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48년 전인 1971년 오늘(12월 25일)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던 대연각호텔에서 큰불이 일어났습니다. 화재진압을 위해 거의 모든 소방차가 출동했고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되었는가 하면 주한미군의 소방차와 헬리콥터까지 투입되었지만, 불로 죽은 사람만 163명이었고 다친 사람은 63명이나 되었습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사건이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호텔 화재로 기록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4년 11월 3일에도 서울 청량리 대왕코너에서 불이 나 88명이 숨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 때도 한성에 큰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31권, 8년(1426년) 2월 15일 기록에 보면 “한성부에 큰불이 나 행랑 1백 6간과 중부 인가 1천 6백 30호와 남부 3백 50호와 동부 1백 90호가 불에 탔고, 남자 9명, 여자가 23명이 죽었는데, 타죽어 재로 화해버린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당시에는 한성의 집들이 목조건물이거나 초가였고, 심지어 집집이 처마가 붙어 있을 정도여서 그 피해가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세종은 소방서격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선종(善宗)이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며 머리에 금색 모자를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했다. 바깥나들이 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타고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를 장식하고, 동남동녀(童男童女)로 일산과 향화(香花)를 받들게 해 앞에서 인도했으며, 승려 200여 명으로 범패(梵唄)를 부르면서 뒤를 따르게 했다." 이는 《삼국사기》 권 50, 궁예 편에 나오는 기록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후고구려(뒤에 태봉)를 세운 궁예는 늘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했다고 하지요. 고려말, 조선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을 받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이 오시기를 간절히 비는 뜻을 담았습니다. 이 미륵신앙은 시골길을 걷다가 문득 풀숲 사이로 나타나는 미륵상이나 절에 모셔진 미륵보살상으로 나타나는데 근세 우리나라에서 생긴 증산교, 용화교 등도 미륵신앙이지요. 어느 시대건 지배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억압받는 사람들은 누군가 구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억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 실학자며, 과학자였던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어린 시절 묻습니다. "성리학에 나와는 있지만 농사짓는 법이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어른은 대답합니다. "그런 것은 잡학으로, 농부들이나 경험하여 아는 것이다." 그러자 홍대용은 다시 묻습니다. "잡학은 버려야 하나요? 잡학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이렇게 홍대용은 어려서부터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 가운데 가장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한쪽이 세계 문명의 중심(화-華 )이고, 어느 쪽이 오랑캐(이-夷)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해 자주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도 더 우월할 수가 없다는 주장을 펼쳐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의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하여야 함은 물론,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해 당시 지식인 가운데서 가장 진보적인 주장을 한 사람입니다. 홍대용은 서양 과학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가면 사적 제317호 “충주 미륵대원(彌勒大院)터”가 있습니다. 해발 378m의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미륵대원터에는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 형식의 불전이 있지요. 석굴 가운데에는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옆과 뒤 석벽의 가운데는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이 돋을새김 되어 있으며, 석굴 윗부분은 목조건물로 지어 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절터에는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문화재가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인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요. 1977년 1차 발굴조사 당시, ‘明昌三年金堂改蓋瓦(명창삼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곧바로 가 곡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묘(魯墓)가 바로 그 묘입니다. 흥도의 절의를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그 자손들이 본 영월군에 있기도 하고 괴산(槐山) 땅에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절의를 부추기어 장려하는 것으로 뽑아서 쓰는 은전이 있어야겠습니다." 이는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1699년) 1월 5일치 기사입니다. 여기서 노산군은 단종임금을 가리키며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를 하여서 거기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지요. 그때 목숨을 걸고 단종임금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엄흥도(嚴興道, 1404-1474)입니다. 그 뒤 엄흥도는 어명을 어기고 단종임금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러준 일로 평생을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종 때 그의 충절이 조정에서 논의되어 1698년에 공조좌랑, 1743년에 공조참의, 1833년에 공조참판, 마침내 1876년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게 됩니다. 