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양시 원당동에는 한양의 서쪽에 3기의 왕릉이 있다고 하여 서삼릉(西三陵)이라 이름 붙인 왕릉들이 있다. 참고로 옛날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어느 방향에 몇 기의 왕릉이 모여 있으면 방위에 왕릉의 기수를 붙여서 불렀다. 예를 들면 가장 많은 왕릉이 모여있는 구리시에는 9기의 왕릉이 모여 있어서 '동구릉'(東九陵)이라 불렀고, 서쪽으로 5기가 모여있는 고양시에는 '서오릉'(西五陵)이라 불렀으며, 서오릉과는 좀 떨어진 곳에 3기의 왕릉이 있어 이곳은 '서삼릉'이라 부르는 식이다. 왕릉이 2기 있는 경우에는 2기 능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여를 들면 강남구에 있는 2기의 왕릉은 선릉과 정릉을 합하여 '선정릉' 이라 부르며, 서초구에 있는 2기의 왕릉은 헌릉과 인릉을 합해서 '헌인릉' 이라고 부르른다. 오늘 탐방해 본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에는 먼저 중종의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禧陵)과 중종의 '정릉'(靖陵)이 있었으나, 중종의 정릉은 후일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으로 이전하였고, 이어서 중종의 아들이었던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의 합장묘인 '효릉'이 세워졌다. 그리고 조선 후기 강화도령이던 철종과 비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이 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 마을에는 제법 큰 규모의 고려시대 미륵불이 있다. 어석리 마을 초입, 두 주택의 담장 사이에 서있는 돌미륵은 높이가 4.3m에 이른다. 미륵불은 자세히 보면 무릎 윗부분과 무릎 아랫부분이 서로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다. 미륵불의 얼굴 모습은 머리 중앙이 솟아난 육계가 표현되었고, 그 위에는 팔각형의 보계(모자)를 쓰고 있어, 비가 와도 미륵불의 얼굴은 젖지 않게 하였다. 입을 꼭 다문 모습이 특이하다. 얼굴모습은 사실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기 보다는 불경에 나오는 부처님 형상의 기준(32상 80종호)에 따르고 있다. 불상의 이마에 백호, 긴 귀, 목부분의 3주름, 등은 그런 기준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몸에는 옷의 주름이 통견(긴 헝겊을 몸에 두른 모습으로 앞에 U자형의 옷주름)으로 표현하였으며, 수인(손모습)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인 시무외인(두려워 하지 말라)과 여원인(소원을 들어준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손의 모습은 사실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미륵불의 발은 땅에 묻힌 발 아래에 연꽃의 대좌를 그린 위에 발가락의 모습을 새겼으며, 옷주름은 발목 아래까지 늘어지게 표현하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한도는 조선 후기 선비, 금석학자, 문인화가, 서예가로 조선 학자들의 품격을 중국에까지 알렸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인생의 후반기(1844년, 59살)에 제주도로 귀양가 어렵게 살던 때 그의 제자인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한 폭의 수묵화다. 수묵화는 채색(물감)을 전혀 쓰지 않고, 오로지 붓에 먹물로 그린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다. 세한도의 그림에는 초라한 초가집 한 채가 고목이 된 나무 몇 그루 사이에 있고, 고목들은 비록 비틀리고 가지가 꺾이기도 하였지만, 초연한 듯 꽂꽂하게 서있다. 주변은 다른 잡다한 나무 한그루 없는 을씨년스러운 광야같은 곳임에도, 초가 주변의 소나무는 거칠지만 기개가 꺾이지 않은 채, 푸르른 잎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선비의 모습이다. 여기서 세한(歲寒)이란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을 뜻한다. 이 그림은 평생 학문을 좋아하던 추사에게 통역관으로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이상적(당시 중인 통역관)이 스승인 김정희를 위하여 조선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책들을 중국에서 수소문으로 구하여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세한도라는 이름은 논어에 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절은 불교가 들어온 2,000년 전 이래 본래 한국문화와 교류하면서 정착하여 전국토에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한국의 절은 인도에서 시작된 외래사상과 문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한국인의 마음을 불교화 하였으며, 고유사상과도 습합하였다. 