의 남쪽엔 병풍 모양으로 길게 산이 연결되어 있는데 천연동굴이 99개나 뚫려 있다고 한다. 이곳이 임시 방공호로 이용되고 있는 굴이다. 하지만 이 천연동굴의 단점은 입구에 작탄을 맞으면 그대로 무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공습이 울리고 나면 피난민들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가운데 줄임)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일본 비행기가 작탄을 수없이 떨어뜨리는 모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총부리도 두렵지 않은 파주의 여전사 임명애 이 윤 옥 심학산 깊은 골 고고한 학 고요히 내려앉은 맑고 고운 땅 교하리 장터에 낭자히 흐르던 핏자국이 웬 말이냐 동포의 가슴에 겨누던 일제의 총부리 맞서 당당히 호령하던 여전사 만세운동 앞장서다 쇠창살 속 갇혔어도 불굴의 그 투지 굽히지 않았어라 ▲ 임명애 애국지사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20년 초 찍은 것으로 추정) 임명애(林明愛,1886. 3.25 ~ 1938. 8.28)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 율곡이이와 청백리 황희 정승의 고장 파주에서도 3․1만세운동은 비껴 갈 수 없었다. 아니 비껴가는 게 아니라 불같이 타올랐다고 해야 옳을 정도로 거센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다. 파주는 지리적으로 서울 가까이에 자리 할뿐더러 북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다른 지역에 견주어 서울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 활동에 발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따라서 파주지역은 3․1만세운동 당시에도 서울의 상황이 잘 전해졌으며, 이는 파주의 3․1만세운동에 일정한 활력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2014년 3월 8일 토요일 오후 2시. 도쿄 한복판 신오쿠보에 있는 고려박물관 7층 전시실 안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모여들었다. 특강 강연자인 필자는 하루 전날 고려박물관을 찾아 이날 있을 특강 준비를 하면서 와타나베(渡辺泰子)간사와 차를 마시면서 “몇 명이나 올까요?” 라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 와타나베 간사는 “글쎄요. 많이 알렸는데...걱정이네요” 라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다음날 특강 장소를 찾고는 깜짝 놀랐다. ▲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일본 고려박물관 전단 (표지 그림 김향화 애국지사, 한국화가 이무성 ) 2시 강연인데 숙박 장소인 아사쿠사에서 여러 번 차를 갈아타고 가는 바람에 1시 30분이나 되어 도착해서 보니 강연장인 고려박물관 안은 이미 강연을 듣기 위해 입장한 청중들로 초만원 상태였다. 1천 엔씩 내는 유료 입장인데도 153명이 입장하여 고려박물관이 생긴 이래 (23년째) 최고의 참석자였다는 후문을 듣고 강연자인 필자는 물론이고 주최자인 고려박물관 쪽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한 장소가 협소하여 발걸음을 돌린 사람들도 많았다는 이야길 듣고 나는 ‘일본의 양심’을 확인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