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1. 양식이 떨어진 백성, 새벽에 부잣집 문 앞을 쓸었다 우리 겨레는 더불어 사는 일에 익숙했습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예부터 가난한 사람이 양식이 떨어지면 새벽에 부잣집 문앞을 말끔히 쓸었습니다. 그러면 그 집 안주인이 아침에 일어나서 이를 보고 하인에게 “뉘 집 빗질 자국인가?”하고 물었답니다. 그런 다음 말없이 양식으로 쓸 쌀이나 보리를 하인을 시켜서 전해줬다고 하지요. 그런가 하면 보릿고개에 양식이 떨어진 집의 아낙들은 산나물을 뜯어다가 잘 사는 집의 마당에 무작정 부려놓습니다. 그러면 그 부잣집 안주인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곡식이나 소금·된장 따위를 이들에게 주었답니다. 물론 부잣집에서 마당을 쓸라고 한 적도 없고, 산나물을 캐오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쌀이나 보리를 건네주는 것은 마당을 쓸거나 나물을 캐온 데 대한 보수나 대가가 아니라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돌 볼줄 아는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부자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듯 가을에 곡식을 거둬들이면 “농곡(農穀)”이라는 곡식을 따로 비축해 놓았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겨레는 까치밥, 고수레, 입춘공덕행, 담치기, 이레놀음 등 이웃과 더불어 사
1780. 그대 사쿠라다몽에 가거든 꼭 이봉창을 기억하라! 오늘은 3.1절 곧 기미독립운동 91돌입니다. 이날은 온 나라에서 만세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났지요. 하지만, 이후 목숨을 걸고 독립쟁취에 나선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광수같이 변절한 이들도 많습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많이 변절의 길을 걸었지요. 이런 인물들을 수십 년간 철저히 조사하여 지난해 11월 8일 나라도 하지 못한 "친일인명사전"을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냈습니다. 장한 일이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려야 할 사람 중에는 이봉창 의사와 김지섭 의사도 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1931년 1월 8일 일황이 사는 황거로 들어가는 사쿠라다몽이란 문 앞에서 일황의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으며 그에 앞서 김지섭 의사는 1923년 12월 20일 역시 황거로 들어가는 니주바시(이중교)에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불행히도 불발이었으나 식민지를 총 지휘한 일황과 그가 사는 황궁을 응징하고자 하는 투철한 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이 침체기를 맞이할 무렵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곧바로 상하이 훙커우공원의 윤봉길 의사 의거로 이어졌고, 중
1779. 복토 훔치기, 용알 뜨기 등 정월대보름 풍속들 오늘은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대보름엔 초저녁 뒷동산에 올라가서 달맞이를 하는데, 떠오르는 달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한해 농사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또 달집태우기도 대보름날 밤에 하는데, 짚이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 위에 쌓아 놓은 다음 소원을 쓴 종이를 매달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릅니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더불어 달맞이를 하고, 쥐불놀이와 더불어 이웃마을과 횃불싸움을 하기도 하지요. 그밖에 정월대보름에는 재미있는 풍속들이 있습니다. 특히 “복토 훔치기”란 풍속은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의 부뚜막에 발라 복을 비손합니다. 또 “용알 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어오면 그해 운이 좋다고 믿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곡식 안내기”는 경남지방의 풍속으로 농가에서는 새해에 자기 집 곡식을 팔거나 빌려주지 않는데 이는 이때 곡식을 내게 되면 자기 재산이 남에게 가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지요. 그리고 볏가릿대 세우기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 기장, 피, 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1778. 