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대종교(大倧敎)는 삼신일체(三神一體) ‘한얼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단군 한배검을 교조(敎祖)로 받드는 한국 고유의 종교다. 대종교의 '대종(大倧)'은 하느님이란 뜻이다. ‘대(大)’는 ‘천(天)’에 속하며 우리말로 ‘한’이다. ‘종(倧)’은 신인 종자(字)로 순우리말로 ‘검' 또는 ‘얼’로 표현할 수 있다. 한얼님이 사람으로 변화해서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신 분이 바로 신인(神人)이다. 한얼님이 지상에 내려오심은 세상을 크게 널리 구제(弘益人間 理化世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은 서기전 2333년, 곧 단군기원 원년에 국조 단군이 첫 배달나라(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세웠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한 제4356돌 개천절입니다. 그리고 위 내용은 한국의 민족종교 대종교 누리집에 있는 대종교 소개글인데 대종교는 단군이 하늘을 여신 개천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대종교의 구현 목표를 보면 ‘홍익인간(弘益人間)ㆍ이화세계(理化世界)'라고 하여 고조선의 건국이념과 같지요.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1863 ∼1916) 선생은 을사늑약 매국노들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뒤 유배됐고, 그에서 풀려난 선생은 1909년 1월 15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개시는 친척 딸의 남편인 ‘정몽필’을 양자로 삼아, 뇌물 챙기기와 백성을 수탈하도록 했다. 또 김개시는 밤낮으로 정몽필과 방에 틀어박혀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고, 국정농단과 매관매직 같은 온갖 악한 짓을 함께 저질렀다.” 이는 펴낸이를 알 수 없는 책으로 조선시대 야사와 잡록을 모아놓은 《대동야승(大東野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김개시는 조선후기 제15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린 궁녀인데 민첩하고 꾀가 많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국정에 관여하여 권신인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瞻)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윤선도(尹善道)ㆍ이회(李洄) 등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잘못을 지적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고 말았지요.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잡혀 참수당하였습니다. 심지어 《인조실록》 1년(1623년) 9월 14일 기록에 보면 “김씨(김개시)는 곧 이른바 김 상궁인데 일찍이 선조의 후궁으로 있다가 뒤에 폐주(광해군)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무신년 선조의 승하 당시 약밥에다 독약을 넣었다는 말도 있었다. 적신 이이첨이 김씨에게 빌붙어 음흉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14년 전 오늘(1910년 9월 30일)은 이완용을 처단한 이재명 의사가 사형집행으로 순국한 날입니다. 일제의 침략 괴수들보다 같은 겨레로서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지름길이라 생각한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의사는 이 오적신들이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1909년 12월 22일 낮 11시 30분 무렵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칼을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의 허리를 찌르고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 등을 사정없이 찔렀지요. 그의 거사로 인력거 주변은 유혈이 낭자하였고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경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매국노 이완용은 불행히도 목숨을 건져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었지요. 이재명 의사는 1910년 봄 공판장에서 태연하고도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죄목을 통렬히 꾸짖고 나라를 위하여 그를 처단하였음을 역설하였으며, 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선의 왕후(宣懿王后, 조선 20대 경종의 계비) 기일(忌日)’이다. 임금에게 올리는 아침 수라에 고기붙이로 만든 반찬이 있었는데, 눈이 침침하였기 때문에 분별하지 못하고 집어 먹었다가 토했었다.” 이는 《영조실록》 47년(1771) 6월 29일 자에 있는 기록입니다. 이를 보면 영조임금은 육고기를 싫어했음은 물론 과식을 피하고 매일 아침을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조임금은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임금이기도 했지만,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임금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던 일 곧 “감선(減膳)”을 89차례나 했을 정도로 임금으로 해야 할 처신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감선은 권력 사이에서 신하들을 경고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감선이 아니라 아예 굶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또 영조는 자기 몸을 잘 섭생하여 81살까지 살았던 임금인데, 입맛도 까다로워 나이가 들수록 밥맛이 떨어지자 약간 짠 듯한 굴비와 톡 쏘는 갓김치, 매콤한 고추장이 입맛을 당긴다며 무척 즐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쌀밥보다는 보리밥을 즐겨 먹은 것은 물론 비린내가 나는 회와 생선은 절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날 전지(傳旨)에, ‘무뢰배(無賴輩)가 항상 법정에 와 품을 받고 대신 송사(訟事)를 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인도하여 송사를 일으키게 하며, 법률 조문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법을 남용해서 옳고 그름을 변경하고 어지럽게 하는데, 시속(時俗)에서 외지부(外知部)라고 하니, 쟁송(爭訟)의 번거로움이 진실로 이러한 무리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므로, 마땅히 엄하게 징계하여 간사하고 거짓됨을 없애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종실록》 95권, 성종 9년(1478년) 8월 15일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지금 일반 국민은 법에 호소할 일이 생기면 변호사를 찾습니다. 