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장례식장에 가보면 분향실 입구에 많은 조화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조화의 리본에는 거의가 “삼가 故人의 冥福을 빕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더러는 “謹弔”라고 쓴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자로 써야 품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아직도 상가집 조화 리본은 ‘한글’이 아닌 어려운 한자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삼가 슬픔을 함께 합니다”라든지 “극락왕생하옵소서” 같은 한글 리본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특히 “슬픔을 함께 합니다” 같은 글귀는 한글날을 코앞에 두어서 인지 신선하기 조차합니다. 내일이면 제573돌 한글날이지요. 절대 군주였던 세종은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이야 한문에 능통했기에 새로운 글자를 만들 필요가 없던 분이었지요. 하지만 백성이 글자를 몰라 삶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고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새로운 글자를 만들기로 다짐합니다. 심각한 안질에 걸려 고생하고 온몸이 종합병동일 만큼 일생을 병고 속에 살면서도 오로지 훈민정음 만드는 일에 매달린 끝에 현대 언어학자들이 세상 으뜸 글자로 인정하는 훈민정음을 만들고 만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7월에 개봉된 영화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아닌 중 신미(信眉)가 창제했다고 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미가 아니라 세종 때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난계(蘭溪) 박연(朴堧)이 창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말이 얼마나 믿을만한 얘기일까요? 신미대사 창제설을 보면 1443년보다 8년 앞선 1435년 한글과 한자로 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신미대사가 펴냈다는 것을 근거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에 따르면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짜 책임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현대에 만든 위작이라는 것이지요. 또 박연의 책 《난계유고(蘭溪遺稿)》에 나오는 몇 가지 말을 들어 박연 창제설을 주장하는데 이 말들은 어문용어가 아니라 음악용어임을 모르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정인지 서문에는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처음으로 만드셨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 기록에는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아침 출강 가는 길에 본 엄청 큰 #해우소 !! / 그런데 자세히 보니 / 그 해憂소 아니고 / 이 해雨소~~ ㅋ / 공릉빗물펌프장 !! / 관공서 이름에도 위트가 묻어나는 나라 / 우리는 칸국의 대표 大칸民國 입니다.” 한 카카오스토리에 올라온 글입니다. 서울시 노원구가 지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공릉동빗물펌프장”에 붙인 “解雨所”란 글씨를 보고 올린 내용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올린 저 글에 아연실색 했습니다. 절간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 하는데 이를 빗대서 빗물을 해결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인가 봅니다. 그냥 “공릉동빗물펌프장”이라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이상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한자를 좋아하는 공무원들이 있나 봅니다. 우리나라 법 가운데는 <국어기본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법 제14조 제1호에 보면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공문서뿐만이 아니라 공공기관이 쓰는 모든 말에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공공기관인 노원구청은 이 법에 따라 쓸데없이 한자로 말을 만들고 한자를 쓰면 안 되는 것이지요. 제573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얼마 전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재미나다기 보다 좀 딱한 선간판(입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갓길에서 공사 중인지 곳곳에 세워둔 선간판에는 "길어깨 없음", “노견 없음”이라고 적혀있었지요. 길을 사람처럼 생각하여 ‘길’에 ‘어깨’를 붙이고, 길 로(路)에 어깨 견(肩)을 붙여놓았나 봅니다. 그런데 좀 더 가다보니 이번에 “갓길 없음”이라고 써놓았습니다. 도대체 같은 도로공사가 붙인 이름이 이렇게 다른 것은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런 두 가지 말 가운데 어떤 것이 맞는 말일까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갓길’을 찾아보면 “고속도로나 자동차 전용 도로 따위에서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폭 밖의 가장자리 길. 위급한 차량이 지나가거나 고장 난 차량을 임시로 세워 놓기 위한 길이다.”라고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노견(路肩)”을 찾아보니 “갓길의 비표준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길어깨’는 올림말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길에도 사람처럼 어깨가 있나요?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 말은 원래 영어 “road shoulder”를 가져다가 일본 사람들이 ‘길어깨’를 뜻하는 ‘路肩(노견, ろかた)’으로 바꿔 쓴 것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앞 줄임) 광복 두 시간 전 총독부 학무국 / 동인이 찾아간 사무실 안 침묵이 흐른다 / 아 아베 씨 좀 보소 / 그걸 만듭시다 / 시국에 공헌할 작가단을 꾸리자구요 / 아베, 머리 절레절레 흔든 뜻은 / 이런 쓰레기 같은 조선놈 /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아부하기에 바쁜 조선놈 / 어서 꺼졌으면 싶었겠지 / 그리고 두 시간 뒤 조선은 빛을 찾았다.” (뒤 줄임) 이 글은 소설가 김동인이 광복 두 시간 전 조선통독부에 찾아가서 한 행동을 표현한 것으로 이윤옥 시인이 쓴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김동인은 이광수류의 계몽적 교훈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는 소설가로 대표작 <광염 소나타>, <감자>, <배따라기>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는 히로히토 일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의 항복을 방송했습니다. 