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이 노래는 누구나 읊조려봤음 직한 가곡 “선구자”(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일송정”은 어디에 있으며, 푸른솔도 그 곁에 있을까요? 그 내용이 중국 연변의 작가 류원무 선생이 쓰신 ≪연변취담≫이란 책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가 연길인데 이 연길에서 용정이란 도시로 가다 보면 두만강 물줄기의 하나인 해란강 기슭에 비암산이 있습니다. 70여 년 전에만 해도 이 비암산 고갯마루 10여 m 깎아지른 벼랑 끝에 두 아름도 넘는 소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소나무의 모습이 마치 돌기둥에 푸른 청기와를 얹은 정자처럼 보여서 “일송정(一松亭)”이라고 불렀다지요. 그리고 그 일송정은 용주사 절에서 보면 꼭 바위 위에 버티고 앉은 호랑이 같아서 사람들은 신령한 나무라고 우러렀습니다. 그리고 가뭄이 들면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고, 아들
1852. 책을 찢어서 외우는 버릇이 있던 김수온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입니다. 그는 육경(六經, 역경·서경·시경·춘추·예기·악기)과 제자 백사(諸子百史, 춘추전국시대 다양한 학자의 이야기)에 능통하였다고 합니다. 또 그는 집현전 출신 학자이며, 신동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책을 찢어서 외우는 버릇이 있었지요. 책을 한 장씩 찢어 옷소매에 넣고는 오가며 외우니, 다 외우면 책도 다 찢어지는 셈입니다. 한번은 신숙주가 귀한 책을 김수온에게 빌려줬다가 하도 안 가져오기에 가 보았더니 벽에도 천장에도 책의 낱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연기에 그을려 분별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신숙주가 무슨 까닭인지 묻자 “내가 누워서 외느라 그랬소.”라고 했다지요. 요즘과 달리 조선시대 신동의 조건은 우선 잘 외는 것이었기에 김수온 같은 기벽도 생길 수 있겠지요. 참고 : ≪용재총화≫, 성현, 민족문화추진회, 도서출판 솔
1851. 태사혜는 조선시대 신었던 갖신 조선시대에는 어떤 신을 신었을까요? 백성과 검소한 선비는 짚신을 주로 신었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은 보통 가죽으로 만든 갖신을 신었습니다. 갖신은 우선 그 형태에 따라 발목이 보이는 이(履)와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화(靴)로 나뉩니다. 특히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든 고급 신인 혜(鞋)가 대표적이었지요. 혜(鞋)는 무늬에 따라 코와 뒤축 부분에 흰 줄무늬를 새긴 태사혜(太史鞋)가 있는데 이는 남자신이지요. 그리고 여자신으로는 앞코에 구름무늬를 놓은 운혜(雲鞋), 코와 뒤꿈치에 당초 무늬를 넣은 당혜(唐鞋)가 있으며, 검정빛 융으로 만든 승려 신발 흑혜(黑鞋) 등이 있습니다. 한편, 사슴 가죽으로 만든 녹피혜(鹿皮鞋)와 궁중용 신인 궁혜(宮鞋)도 있었는데, 마른 땅에서는 태사혜, 흑혜, 운혜, 당혜 등을 신었고, 진땅에서는 물이 스며들지 않게 들기름에 절은 가죽으로 만든 진신을 신었지요. 지금 한복에 많이 신는 고무신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것으로 전통은 아닙니다. 요즘 태사혜에 뒷굽을 붙여 만든 갖신이 나오는데 한복에 신으면 좋을 일입니다.
