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0. 효자임금 정조, 건릉에 잠들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는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이 있고 그 옆에는 그의 아들인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와 그 왕비 효의왕후(1753~1821) 김씨를 합장한 “건릉(健陵)”이 있습니다. 정조는 그 누구보다도 지극한 효심으로 백성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는데. 임금 자리에 오르자마자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려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습니다. 그런 일의 하나로 영조의 눈을 어둡게 했던 당쟁을 끝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수원에 화성(華城)을 짓고 서울을 옮기려고까지 했습니다. 효의왕후도 정조에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해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는데 1800년 순조가 임금에 오르자 왕대비로 올랐고, 자식 없이 69살로 세상을 떴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임금으로 불리는 세종대왕도 효성이 지극한 임금으로 꼽히는데 아마도 그런 효성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나 봅니다.
1689. 탈춤에서 쓰는 탈은 탈을 막거나 드러내는 것 우리나라엔 처용무, 북청사자놀음, 은율탈춤, 오광대놀이, 송파산대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 등 다양한 탈놀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겨레가 이렇게 탈놀이를 즐긴 까닭은 무엇일까요? 안동대 민속학과 임재해 교수는 이에 대해 탈놀이는 “탈 잡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전 일반 백성은 지배층인 양반들에게 탈 잡을 일이 많았지만 대놓고 탈을 잡으면 바로 보복 곧 “뒤탈”을 당할 것이기에 드러내놓고 탈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탈출구로 탈놀이를 생각한 것입니다. 백성은 탈을 써서 지배층의 눈길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거리낌 없이 탈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탈놀이를 하면서 탈을 잡는다는 것은 지배층의 탈을 드러내 경종을 울리는 것은 물론 탈 때문에 피지배층인 백성이 정신적으로 입는 탈 곧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1688. 천벌받아 벼락 맞은 이완용 집을 아시나요? 친일파 우두머리 이완용이 살던 집에 있던 고목에 벼락이 떨어진 사건을 아시나요? 이 이완용 집은 헌종 후궁 경빈 김씨가 살던 집으로 “순화궁”으로 불렸는데 1908년 이완용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 이완용 집에 자주 놀러다니던 이완용 조카 한상룡은 자신의 회고록에 벼락 맞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한상룡은 자신과 이완용 그리고 이완용 아들 이항구 셋이서 당구를 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당구를 치던 방문 앞 아름드리 고목에 벼락이 떨어져 고목이 둘로 갈려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라 잃은 백성 사이에서는 이완용이 천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이완용은 결국 이 집에서 살지 않게 되었고 요정 명월관 지점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명월관 지점 2층 맨 끝방에서는 3·1독립선언의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뒤 이 건물은 헐려 기독교 태화관이 되었다가 지금은 빌딩이 들어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1687. 조선낫과 왜낫의 차이를 아시나요? “낫”은 농작물 또는 풀·나무를 베는 데 쓰는 ‘ㄱ’자 모양으로 생긴 농기구입니다. 무속신화(巫俗神話)인 성조대감 이야기를 보면, 성조대감이 낫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조대감은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려고 여러가지 연장을 만들었는데, 이 중 하나가 낫이라고 하지요. 고려가요 《사모곡(思母曲)》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낫과 호미에 비유하여 어머니의 사랑이 더 적극적이고 지극함을 읊고 있습니다. 그런데 낫에는 조선낫과 왜낫이 있습니다. 조선낫은 대장간에서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드는 우리 고유의 낫이고, 왜낫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들여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낫입니다. 조선낫은 풀과 나무를 베거나 쳐낼 때 쓰면 닳기는 해도 부러지거나 이가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왜낫은 연한 풀을 벨 때는 좋지만 나무를 벨 때는 쉽게 이가 빠지거나 부러집니다. 그렇게 조선낫이 부러지지 않고 수명이 긴 까닭은 낫을 만들 때 수없이 불에 달구고 차가운 물에 식히며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 덕분입니다.
1686. 소는 농사의 바탕, 소를 잡으면 안 돼 ≪숙종실록≫ 9년(1683) 1월 28일 자 기록에 보면 송시열이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자(程子)가 한 “농사가 흉년이 드는 것은 소를 잡는 데에서 이루어진다.”라는 말을 들어 소의 밀도살을 엄격히 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송시열은 사람이 소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살면서도 소를 잡아먹기 때문에 소의 원한이 하늘과 땅의 화목한 분위기를 해쳐 이것이 자연의 순리를 깨뜨려 비가 오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또 그는 우리나라의 풍속이 쇠고기를 가장 좋은 맛으로 여겨서 이를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것 같이 여깁니다만, 율곡 이이는 평생 쇠고기를 먹지 않았고, 그 후손들은 지금도 쇠고기를 가지고 제사지내지 않는다며, 소 잡는 것을 막도록 청했지요. 박제가가 18세기 후반에 쓴 ≪북학의≫를 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소 500마리를 잡았고, 한양 24개 푸줏간과 300여 고을에서도 빠짐없이 쇠고기를 파는 푸줏간을 열었다.”고 합니다.