고구려 사람들이 입은 폭이 넓은 바지, 대구고 한복의 중심은 저고리와 바지에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옷은 상고시대부터 현대에까지 변치 않고 이어졌는데 우리 겨레 의생활의 큰 특징입니다. 한국 상고시대의 옷 중 고(袴) 곧 바지는 남녀가 모두 입었으며, 여성은 고 위에 치마를 입었는데, 치마만 입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고는 본디 추운 지방에서 추위를 막으려고 입기 시작하였으며, 후에는 그것이 말타기에 편하였으므로 유목민족에게 널리 퍼졌지요. 한복 아랫도리의 통칭인 바지라는 말은 조선 전기에 나타난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북한 용강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인 쌍영총(雙楹塚) 주실(主室) 동벽에는 점무늬가 있는 통이 넓은 바지, ‘대구고(大口袴)’를 입은 남자들의 그림이 있고, 대구고와 함께 소매폭이 넓은 ‘대수삼(大袖衫)’을 입었습니다. 여기서 “대구고”란 “입이 넓은 바지”란 뜻으로 재미있습니다. 또 대수삼은 소매 “수(袖)”, 적삼(저고리) “삼(衫)”을 쓴 것으로 큰 소매를 가진 저고리란 뜻이 됩니다. 용맹하던 고구려인들이 뜻밖에 폭이나 소매가 넓은 옷을 입었는데 그로 미루어 보면 통이 큰 옷이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1777. 백범 김구, 창작판소리로 다시 태어나다 “너 이놈 왜놈은 말 듣거라! / 만국 공법이니 국제 공법 그 어디에 / 국가 간의 통상 화친 조약을 체결한 후 / 그 나라 국모를 시해하라는 조항이 있더냐 / 야 이 짐승만도 못한 왜놈아!!” 백범 김구 선생이 왜놈 장교를 응징하면서 호통치는 말입니다. 이는 어제(2월 24일) 백범기념관 컨벤션센터에서 (재)김구재단(이사장 김호연) 주최,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현) 주관으로 열린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 시연회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61돌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선생은 창작판소리 를 통해 이날 새로 태어나신 겁니다. 이날 공연은 모두 3부로 나눠 제1부 “청년역정”은 왕기석 명창이, 제2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왕기철 명창이 제3부 “해방시대”는 80년대 암울한 상황에서 “똥바다” 등 창작판소리를 불러 유명해진 임진택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 예술총감독이 소리를 했습니다. 이날 자리를 메운 300여 명의 청중은 시종 추임새를 넣어가며 즐겼습니다. 청중은 소리꾼이 “미 군정사령관 하지를 놓고 ‘하지 하지 해놓고도 암 것도 하지 않은 것이 하지여
1775. 세계문화유산 등재 코앞인 서울성곽 위 불법건축 안돼 문화재청은 지난 2월 10일 문화재위원회(사적분과위원회)를 열고 국방부가 제출한 ‘장병생활관 설계 수정안’을 조건부 가결했습니다. 조건부란 3년간 한시적으로 사용하되 3년 뒤에는 서울성곽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의 사정을 고려해 장병생활관을 철거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 3일 국방부 수방사는 현장설명회에서 “기존의 높이에서 1개 층을 낮추고 옥상의 난간을 없애며 지붕의 색깔을 성벽의 색깔과 비슷한 연회색으로 칠할 예정이다. 또 서울성곽 부근에 있는 군 초소 4개와 철조망을 제거하겠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서울성곽은 1396년(태조 5) 백악(白嶽)·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王山)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것으로 둘레는 약 17km, 면적은 59만 6,812㎡이며,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지요. 이 서울성곽은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하여 지난 2006년 18.2km인 서울도성을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그 복원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이를 위하여 서울시는 지난해 2월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하였고, 우선 돈의문과 주변성곽을 94