엄흥도의 자손들 곧 영월엄씨 충의공계 광순문 종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는데, 1. 태극도(太極圖), 2. 서명도(西銘圖), 3. 소학도(小學圖), 4. 대학도(大學圖), 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7. 인설도(仁說圖), 8. 심학도(心學圖), 9. 경재잠도(敬齋箴圖), 10.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였다. 상은 그것이 학문하는 데 매우 매우 필요하고 절실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하여 이를 보면서 반성하였다. 그때 이황은 돌아갈 뜻을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이 도(圖)를 만들어 올리며 ‘제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이 도뿐입니다.’ 하였다.” 이는 선조실록 선조 1년(1568년) 음력 12월 1일(양력 12월 18일)에 퇴계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린 데 대한 기록입니다. 여기서 성학(聖學)이라는 말은 곧 유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하여 있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이황의 《성학십도》는 1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68살의 대학자가 바로 즉위 원년에 올렸던 것임을 생각할 때, 선조가 성왕(聖王)이 되게 하여 온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재)화랑문화재연구원은 지난 12월 3일 경산지식산업지구 진입도로구간의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5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사람얼굴 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지금까지 진주 중천리유적, 함평 금산리 방대형고분 같은 곳에서도 사람얼굴 모양이 장식된 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삼면에 돌아가며 얼굴 모양이 표현된 사례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발견된 토기는 높이가 28㎝가량으로, 토기의 윗부분 가운데에는 원통형으로 낮게 튀어나온 구멍을 뚫었습니다. 토기 옆면에는 같은 간격으로 동그란 구멍을 뚫어 귀를 만들었고, 각 구멍 사이에 만들어진 세 개의 면에 무표정한 듯, 심각한 듯, 말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 얼굴 무늬를 각각 새겼지요. 각 얼굴 무늬의 두 눈과 입은 기다란 타원형으로 밖에서 오려내었으며, 콧구멍에 해당하는 2개의 작은 구멍은 안에서 밖으로 찔러 만들었는데 콧등을 중심으로 양쪽을 살짝 눌러서 콧등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였습니다. 또 이 사람얼굴 모양 토기와 함께 시루 모양의 토기도 출토되었습니다. 출토된 몸통 중간 지점에는 소뿔 모양 손잡이 2개가 붙어 있지요. 그런데 연구자들에 따르면 얼굴 모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終宵默坐算歸程(종소묵좌산귀정) 말없이 밤새 앉아 돌아갈 길 헤아리니 曉月窺人入戶明(효월규인입호명) 새벽달이 문에 들어와 밝으니 날 엿보는가 忽有孤鴻天外過(홀유고홍천외과) 문득 외기러기 하늘 너머로 날아가니 來時應自漢陽城(내시응자한양성) 아마도 저 기러기 한양성으로부터 출발했으리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재상으로 꼽히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한시(漢詩) ‘야좌(夜坐)’입니다. 북청 유배지에서 밤새 잠들지 못하고, 묵묵히 앉아 돌아갈 수는 없는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헤아려 보는데, 새벽달이 자신을 엿보는 듯 창문으로 들어와 방안을 훤히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그때 문득 하늘에 나타난 겨울 외기러기가 하늘 저 멀리 날아갑니다. 그런데 저 외기러기는 아마도 한양성 쪽에서 왔지 않을까요? 그저 고향이 간절히 그리워질 뿐입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 때문에 백사나 필운 같은 호 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많이 알려졌지요. 하지만 이항복은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11월 13일 뉴스에는 “너무 편하고 따뜻해, 군대도 이제 ‘패딩’ 시대”라는 기사가 떴습니다. 국방부가 경기ㆍ강원 등 전방지역 국군 병사 12만4천 명에게 '패딩형 동계점퍼'를 지난 10월부터 보급하고 있다고 밝힌 것입니다. 웬만한 겨울 추위도 이젠 끄떡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패딩 같은 옷이 없던 옛날 우리 겨레는 겨울을 나기 위해 누비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누비옷이란 옷감의 날실 한 가닥을 일정한 간격으로 당겨 누빌 선을 표시하고 그 선을 따라 홈질로 누벼 빚은 옷을 말하지요. 누비는 솜의 유무, 누벼진 형태, 누비 간격 등에 따라 그 종류를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솜의 유무에 따라 솜을 넣는 ‘솜누비’와 솜을 쓰지 않고 옷감 두 겹만을 누비는 ‘겹누비’가 있으며, 바느질 방법에 따라 ‘홈질누비’와 ‘박음질 누비’로 나눌 수 있지요. 또 누비 간격에 따른 것으로는 누비간격이 0.5㎝에서 1㎝까지의 ‘잔누비(세누비)’, 2.5㎝ 안팎의 중누비, 5㎝ 안팎의 드문누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색실로 곡선과 직선을 자유롭게 표현하여 장식성을 강조한 ‘색실누비’가 있으며, 손누비와 달리 20세기 초에 재봉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를 보면 떡 가운데 인절미를 가장 오래전부터 먹어왔다고 하며, ‘인절미는 찰지면서 쫀득하여 떡의 으뜸으로 여긴다.’라고 나옵니다. 인절미는 “인절병(引切餠)”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있는데 차진떡이라 '잡아당겨 끊는다'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하지요. 그 종류로는 대추인절미, 깨인절미, 쑥인절미, 차조인절미, 동부인절미, 감인절미, 석이인절미 따위가 있습니다. 인절미로 가장 유명한 지방을 꼽으라면 당연히 황해도 연백인데 계산할 때에 숫자가 맞으면 “연안백천인절미”라고 소리친다고 하지요. 인절미의 이름에 관한 속설을 보면 조선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공산성으로 피란 갔을 때 지었다고 합니다. 임씨라는 농부가 찰떡을 해 임금께 바쳤는데 그 떡 맛이 좋고 처음 먹어 보는 것이어서 임금이 신하들에게 “절미로구나, 이 떡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임 서방이 절미한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 한 것이 “인절미”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인절미는 혼례 때 상에 올리거나 사돈댁에 이바지로 보내는 떡입니다. 찰기가 강한 찹쌀떡이기에 신랑신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