1850. 어제는 불 때는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망종 “엄마는 아침부터 밭에서 살고 / 아빠는 저녁까지 논에서 살고 / 아기는 저물도록 나가서 놀고 / 오뉴월 긴긴 해에 집이 비어서 / 더부살이 제비가 집을 봐주네” 이 동시는 이문구의 '오뉴월'입니다. 어제는 24절기의 아홉 번째인 망종(芒種)인데 이 즈음의 농촌 풍경을 잘 소개합니다. 망종이란 벼, 보리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씨앗을 뿌려야 할 적당한 때라는 뜻입니다. 곧 이 시기는 모내기와 보리 베기에 알맞은 때지요.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망종까지 보리를 모두 베어야 논에 벼도 심고 밭갈이도 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또 망종을 넘기면 보리가 바람에 쓰러지는 수가 많으니 이를 경계하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 “햇보리를 먹게 될 수 있다는 망종”이라는 말도 있지요. 모내기와 보리 베기가 겹치는 이 무렵에는 보리농사가 많은 남쪽일수록 더욱 바쁩니다. 그래서 이때는 “발등에 오줌 싼다.”라고 할 만큼 한 해 가운데 가장 바쁜 시기입니다. 또 망종 때는 농사일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져 일을 멈추는 것을 잊는다고 '망
1849. 양천 나루 앞 한강 투금탄에 황금 던진 형제 양천구 가양동엔 양천나루(다른 얘기엔 공암나루)가 있었는데 그 양천나루 근처 여울을 예전엔 “투금탄(投金灘)”이라 불렀습니다. 그 까닭이 ≪성산이씨가승(星山李氏家乘)≫이란 책에 적혀 있습니다. 시조로 많이 알려진 고려말 이조년과 이억년 형제가 길을 가다 우연히 금덩이를 발견했습니다. 이를 나눠 가지고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문득 금덩이를 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형이 깜짝 놀라서 왜 버렸느냐고 물으니 아우가 “제가 어찌 황금 귀한 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우애가 두터웠던 우리 형제가 아닙니까? 한데 황금을 주어 가지니까 ‘만약 형이 없었더라면 내가 황금 두 덩이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나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황금이 소중한 우리 우애를 금이 가게 했다고 생각해서 물에 던져버린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형도 같이 황금을 물에 던졌다고 하지요.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요즘 이 이야기는 참으로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848. 격구, 고려말 조선초 임금들이 즐겼다 “내가 무관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을 타고 물가에서 자며 말을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오래 들어앉아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격구 놀이를 하여 기운과 몸을 기르는 것이다.” 위는 정종실록 1399년 3월 13일 자 기록으로 조선의 제2대 임금 정종이 격구를 즐기는 까닭을 설명한 것입니다. 격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막대기로 공을 쳐서 상대방 문에 넣는 경기지요. 그런데 말을 타고 하는 기마격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종 때에는 넓은 마당 여기저기에 구멍을 파놓고 걸어다니면서 구멍에 공을 쳐서 집어넣는 경기인 보행격구도 있었습니다. 이 보행격구는 요즘의 골프와 비슷한 경기입니다. 이 격구는 정종 이후 태종, 세종, 세조 임금이 모두 좋아했지만, 신하들이 놀이로서의 격구를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가자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채택하고, 임금이 직접 격구를 하는 대신 군사들이 격구를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지을 무렵에는 격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지요.
1847. 옛 여인의 아름다움을 지켜주던 경대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식욕·성욕과 더불어 사람의 3대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몸 특히 얼굴의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이게 하고, 못한 부분은 감추려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 모두의 마음일 것입니다. 고려 태조 때는 화장을 장려하고 화장법을 가르쳤다고 하지요. 머리에는 동백기름을 윤기 있게 바르고, 눈썹은 먹으로 초승달처럼 가늘게 그리며, 뺨은 복숭앗빛으로 입술을 앵두빛으로 연지를 칠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얼굴은 하얗게 보이도록 분백분을 짙게 발라 피부가 창백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그런 여성들의 마음에 거울은 필수품입니다. 옛날엔 그 거울을 달아 세운 화장대가 있었으니 바로 경대입니다. 경대(鏡臺)는 거울과 거울을 지탱하는 지지대에 서랍을 갖추어서 화장도구 등을 넣을 수 있게 만든 것과, 거울에 틀만 붙여서 만든 것이 있지요. 옛날에는 여자가 결혼할 때 해가는 주요 혼수품이었습니다. 경대의 재료는 느티나무와 오래된 감나무이고, 원앙·십장생·쌍학 등을 새겼지요. 이제 예전의 경대를 쓰는 사람은 없겠지만 운치만이라도 한번 느껴보면 어떨까요?
