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임금으로 정치를 잘하였다는 평가는 우선, 생각한 것을 말하기보다 남의 말을 끝까지 잘 듣는 일일 것이다. 임금은 우월적 지위에 있으므로 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또한 때로 나) 자기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막으며 다) 의견 개진을 어렵게 하거나, 펼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세종은 간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려 했다. 때로 독단으로 처리한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자기 신념[철학]에 따른 것이어서 전체 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실록에 나타난 예를 보자. (의산군 남휘의 간통과 폭행 등의 범행을 처벌해달라는 상소문) 우사간 이반(李蟠)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간(諫)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인군(人君)의 아름다운 덕행이라 하옵니다. 근일에 헌부에서 의산군 남휘(南暉)의 범행한 바를 두세 번 신청(申請, 일을 알려 청구함)하였사오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사오니, 전하께서 간(諫)함을 좇고 말함을 들어주시는 미덕에 어떠할까요? (⟪세종실록⟫ 6/8/4) 이 문제는 종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단국대 국악과에서 1980년대 초, 타악(打樂) 전공과 경서도 민요 전공을 신설하게 된 배경 이야기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대학 국악과의 전공과목은 기악(器樂)이 중심이었다. 이에 견줘 성악 분야는 그 뒤에 가곡(歌曲)과 판소리, 경서도창(京西道唱) 전공들이 신설되면서 해당 분야가 확대되었고, 이어 타악(打樂)이나 국악이론, 국악작곡 등도 전공 교과목으로 개설되었다. 특히, 타악 전공의 중요성은 벌써부터 인지되고 있었으나, 정작 전공분야로는 매우 늦게 선정이 된 셈이다. 서양음악의 지휘 형태와는 달리, 정악(正樂)과 민속악(民俗樂)합주에 있어서 지휘자의 역할은 바로 장고나 북 중심인데도, 타악기가 전공분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를 일이다. 뒤늦게 타악 전공을 포함하게 된 것은 어쩌면 시대의 요청이 아닌가 한다. 현재, 각 대학에서의 세부 전공 분야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기악분야로는 피리, 대금, 해금, 거문고, 가야금 외에 소금과 단소, 아쟁, 타악(장고ㆍ꽹과리)등의 기악 분야 전공과 성악분야의 정가, 판소리, 경서도창, 그리고 국악이론과 작곡 분야가 전공 교과목으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가시버시'는 요즘 널리 쓰이지 않는 낱말이다. 그런데 누리집에 가 보면 이것을 두고 말들이 없지 않다. 우리 토박이말을 알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주 쓰지 않는 토박이말이 이야깃거리가 되어서 그런가 보다. 이것은 참으로 반가운 노릇이다. 그런데 누리집에서 오가는 말들이 국어사전의 풀이 때문에 큰 잘못으로 빠지는 듯하다. 낱말의 뜻을 국어사전이 잘못 풀이하면, 그것은 법률의 뜻을 대법원이 잘못 풀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잡을 길이 없다. 그런데 '가시버시가 바로 그런 꼴이 되어 있다. 말이니 하는 것부터 잘못 짚은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상스러운 말과 점잖은 말을 가려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줄곧 받았고, 두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속되다', '낮잡다'는 것은 곧 상스럽다는 뜻임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부부'는 점잖은 말이거나 적어도 여느 말인데, '가시버시'는 그것을 속되게 이르거나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참으로 커다란 우리네 마음의 병집이 감추어져 있다. 국어사전이나 국어 교사가 점잖은 말이니 부지런히 익혀 쓰라고 가르치는 낱말은 모조리 중국에서 들여온 한자말이고, 속되고 낮잡고 상스러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는 우리나라처럼 아이들 돌잔치라는 게 없다. 하지만 남자 아이는 3살과 5살 그리고 여자 아이는 5살과 7살 되는 해를 맞이하여 부모님을 비롯한 일가친척과 함께 신사참배를 하는 습관이 있다. 이를 “시치고상(七五三)이라고 한다. 시치고상(七五三) 풍습은 1681년 도쿠가와 집안의 5대 장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川綱吉)의 장남 도쿠가와 도쿠마츠(川松)의 건강을 빌기 위해 비롯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신사에서 시치고상 의식을 치른 아이들은 손에 ‘치토세아메(千歲飴)’를 하나씩 받아 드는데 이는 가늘고 길게 만든 사탕으로 장수를 비는 뜻이 있으며 학과 거북이, 소나무, 대나무, 매화 등이 그려진 봉투에 담아준다. 일본인들은 태어난 지 한 달 됐을 때 오미야마이리(お宮参り)로 신사참배를 시작하여 3살, 5살, 7살 때 하는 시치고상(七五三), 그리고 20살 때 하는 성인식과 혼례식 등 인생의 중요 통과의례를 신사에서 치른다. 신사(神社, 진쟈)는 생활과 밀접한 의례(儀禮)가 행해지는 장소다. 11월 15일을 전후해서 일본 거리에서는 예쁘게 기모노 단장을 한 어린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로 3살, 5살, 7살을 맞이하는 어린이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입 동 - 이덕규 곡식 한 톨이라도 축내면 그만큼 사람이 굶는다 가을걷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빈손으로 떠난 오직 사람 아닌 것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아홉째 절기 입동(立冬)으로 이날부터 '겨울(冬)에 들어섭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10월부터 정월까지의 풍속으로 궁궐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임금에게 우유를 만들어 바치고, 기로소(耆老所)에서도 나이 많은 신하들에게 우유를 마시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임금이나 나이 많은 벼슬아치들에게 우유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제 임금이 아니어도 우유를 맘껏 마실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한 처지일 것입니다. 이런 궁궐의 풍습처럼 민간에서도 ‘치계미(雉鷄米)’라고 하는 아름다운 풍속도 있는데 이는 입동 등에 나이 든 노인들을 모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는데 이때는 아무리 살림이 어려운 집이라도 치계미를 위해 곡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도랑탕 잔치로 대신했지요. 