1685. 전통적 외국어 교육법, 갑오경장과 강제합병으로 무너져 조선시대에도 외국어 학습서가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중국어 학습서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朴通事)》, 몽골어 학습서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청어 학습서 《청어노걸대(淸語老乞大)》, 일본어 학습서 《첩해신어(捷解新語)》가 그것들입니다. 《세종실록》에 처음 나오는 《노걸대(老乞大)》의 '노'는 상대를 높이는 접두어로 우리말의 씨, 영어의 미스터쯤 되는 말이며, '걸대'는 몽골인이 중국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로 “미스터 중국인”쯤으로 생각해도 됩니다. 그런데 경희대 영어학부 한학성 교수는 “조선시대에 많은 외국어 학습서들이 있었으며. 사역원이나 승문원에서 전문적인 외국어 교육을 했던 우리나라의 전통적 외국어 교수법은 19세기 말 유럽의 개혁교수법보다 사오백 년 앞선 면모를 보였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1894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갑오경장으로 사역원을 폐지하고, 강제합병 직후인 1911년 외국어학교를 폐지하면서 무너졌다지요.
1684.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묻힌 융릉 이야기 우리는 영조임금이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낳은 장헌세자(사도세자, 1735~ 62)를 압니다. 장헌세자는 2살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지만 노론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등을 내세워 모함한 탓에 결국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지요. 그 장헌세자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 1735~1815)의 합장릉이 융릉(隆陵)인데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비참하게 죽은 장헌세자의 시호를 사도(思悼) 곧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라는 뜻으로 지었고 ≪한중록(恨中錄)≫을 남긴 혜경궁 홍씨에게도 혜빈(惠嬪)이란 호를 내렸지요. 장헌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에 있었는데, 정조가 임금에 오르면서 바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9년에는 이곳으로 묘를 옮겨 융릉이라 하였으며, 고종 때 의황제(懿皇帝)로 추존함과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懿皇后)로 올렸습니다. 같은 사적 206호 안에는 장헌세자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 합장릉이 있지요.
1683. 꽹과리의 다른 이름은 무엇이 있을까요? 꽹과리는 풍물굿을 이끄는 악기로 흔히 '쇠'라 하는데 매구ㆍ깽매기ㆍ꽹쇠ㆍ광쇠(廣釗)ㆍ깽새기ㆍ소금(小金)ㆍ동고ㆍ쟁 따위로 많은 별명이 있습니다. 지름이 보통 20~25cm, 높이 3.5~4.0cm 정도인 꽹과리는 놋쇠를 원료로 만드는데, 요즈음에는 금이나 은을 섞어 쓰기도 하지요. 음색에 따라, 소리가 높고 야문 수꽹과리, 소리가 얇고 부드러운 암꽹과리로 나눕니다. 또 꽹과리 소리는 흔히 풍물굿 4가지 악기 소리를 말하는 "운우풍뢰(雲雨風雷)" 중에 뢰(雷) 곧 천둥에 비유되며 별을 상징하고, 을 뜻합니다. 맨 앞에서 꽹과리 곧 쇠를 치는 사람을 '상쇠'라 하며, 상쇠는 가락을 모든 풍물패에게 전달하고 마을 제사에서는 제관이 되기도 하며, 지신밟기를 할 때는 고사장이 되고, 풍물굿에서는 진풀이를 이끌어 가는 등 모든 풍물굿을 총지휘합니다. 농촌에서는 추수가 끝나고 풍물굿과 함께 풍년을 감사하는 잔치를 벌이는 시기인데 이때 천둥소리라는 꽹과리 소리를 들어보면 어떨까요?
1682. 미국이 한국에 적용한다는 “케년 설계도”를 아시나요? 1905년 미국 국무장관 태프트와 일본의 가쓰라 사이에 있었던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아시지요? 그 밀약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일본이 인정한다면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조약이지요. 그런데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이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내용 가운데에는 “케년 설계도” 얘기가 나옵니다. 이 “케년 설계도”는 일본이 조선을 재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미국의 설계도입니다. 미국은 한국을 대할 때 따뜻한 마음보다는 자기들 이익을 위한 발판으로 한반도를 삼되, 직접적인 지배는 일본에 맡겨야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케년 설계도”의 골자라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입니다. 미국이 한국을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하면서도 어찌 한국을 일본의 지배 아래에 두려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정현기 회장은 한글날 기념 학술대회에서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대한 미국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고, “케년 설계도”가 실제로 있는지 확인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우리 국민의 안녕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1681. 벼를 훑어내는 농기구, “홀태”를 아시나요? 지금이야 벼를 거둘 때 트랙터가 다 해내지만, 예전엔 사람이 일일이 낫으로 베어 “홀태”라는 기구로 훑어서 벼 알갱이를 털었습니다. “홀태”는 길고 두툼한 나무 앞뒤 쪽에 네 개의 다리를 달아 팔자(八字)모양으로 떠받치게 하고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로 된 틀을 몸에 낀 형태로 되어 있지요. 이 빗살처럼 촘촘한 쇠틀 사이로 벼를 끼우고 잡아당겨 벼 낱알을 텁니다. 그런데 “홀태”는 사투리로 표준말은 “벼훑이”라고 하며, 다른 이름으로 그네, 첨치, 천치(千齒)도 있습니다. “홀태”는 다른 낱말로 배 속에 알이나 이리가 들지 않아 배가 홀쭉한 생선을 말하는 이름이기도 하며, “홀태바지”, “홀태버선”처럼 좁은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입니다. “시꺼먼 홀태바지를 입은 사람이 군도를 절컥대며 나타난다.”(이기영, ‘봄’)가 그 예지요. 지금은 “홀태”를 보기가 어려운데 관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