이에 따라 이땅에서 이루어진 건축, 조각, 회화, 문학, 역사, 서적 등에 이르는 모든 문화의 정수로 발전하여 인간이 가꾸고 이어받야할 보편적 가치를 정립하였고, 긍국적으로 부처가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선한 행위에는 선한 결과가 맺히며, 악한 행동을 한다면 결국 나쁜 결과가 온다는, 인과응보의 사상을 갖게되었다. 불교는 이렇게 도덕과 윤리의 근본을 이루는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불교문화가 나무와 흙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어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방화로 인한 피해에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서 무참히 파괴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인의 내면에 쌓여온 결과 불교가 탄압받아온 오랜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마음이 완전히 꺼져버린 듯 하다가도 훌륭한 선각자와 선승, 학승이 나타나면 역사적 훌륭한 스님들의 뒤를 이어서 또 다시 꽃피우는 전통이 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에는 국사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절의 유래는 확실히 전하지 않고 있지만, 절이 있는 산이 국사봉(해발440m)에 이르고 있어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옛 절터에 절을 짓고 절의 이름을 정하였다고 주지 스님은 전한다. 국사암을 오르자면 기솔리 좁은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 산기슭으로 부터 1km 가파른 산길로 더 올라가야 되는데, 암자 아래 마련해 놓은 주차장에서 약150m에서 부터는 더 가파른 길이다. 차를 세우고 150m를 오르는 것 만으로도 등줄기에 땀이 흠뻑 나올만큼 힘이 든다. 암자에 오르고 나면 힘들었던 만큼 산아래 펼쳐진 풍광이 매우 좋았다. 국사암에는 삼존석불이 있는데 석불의 이름은 "궁예미륵"으로 불리고 있다. 석불의 조성은 후삼국시대의 궁예가 조성했다면 매우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나 그 연대는 확인 되고 있지 않다. 한국의 역사에서 곳곳에 미륵불 신앙이 활발하던 때는 사회가 혼란스럽고 전쟁에 휘말리던 때 였는데, 그 중에서도 후삼국시대의 혼란기가 미륵불신앙이 가장 활발했던 때로 짐작된다. 국사암의 삼존불은 가운데 있는 부처가 크고 높으며 양쪽 협시불은 약간 작다. 불상은 모두 발목아래가 땅에 묻혀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는 섬진강을 굽어보는 해발 500m 높이의 바위산이 있다. 바위산의 이름은 오산(鰲山=자라산)이라고 하는데 모습이 자라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오산은 제법 큰 산으로 산 정상에 오르기 전, 가파른 8부능선의 비좁은 땅에 사성암(四聖庵)이 있는데 섬진강이 굽어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사성암은 역사가 매우 오래된 암자로 그 연원은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에서 온 고승 연기조사가 처음 개창하였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지리산 근처에 많은 절들을 개창하였는데, 구례 화엄사 또한 그가 창건한 절이다. 처음 절의 이름은 오산암(자라산의 암자)이었으나 이곳에 한국 불교사의 최고 고승으로 손꼽히는 네분의 스님들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四聖庵)이라 고쳐부르게 되었다. 사성암에서 수도하였던 한국의 고승은 원효대사, 의상대사 , 도선국사, 진각국사다. 사성암 주변에는 12비경이라는 명소가 전하는데 진각국사가 참선했다는 좌선대, 우선대를 비롯하여 섬진강과 지리산을 살필 수 있는 절경과 해질녘에 노을이 아름다운 낙조대 등이 있다. 무엇보다 절벽을 활용하여 높이 세운 기둥 위에 전각을 지은 것이 더 큰 비경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산수유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천여년 전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새댁이 그 씨앗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나무라고 한다. 이런 유래를 갖고 있는 산수유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 달전마을에 처음 씨앗을 심어 구례군 일대에 퍼지게 되었다. 구례군 산동면이라는 마을 이름도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유래한다. 긴 겨울을 지내고 봄이 되면 어느꽃 보다도 먼저 피어 지리산 남쪽 경사면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는 산수유꽃으로 지금 구례 산동면은 화사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산수유를 처음 심은 구례군 산동면 달전마을에는 맨 먼저 씨앗이 뿌려진 할아버지 나무와 조금 늦게 씨앗이 움튼 할머니 나무가 앞 뒤에 서있다. 천년을 살아온 그 자태는 지금도 당당하고 우람하며, 나무의 균형도 매우 잘 잡혀있는 모습이다. 춘삼월 봄꽃이 피어나는 계절인 지금이 산수유꽃의 절정기다. 