1846. 경주 쪽샘유적에서 나온 토우를 보셨나요? 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토우(土偶)를 아십니까? 토우는 사람이나 동물 모양은 물론 생활용구 ·집 등을 본떠 만든 것을 아울러 일컫기도 합니다. 고대에 토우가 만들어졌던 목적은 처음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시작했지만 후에는 무덤 안에 바쳐진 죽은 자의 껴묻거리[부장품, 副葬品]로도 만들어졌지요. 사람을 껴묻거리로 하던 비정한 세상에서 토우를 사람 대신 묻는 세상으로 변한 것입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7년에 시작한 경주 황오동 쪽샘유적 발굴조사에서는 그릇 뚜껑 위에 붙여진 토우가 현재까지 모두 14점 발견되었으며, 이 중 12점이 거두어져 복원, 정리 중이지요. 출토된 토우는 크게 사람모양과 동물모양으로 나누어집니다. 사람모양 토우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 신라금으로 짐작되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성기가 강조된 남자, 출산 중인 여자가 있고, 동물모양 토우로는 뱀, 자라, 새 등이 있습니다. 토우의 크기는 대략 5㎝ 정도인데 앞으로 유물이 모두 정리되면 더 많은 토우가 확인될 것으로 보입니다.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html?id=9296
1844. 추사 김정희를 만든 붓 천 자루와 벼루 열 개 붓글씨에 관한 한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추사 김정희. 천하의 명필이 되기까지 그가 낯선 유배지에서 쓰라리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담금질하면서 부단한 노력을 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날 때에도 붓을 들었고, 외로울 때도 붓을 들었으며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북받칠 때도 붓을 들었다지요.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 반가운 편지와 소식이 올 때에는 자다가도 일어나 붓을 들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친구 김유근이 자신의 벼루에 추사의 글씨를 새기겠다고 글씨를 부탁하자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글씨체를 연습했다지요. 또 후배 윤정현이 붓이름(호)를 써달라고 하자 윤정현이란 인물에 걸맞는 글씨체를 찾으려고 고민하다 무려 30년 만에 글씨를 써주었을 정도로 자신의 글씨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공부 과정에서 중국의 비석 글씨 309개를 베끼고 베끼면서 고전과 글씨를 익혔고 일흔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벼루 열 개를 갈아 치우고, 붓 천 자루를 닳도록 썼다고 하지요. 명필이란 칭호는 그냥 얻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
1843.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살려주세요 한반도에 선사시대 벽화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는 육지와 바다를 생활배경으로 삼은 다양한 사람과 동물 그림 300개가량이 큰 바위 면에 한꺼번에 그려져 있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드문 유적입니다. 특히 작살을 맞거나, 새끼와 함께 있는 고래 등 50점이 넘는 많은 고래 그림은 선사시대 고래잡이 역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지난 1971년 처음 발견된 이래 학계와 국민의 큰 관심 속에 세계적인 문화유산임이 확인됐는데도 불구하고 문화재청은 20년이 넘도록 내버려두다 1995년에야 뒤늦게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국보 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고 전해져 온 선조의 유물이 댐 건설에 의한 수몰로 불과 40년 만에 깎여내리고 뒤틀리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재청이 모든 비용을 지원하겠다며 '반구대 암각화' 보존을 위한 유일한 방안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울산시는 과학적인 검증 결과, 물은 부족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와있는데도 2025년 물 부족을 내세워 문화재청 요구를 거부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