1774. 온양 사는 맹고불이 제 소 타고 제 집 간다 경복궁 동문에서 삼청동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정독도서관 가는 길은 예전에 고갯길이 있었는데, 고개 이름이 '맹현(孟峴)'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곳에 조선 세종 때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맹사성은 아랫사람에게는 자상하면서 엄하지 않았고 예의와 체면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또 집에 사람이 찾아오면 반드시 관복을 입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안으로 들어왔다고 하지요. 그 맹사성에 관한 일화는 참 많습니다. 맹사성은 세종 13년(1431년), 좌의정이면서 국사편찬위원장 격으로 ≪태종실록≫의 편찬을 마치고 아버지의 묘에 성묘하러 서울을 떠납니다. 그때 지금의 안성 쪽에 있는 양성 고을 현감과 평택의 진위 현감이 맹정승의 고향나들이 소식을 듣고는, 잘 보이려고 온양 가는 길목인 장호원 근처 연못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두 현감이 맹사성을 기다리다 서로 권커니 자커니 술을 마셔 꽤나 취한 상태가 되었을 때 어느 늙은이가 검은 소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갑니다. 양성현감이 큰소리로 “감히 뉘 앞이라고 늙은이가 검
1773. 오늘은 우수, 올제는 정월 초이렛날 오늘은 24절기 중 두 번째 봄 절기 우수입니다. 우수날에 비 오면 까끄라기 있는 곡식들, 밀과 보리는 대풍을 이룬다 했지요. 보리밭 끝 저 산너머에는 마파람(남풍:南風)이 향긋한 봄내음을 안고 달려오고 있을까요? 동네 아이들은 양지쪽에 앉아 햇볕을 쬐며, 목을 빼고 봄을 기다립니다.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계절 인사로 "꽃샘잎샘 추위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것도 있지요. 또 봄을 시샘하여 아양을 떤다는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꽃샘추위라는 토박이말보다 정감이 가지 않는 말입니다. 우수에는 이름에 걸맞게 봄비가 내리곤 합니다. 어쩌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은 봄비와 함께 꿈을 가지고 오는지도 모르지요. 그 봄비가 겨우내 얼었던 얼음장을 녹이고, 새봄을 단장하는 예술가인 것입니다. 기상청의 통계를 보면 지난 60년간 우수에는 봄비가 내려 싹이 튼다는 날답게 무려 47번이나 비가 왔다고 하니 이름을 잘 지은 것인지, 아니면 하늘이 일부러 이날 비를 주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올제(내일)은 정월 초이렛날로 우리 겨레는 이날 ‘이레놀음’을
1772. 제주도의 “뜽돌”은 무엇일까요? 제주도 마을 어귀에 “뜽돌”이 놓여 있습니다. 뜽돌은 마을 젊은이들이 힘을 겨루기 위해 들어 올리는 돌입니다. 한 마을 젊은이들 가운데 누가 힘이 더 센가는 이 뜽돌로써 가름 됩니다. 겨울철 일거리가 없을 때 젊은이들은 뜽돌이 있는 뜽돌거리에 모여 제작기 힘자랑을 하지요. 때로는 다른 마을 젊은이가 와서 이 마을의 뜽돌을 보아 큰 것이면 “과연 이 마을 젊은이들은 힘이 세구나!”라며 감탄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면 “이것도 뜽돌이냐?"라면서 그 돌을 멀리 던져 버립니다. 그러면 뜽돌이 있던 마을 젊은이들은 크게 망신당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마을 젊은이들은 마을 앞을 지나가거나 마을을 방문한 젊은이가 있으면 뜽돌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그때 뜽돌을 들지 못하면 얻어맞는 것은 물론이고, “콥이야, 발이야” 빌며(손톱과 발톱을 모아서 비는 행위), 술을 사서 대접한 뒤에야 겨우 빠져나옵니다. 이 뜽돌은 마을 젊은이들의 몸을 단련시켜 일을 잘하게 하는 것과 함께 마을의 힘
1771. 금(金)을 일컫는 말 “노다지”는 어디서 왔을까요?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 노다지 파려거든 / 요 내 배알[아랫배]에서 팔 것이지 /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 문전옥답 처넣더니 / 요 내 배알까지 처넣는구나.” 위 노래는 전라도의 입니다. 나라가 무너져가는 대한제국 말기에는 외국인들이 몰려들어 우리나라 곳곳에서 금을 캐가려 안달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곳인 청천강 상류 운산은 미국인 모로스가 차지하고, 은산 금광은 영국이 모르겐에게, 수안 금광은 일본인 야마구치를 통해서 영·미·일 합자회사로, 당고개의 금광은 독일인 월터에게, 직산 금광은 일본인 시부사와에게, 정선의 천포광산은 도쿄의 쇼와(昭和)공업에게, 동광은 청나라 사람 강진황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거의 헐값으로 금을 노략질해 갔는데 금을 실어가는 상자에는 “노 텃치(No Touch)"라고 붉은 글씨를 써놓고 호송인이 총으로 주인 한국인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그 이전 나라에서 캐지 못하게 하여 ”별은(別銀)”이라고 불렀던 금은 그 뒤 “노다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금이 제 이름으로 불리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 외국인들의 노다지 노략질은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