그것은 글을 안다 하더라도 갖가지 법과 시행령 그리고 판례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조선시대 글을 몰랐던 일반 백성은 도움을 받지 않으면 소장을 낼 수도 없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소장을 썼다 해도 문지기인 사령이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관아에 들어가 소송을 하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이런 까닭에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소장을 잘 쓰고, 관청에 쉽게 드나들면서, 형리와도 잘 알뿐더러 말도 잘하는 사람이 필요했지요. 조선시대에는 이럴 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전 갓난아이에게 입히던 옷으로 배냇저고리와 두렁치마가 있었습니다. 웃옷으로 입히던 배냇저고리는 깃과 섶을 달지 않은 아기 옷으로 배내옷, 깃저고리라고도 합니다. 희고 부드러운 무명이나 명주로 만드는데, 등에 솔기를 하지 않고 배와 손을 덮을 정도로 길게 만들었지요. 그런가 하면 아랫도리로 입히던 두렁치마는 조선시대 어린아이의 배부터 아랫도리를 둘러주는 기능적인 치마로서 '두렁이', 또는 '배두렁이'라고도 하지요. 배두렁이는 뒤가 겹치지 않게 만들었는데 이는 누워있는 아기에게 뒤가 배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 기저귀 갈기에도 편리하게 했습니다. 요즘처럼 옷감의 종류도 많지 않았고, 요즘 입는 속옷 같은 것도 없었던 옛날에 몸이 여린 갓난아이에게 보온용으로 입혔던 것이지요. 흔히 무명이나 명주, 융 따위를 겹으로 하거나 솜을 두어 만들었으며 누비로 만든 것이 많았습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 보면 두 이레쯤(14일) 될 때 이 두렁치마를 입히기 시작한 듯합니다. 아기들이 기어다니기 전까지는 남아나 여아같이 입었지만, 자라면서 주로 여아들만 입었습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두렁치마는 1900년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004년 6월 4일부터 쓰기 시작한 ’우리문화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가 드디어 20해를 넘어 다섯즈믄(5천)째가 되었습니다. 엊그제 즈믄이 넘고 3,333째가 되었는가 했는데 벌써 한 골(일만)의 반이 되었습니다. 17해(년) 넘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날마다 쓰다가 지난 2021년 제가 뜻하지 않게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잠시 쓰지 못했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2~3 째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문화에 대단한 슬기로움이 없던 제가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추임새가 멈추지 않았던 덕이 가장 컸다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특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독자 온(백) 여분의 성금, 말틀(전화), 카톡, 번개글(이메일)을 통한 추임새는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글로나마 엎드려 큰절을 드려 마지않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처음 마음먹었던 것처럼 우리문화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다가설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문화가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것임을 한분 한분께 알려드릴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 그림 이무성 작가(202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즈음 뉴스 제목를 보면 “‘추석선물 도착’…이 문자 조심하세요”, “추석 풍경도 변화…‘혼추족’과 여행객들로 달라진 명절”, “추석 연휴 환자 몰리는 응급실…경증ㆍ중증 구분법은?”처럼 명절 ‘추석’에 관한 얘기가 넘쳐납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한가위만 같아라? 기후 위기가 만들어 낸 ‘찜통’ 추석”처럼 ‘한가위’와 ‘추석’을 섞어 써놓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가위’ 경기도 ‘둥근 보름달’ 명소 6곳”처럼 ‘한가위’라는 말만 쓴 기사도 보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명절 이름을 두고도 이렇게 혼란스럽게 써야만 할까요? "신라 유리왕 9년에 국내 6부의 부녀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두 왕녀가 그들을 이끌어 7월 기만(음력 열엿새)부터 길쌈을 해서 8월 보름까지 짜게 하였다. 그리곤 짠 베의 품질과 양을 가늠하여 이기고 짐을 결정하고,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편을 대접하게 하였다. 이날 달 밝은 밤에 임금과 벼슬아치를 비롯해 많은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녀와 부녀자들이 밤새도록 ‘강강술래’와 ‘회소곡(會蘇曲)’을 부르고, 춤을 추며 질탕하고 흥겹게 놀았다.“ 위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04년 전 오늘(9월 14일)은 박재혁(朴載赫) 의사가 부산경찰서장을 처단한 날입니다. 박 의사는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김원봉 단장이 이끈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의열단은 암살 대상으로 조선총독과 고관, 군 장성, 친일파 거두 등 소위 7가살(七可殺)을 정하고, 파괴할 곳으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등을 정해 철저하게 응징하자고 결의하였으며 이를 행동에 옮긴 단체입니다. 이에 따른 박 의사는 같은 해 9월 13일 부산경찰서 파괴의 임무를 띠고 짐 속에 폭탄을 숨겨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왔습니다. 박 의사는 상하이를 떠나기 전, 부산경찰서장이 고서수집가라는 사실을 알아내, 고서상(古書商)으로 가장했으며, 그 고서 더미 속에 폭탄을 감추었지요. 박 의사는 14일 부산경찰서에 가서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에게 고서를 보여준다고 속인 다음 폭탄과 전단을 꺼내어 전단을 서장 앞에 뿌리면서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은 다 알고 왔다!'라고 말하면서, 폭탄을 서장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