입동 무렵 도랑을 파면 누렇게 살이 찐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는데 이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 노인들을 대접하고는 이를 ‘도랑탕 잔치’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국악과가 신설되고 첫 입학생들과 함께 1984년 10월, 제1회 국악과 정기연주회를 열었을 때, 예상 밖으로 많은 관객들이 객석을 메웠고, 연주 결과와는 관계없이 분에 넘치는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다는 이야기, 그러나 나와 학생들은 공개적인 발표 무대가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곳인가를 경험하게 되면서 곧바로 단국대 농장(충남 청양군 소재)에서 여름합숙 훈련(Summer Camp)을 시작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이 합숙 훈련에는 84~85학번 입학생들 70여 명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새로 입학한 타악 전공자들이 밤새도록 북, 장고, 꽹과리를 치는 소리가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특히 꽹과리의 김병곤(대전시립 연정국악원), 김창석(단국대 강사), 이홍구(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전승희(대전시립 연정국악원) 등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타악(打樂) 전공과 경서도 민요창 전공 분야를 신설하게 된 당시의 배경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국악계 흐름은 기악(器樂) 위주여서 대학 대부분이 기악 전공자 중심으로 입시가 이어졌다. 그 배경은 당시 국악을 전공으로 하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객석에 앉아, 국악과 동문들이 준비한 연주회를 지켜보는 동안, 나는 그들의 열정과 정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과 신설 40년, 또는 50년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대학의 동문들이 음악회를 준비해서 무대에 올리는 것은 아니다. 졸업생 스스로가 모교를 향한 애정과 열정이 없으면 불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동문 연주회를 지켜보는 동안, 참으로 묘한 감정과 함께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 묘한 감정은 대표 제자들로부터 격려사를 요청받을 때부터 이미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쉽게 억제가 되지 않고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40년 전, 처음 인연을 맺게 된 <단국대학교 국악과>와 함께 한 시간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그려지는 회상(回想)은 1983년 흰 눈이 내리던 초겨울의 인상이다. 학교로부터 부름을 받고, 천안 교정을 들어섰을 때, 낯설고 어리둥절해하던 나에게 교직원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와 친절한 안내는 나를 너무도 편안하게 해주었던 기억이 오래 남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조 임금의 정치에서 실록의 기록을 보면 ‘반복사지’와 오늘 다룰 ‘여경사지’(予更思之)의 표현이 눈에 띄는 임금이 세종이다. ‘반복사지反復思之’는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129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이 51건이다. ‘여경사지’는 ⟪조선왕조실록⟫ 모두 79건 중 세종이 38건이다. 일을 거듭 생각하여 처리했다는 뜻인데 이는 어떤 과제를 신중히 처리한 것이거나 아니면 실록의 기록 표현상 ‘신중히 처리했다’라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자. 첫째 이런 ‘반복사지’란 어떤 사건을 독단으로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모든 면에서 대화 곧 사맛의 논리[메커니즘] 다시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법칙을 준수하려 했다고 보인다. 셋째 세종은 가능하면 사람을 벌하기보다 품고 가는 융화(融和)의 정치를 하려 했다고 보인다. 곧 융화는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가려는 정신일 것이다. 관리들은 자기 업무에 충실한 나머지 남의 비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상소를 올리는 것이 임무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임금이 이런 상황을 잘 아우를 수 있느냐다. 그리하여 지난 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산 모양이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도리어 근심이 되는 것은 노포(老圃, 농사일에 경험이 많은 농부)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윗글은 권문해(權文海)의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에 나오는 상강 무렵을 아름답게 표현한 내용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절기 ‘상강(霜降)으로 말처럼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벌써 하루해의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습니다. 9월 하순까지도 언제 더위가 가시냐고 아우성쳤지만, 어느덧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노랗고 붉은 물감으로 범벅을 만든 듯 겨울을 재촉합니다. 이때는 추수도 마무리되고 겨울 채비에 들어가야 하지요.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진 날 한 스님이 운문(雲門·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람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운문 선사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니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단국대 국악과 창설 40돌 기림 동문연주회 관련 이야기로 악곡 선정에서부터 연습과정, 출연자들의 열의, 등등이 충실한 편이어서 음악회가 알차고, 수준이 높았다고 이야기하였다. 여러 종목이 선을 보였지마는, 특별히 김계희 동문이 생황(笙簧) 협연자로 나선 협주곡, <저 하늘 너머에>라는 작품은 생황 특유의 아름다운 음색도 음색이려니와 협연자의 자신감 넘치는 연주 태도, 그리고 독주악기와 관현악의 신비로운 대화, 등에서 관객은 압도당한 분위기였다. 생황협연곡과 함께 이원희 동문이 연주해 준 퉁소(洞簫) 협주곡 <풍전산곡>이나 박정숙 동문이 출연한 해금협주곡도 다양한 음색과 기교로 객석의 공감을 얻어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관객이 함께 호흡하며 추임새를 쏟아낸 순서는 단연 <민요연곡>과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이었다. 민요연곡은 남도민요와 경기민요를 교차로 불러나가는 형식이어서 자칫하면 다른 음악적 분위기가 충돌하여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그동안의 연습과정으로 이를 무난하게 풀어낸 점도 이채로웠다. 흔히 보면, 한 무대에서 음 체계가 다르고, 표현법이 같지 않은 두 부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