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지난해 2월 윤정열(64, 서울) 씨로부터 기증받은 언양 현감 '윤병관(尹秉寬 1848∼1903) 만인산(萬人傘)'이 보존처리와 함께 복원됐다. 울산박물관은 언양 현감 '윤병관(尹秉寬, 1848∼1903) 만인산(萬人傘)'을 기증받아 정교한 보존처리를 마치고 울산박물관 역사관에 전시 중이며 전문가의 자문과 옛 문서 그리고 유사시대 만인산을 참고하여 자루, 살대, 꼭지 부분을 새로 제작해 완벽한 만인산의 형태를 갖춘 복원품 1점을 제작했다. 울산박물관에 기증된 만인산은 윤정열 씨의 고조부 윤병관(尹秉寬)이 1887년 언양 현감을 지낼 때 지역민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윤병관(尹秉寬, 1848∼1903)은 파평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이며, 호는 우재(愚齋)고 1872년(同治 11년) 무과 급제로 관직을 시작하여 통정언양현감(通政彦陽縣監)과 종성진도호부사(鍾城鎭都護府使) 등을 지냈다. 만인산은 조선 후기 고을 사람들이 지방 관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 지방 사람들의 이름을 수놓아 선물한 양산을 말한다. 만인의 이름을 수놓은 일산(日傘)이라는 뜻으로 ‘수산(繡傘)’이라 하며 수놓아진 고을 사람들의 이름 수에 따라 '천인산', 또는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삼기)는 함안 성산산성 17차 발굴조사(2014~2016년)에서 출토된 23점의 목간(木簡)에 대한 보존처리를 마치고 그 내용을 공개한다. * 목간(木簡):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다듬어진 나무 조각에 글자를 쓴 것 * 함안 성산산성(사적 제67호)에서 1991년부터 2016년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하여, 총 308점의 목간이 출토됨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은 신라의 지방 지배체제와 조세체계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며, 17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간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4면에 모두 글자가 쓰여 있는 사면목간 1점이다. 이 목간은 소나무를 폭이 좁은 사각형(細長方形)으로 깎아 만든 것으로, 길이 34.4㎝, 두께 1.0~1.8㎝에 모두 56글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진내멸(眞乃滅) 지방의 촌주(村主)가 중앙(경주) 출신 관리에게 올린 보고서 형식으로, 잘못된 법 집행에 대해 그 잘못을 두려워하며 이를 상부에 보고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목간의 중심시기인 6세기 중반 무렵 신라 지방사회까지 문서행정이 구체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6세기
[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2017년 새해가 시작됐다. 이맘때면 금연이나 살빼기 같은 다짐이나 결심을 하게 마련이다. 또 오랜 것은 버리고 새 것은 받아들이는 송구영신의 일환으로 온 집안 대청소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기도 한다. 대청소에 나선 김에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인터넷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싹 청소해 보는 건 어떨까. 어느 누구나 개인정보의 노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 특히 노출 범위에 비교적 제한이 없는 구글에서 자신의 개인정보를 검색해보면 깜짝 놀랄만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혹시나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검색해보고 노출이 된다면 반드시 삭제할 것을 권한다. 인터넷에 흩어진 개인정보는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행정자치부의 가이드에 근거해 개인정보 삭제 방법을 알아본다. 온라인상에서 떠도는 내 정보 정리하기 커뮤니티나 카페 같은 누리집에서 내 개인정보를 지웠는데도 검색엔진에는 그대로 검색되어 노출되기도 한다. 검색엔진이 지워지기 이전의 누리집 정보를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캐시페이지라고 하는데, 이 페이지의 새로바꿈은 별도로 삭제 요청을 하지 않는 경우 수개월 넘게 노출될 수 있다. 따라서 검색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최맹식)는 일제강점기 조선고적조사의 예비조사 성격으로 시행된 1909년도 조사 내용을 정리한 《1909년 조선고적조사(朝鮮古蹟調査)의 기억》과 북한에서 정기적으로 간행된 고고학 관련 학술 잡지를 집성한 《북한 정기간행물 고고학 문헌 목록》을 발간하였다. 《1909년 조선소적조사(朝鮮古蹟調査)의 기억》은 1909년 당시 일본 도쿄대 교수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조수인 야쓰이세이이쓰(谷井濟一), 구리야마준이치(栗山俊一)로 구성된 세키노 조사단 3인이 주도해 9월부터 12월까지 실시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실상 최초의 전국적인 조사 내용을 담은 책이다. 특히,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이 책을 기획한 영남대학교 정인성 교수는 자신이 소장한 야쓰이세이이쓰가 남긴 편지, 엽서, 조사수첩, 1909년 촬영 사진 145장 등 지금껏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하여 책에 실었으며, 야쓰이가 남긴 사진목록집과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乾板) 자료를 비교해 1909년 조사 여정을 최대한 복원하여 의미를 더했다. 또한, 책자에는 세키노 조사단 세 사람이 1909년 11월 23일 서울 종로 광통관에서
[우리문화신문=김명호 시인] 우 베인 다리에서 1 하늘도 땅도 아닌 중간의 지점에서 너에게 길이 되고 나에게 다리 되어 이승과 저승을 이어 영원토록 가고저