천년 산수유 시조목이 있는 달전마을에는 시조목을 중심으로 작은 공원이 마련되어 있고, 산동마을에 핀 수만그루의 산수유꽃을 보고자 찾아온 사람들이 많다. 해마다 이 무렵 산수유 축제를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축제는 멈추고 꽃을 보러온 사람들도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모습이 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안성은 높은 산이 없이 낮은 구릉지역에 올망졸망한 산들이 많은 평탄한 지형으로 영남에서 충주를 지나서 서울로 올라오는 교통의 요지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오고가며 한양으로 하룻거리 발품을 남겨두고 마지막 숨을고르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발품을 팔아야하는 교통상황에 따라 안성지역 곳곳에는 사람들이 쉬어가면서도 마음을 의지하고자 곳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세우는 기도처도 많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가운데서 죽산면 죽주산성 근처 매산리 석불을 찾아 보았다. 매산리 석불은 서있는 모습의 미륵불로 그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후삼국을 거치는 혼란기에 많은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가는 참혹한 시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아비귀환, 혼란한 시대를 정리하고 이땅에 미륵불이 나타나 극락세계가 열리기를 기원하였다. 미륵경전에 따르면 말세를 지나면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하여 미륵불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에 따라 여기 저기 미륵불을 모셨다. 매산리 석불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거대한 바위에 전신과 머리 위에 사각관모까지 쓴 미륵불로 조성했다. 매산리 미륵불의 모습은 얼굴이 매우 긴 모습이며, 이마 위의 머리카락부분도 높고, 그 위에 넓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는 아주 깊은 산골이다. 주변 산세가 높은 악산은 없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볼 때 승용차로 가기에도 먼 거리다. 물걸리(物傑里)는 만물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의 각종 생산물이 모여들어 동창(東倉)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동창(東倉) 곧 동쪽 창고에 그득하던 물산이 있던 동네라서 그런지 지금도 동네가 제법 크다. 이곳에서 태어나 밭농사를 지으면서 살던 농민 전덕재 (81세) 씨는 젊은 시절인 1967년 밭갈이를 하던 중 쟁기에 걸려나온 금동여래입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를 정직하게 문화재당국에 신고하였다. 이후 이곳은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물걸리옛절 보호구역 내에 석탑과 석불 및 광배 등 5점의 보물(1971.7.7.지정)로 지정되었다. 이를 살펴보면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 불대좌(불상을 안치하는 좌대)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부처님 좌대와 부처님 뒤에 세워진 보호 석판), 보물 제545호 삼층석탑 등이다. 이 밖에도 금동불상 여러 구가 발굴되었는데, 금동불상들은 국립춘천박물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설악(雪嶽)에 폭설이 내렸다. 눈 소식을 듣고 달려간 설악은 온통 눈, 눈, 눈 세계였다. 승탑에도, 대웅전에도, 요사채에도 온통 흰눈의 세상이었다.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 내 설악동에 있는 신흥사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강원도 내 대부분의 사찰을 관리하고 있는 큰 절이다. 신흥사의 창건은 신라 진덕여왕 6년(652) 자장율사가 구층탑을 조성하고 설악산 내 계조암과 함께 창건하였는데 당시 절의 이름은 향성사였다. 그런데 창건 후 얼마되지 않은 698년 불에 소실된 뒤 자장율사를 이어 701년 의상대사가 향성사를 중건하고 그 이름을 선정사라고 고쳐 불렀다. 이때 의상대사는 아미타삼존불(아미타불,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조성하여 아미타 불국토로 가꾸었다. 그리고 그 맥이 1000년을 이어왔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구층탑이 소실되고 이어서 1642년 인조20년 화재로 절의 전각들이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버렸다. 이후 인조 22년(1644) 영서 연옥 혜원 등 세 스님들이 다시 중창불사를 발원하던 중 하루는 세 스님의 꿈속에 동시에 나타난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주면서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년이 지나도록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