온 나라는 광복의 감격에 소리쳐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이 기쁜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일제의 영향으로 많은 조선 사람들이 입었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기차 안에서 조선 고등학생들의 대화를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가 엿듣고, 학생들을 잡아다가 심문했는데 이 학생들과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을 맡고 있는 정태진이 관련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 빌미로 일제 경찰은 정태진을 잡아다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짓자백을 하게 합니다. 이후 1942년 10월 1일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해 《조선어큰사전》을 펴내려 했던 장지영ㆍ최현배ㆍ이극로ㆍ한징ㆍ이윤재ㆍ정인승 등 핵심인물 11명이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후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고문을 당했고,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기소 당했지요. 이들 가운데 이윤재가 1943년 12월 8일, 한징이 1944년 2월 22일 옥중에서 죽었고,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재판소에서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정인승 징역 2년 등의 판결이 내려져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이 되자 풀려났습니다. 이 조선어학회사건의 배경에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더욱 극렬해진 일제의 식민통치가 있습니다. 1936년 12월에는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실시해 치안유지법 혐의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추강(秋江)이 적막어룡냉(寂寞魚龍冷)허니 인재서풍중선루(人在西風仲宣樓)를 매화만국청모적(梅花萬國聽募笛)이요 도죽잔년수백구(桃竹殘年隨白鷗)를 오만낙조의함한(烏蠻落照倚檻恨)은 직북병진하일휴(直北兵塵何日休)오 위 가사는 서도소리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서도시창(西道詩唱) ‘관산융마(關山戎馬)’의 부분입니다. 지난 9월 4일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코우스)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의 ‘관산융마’ 공연이 펼쳐져 청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날 공연에서 특히 유지숙 명창이 소리하고 최경만 명인이 피리 연주를 주고받아 마치 “관산융마는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듯 그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창(詩唱)은 시를 창으로 부른다는 뜻으로 서도시창에는 ‘관산융마’가 유일합니다. ‘관산융마’는 동정호 악양루에 오른 당나라 시인 두보를 상상하며 두보의 입장에서 전란에 휩싸인 나라의 불행과 두보의 불우한 처지, 그리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영조 때의 문인 신광수(申光洙)의 시를 소리하는 것이지요. 이 시는 1750년 무렵 평양 기생 모란에 의해 곡이 붙여져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해마다 광주에서는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주최로 그 어느 곳에서도 생각 못 한 친일ㆍ항일음악회를 열고 있습니다. 올해는 광주광역시 남구가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가 주관하는 8월 15일, “일 역사왜곡ㆍ경제보복” 항일 음악회로 열렸습니다. 이 음악회는 지난 1910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의 치욕적인 역사를 기억하고,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날에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만행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90여 분간 진행된 이 음악회에서는 우리가 익숙하게 불러왔던 동요와 대중가요, 가곡 가운데 친일 음악인이 만든 노래의 실태를 확인한 것은 물론 민족정신을 실천한 음악가들이 만든 노래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일음악회에서 확인되는 단골 노래는 일제에 부역한 정황이 알려진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조두남의 ‘선구자’, 홍난파의 ‘희망의 아침’, 현제명의 ‘희망의 나라로’ 등입니다. 나라 행사 때마다 모두 함께 부르는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가 일제에 부역한 것은 물론 친나치 행적도 있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말기 즈음 청나라는 양무운동(1861~1894), 일본은 명치유신(1853~1877)을 펼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동안 조선은 무엇을 했을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이때 문을 꽁꽁 닫아놓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탓에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나름 고종 때 청나라에는 ‘영선사(領選使)’를 보내고, 일본에는 수신사(修信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보내는 등 노력을 한 흔적은 있습니다. 사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 친정체제가 되자 고종과 온건개화파의 관심은 신무기를 비롯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있었지요. 1879년(고종 16) 8월 영중추부사 이유원이 청나라로 가는 사신 편에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신식 무기의 학습 내지 수입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이에 무기제조법을 배우고 군사훈련도 가능하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고종이 유학생 파견을 서두르자 일부 대신들이 "도리어 오랑캐를 불러들이는 매개가 된다."는 반대상소를 올렸으며, 일본도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청ㆍ일 사이에 중립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썼으며, 참정ㆍ외무대신을 지낸 민영환ㆍ원임의정대신 조병세ㆍ 이조참판을 지낸 홍만식 등은 자결했지요. 이렇게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 청년장교 신규식(申圭植, 1879.1.13. ~ 1922.9.25)은 지방군대와 연계, 대일(對日)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신 신규식은 계동ㆍ가회동ㆍ운니동 등의 솟을 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 듯 소리 질렀습니다.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 그러나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었고 이에 음독자살을 하려했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때의 독약 후유증으로 애꾸가 되었는데 거울을 들여다 본 신규식은 냉소를 지으며, “애꾸, 그렇다. 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청년 신규식은 흘겨볼 예(睨)자, 볼 관(觀)자, ‘예관(睨觀)’으로 호를 지어 죽을 때까지 사용했습니다.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