[우리문화신문= 도쿄 이윤옥기자] 성곡사(星谷寺, 쇼코쿠지)로 가기 위해 도쿄에서 특급으로 한 시간여 달려가 내린 자마역(座間驛)은 한적한 소도시 역이었다. 역에서 내려 길을 묻고자해도 지나는 행인이 하나도 없는 조용한 곳에 성곡사는 자리했다. 판동33소관음순례 제8번(坂東33所觀音巡禮第八番) 도량인 성곡사는 일본 최초로 대승정의 칭호를 받은 백제계 출신 행기(行基, 668~742)스님이 개산(開山)한 절이다. 행기스님은 백제왕의 후손으로 《겐코샤쿠쇼(元亨釋書)》에는 행기스님을 백제국왕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釋行基世姓高志氏。泉大鳥郡人。百濟國王之胤也。) 행기스님은 열다섯 살에 출가하여 나라 야쿠시지(奈良 藥師寺)에서 신라승 혜기(慧基)와 백제계 의연(義淵)스님에게서 불도를 닦았으며 스물네 살에 덕광법사(德光法師)에게 구족계를 받고 덴표 17년(745)에 대승정 자리에 오른 일본의 고승이다. (초대승정은 고구려 혜관스님이고 행기스님은 이후 대승정으로 활약). 이후 민중 속에서 불교의 보살행을 실천하다 81살의 나이로 스가와라지(菅原寺)에서 입적한다. 나라시대 뛰어난 고승들이 많았지만 행기스님만큼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산 승려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 이는 1924년 오늘(1월 5일)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사는 황거 앞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김지섭 의사가 황거를 향해 수류탄 3개를 던진 날입니다. 당시 수류탄의 불발로 거사는 실패했지만 황거를 폭파하려는 조선 청년의 행동에 일제는 놀라워했고 바로 코앞의 경시청 경찰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가까운 곳의 사쿠라다몽(櫻田門, 고려문) 곧 황거로 들어가는 문에서는 1931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투척이 있었지요. 김 의사는 현장에서 붙잡혀 재판을 받았는데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음 아니면 무죄를 주장했기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라며 변호사의 상고를 말릴 정도로 당당했습니다. 그 뒤 복역 중 김지섭 의사는 1928년 2월 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 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한국인들도 일왕이 사는 황거를 관광하러 갑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이중교와 사쿠라다몽 앞에서 우리의 영웅 김지섭과 이봉창 두 의사를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신문은 지난달 26일 경향신문이 “SEOUL CHRISTMAS –Festival 2016-”라고 영어로 커다랗게 쓴 광고를 낸 것에 쓴 소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또 다시 경향신문이 아예 전면에 영어광고를 해 얼굴을 찌푸리게 합니다. 맨 위에 커다란 글씨로 “RENOIR”라고 쓰고 아래로는 “IMAGES OF WOMEN”이라고 달았습니다. 물론 그 옆으로 “르누아루의 여인”이라는 한글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구색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호에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는 것을 생각 있는 언론기관이라면 지키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요? 제발 영어를 커다랗게 쓰는 것이 품격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버렸으면 합니다. 일제강점기 서정주, 김동리 같은 문인들이 일본에서 천민마을을 얘기하는 일본말 “부락(部落)”을 들여다 동인지 이름 “시인부락”이라고 쓰는 바람에 지금도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부락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인들의 행위가 우리말글을 파괴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상류동굴군(웃산전굴, 북오름굴, 대림굴)’을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52호로 지정하였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상류동굴군은 제주시 구좌읍 덕천리 일대에 발달한 웃산전굴, 북오름굴, 대림굴을 일컬으며, 제주 세계자연유산지구의 완충지역이자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연장선상에 자리하고 있는데, 웅장한 규모와 다양한 동굴생성물, 동굴생태계가 유지되고 있어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매우 높다. 상류동굴군은 전반적으로 북동-남서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는데 그 길이는 웃산전굴이 약 2,385m, 북오름굴이 약 221m, 대림굴이 약 173m에 달한다. 이 동굴들 안에는 용암교, 용암선반, 동굴산호 같은 여러 종류의 동굴생성물이 보존되어 있고, 한국농발거미, 제주굴아기거미 등 다양한 동굴생물도 서식하고 있다. * 용암교: 용암동굴의 지붕이나 바닥이 붕괴하여 일부가 다리 모양으로 남아있는 것 * 용암선반: 흐르던 용암이 동굴의 벽을 따라 달라붙어 길게 돌출되어 선반모양으로 발달된 것 웃산전굴은 거문오름에서부터 흘러나온 용암으로 인해 만들어진 벵뒤굴과 북오름굴 사이에서 발견됐는데,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놀이인 「씨름」을 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하였다.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맞잡고 힘과 기술을 이용해 상대를 넘어뜨려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서, 한민족 특유의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어 온 민속놀이이다. 「씨름」은 ▲ 한국을 대표하는 세시풍속 놀이로서, 다양한 놀이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온 국민에 의해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는 점, ▲ 고대 삼국 시대부터 근대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유물, 문헌, 회화 등에서 명확한 역사성이 확인된다는 점, ▲ 씨름판의 구성과 기술 방식 등에서 우리나라만의 고유성과 표현미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점, ▲ 한국 전통놀이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연구대상이라는 점 등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씨름」은 한반도 전역에 바탕을 두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공유ㆍ전승되었다는 점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제129호 ‘아리랑’이나 제130호 ‘제다(製茶)’와 마찬가지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