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이별은 약속되고, 덧없는 시간 속에 만남과 헤어짐이 무량억겁(無量億劫,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윤회를 반복한다. 만난 자 기필코 떠나보내야 하고, 어느 것 하나 그대로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혹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내 것처럼 한순간도 놓지 않으려고,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 언제까지나 그대로 가지고 갈 것처럼 두 손 불끈 쥐고 있다. 이미 가버린 사람도 그리워한다.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그러나 아무리 달래도 갈 사람은 기어코 가고 만다. 가수 이범학은 <이별 아닌 이별>이란 시 속에서 재회를 절절히 그려내고 있다. “…어디서나 행복을 바라는 내 맘은 무너진 내 안의 사랑이 번지면 다시 찾을 꺼야 내사랑 굿바이 굿바이 어디서나 행복을 바라는 내 맘은 사랑한다는 그런 말보다 더 진실함을 이해해 이젠 떠나가는 그대 모습 뒤로 아직도 못다 한 나 만에 얘긴 하지마 다시 언제까지 나만의 미련으로…“ 맹자의 《진심장구(盡心章句)》에는 “往者不追 來者不拒(완자불추 내자줄거)” 곧 가는 사람 붙들지 않고 오는 사람 거절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우리문화신문=안승열 명리학도] 행복한 삶은 옛 부터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였고, 건강한 신체는 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모든 간지술이 여기에 착안했고 명리학도 사주 감정의 결과를 같은 목적에 활용하려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십천간과 십이지지의 조화를 보며 인생의 길흉사를 판단하는 간지술은 주나라 시대부터 있어 왔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발전한 음양론이나 오행론을 사상적 기초로 하며 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예언술(점술을 높인 말)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오성술, 구성법, 기학, 육임, 자미두수 등 여러 종류의 예언술이 있었으나, 이들은 감정의 적중률이 저조하여 차츰 대중의 지지를 잃게 된다. 10세기 이후의 동양사회는 군사, 과학, 정치 등 많은 분야의 근거 이론을 명리학에서 구하게 되었다. 명리학의 발전은 9할 이상이 중국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우선 중국의 명리학, 이어서 우리나라 명리학의 발전을 살펴보겠다. 중국의 명리학 명리학은 당나라의 이허중(9세기 인물로 추정)에 의해 학문적 체계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는 그간 전해져 내려온 옛법(古法)의 명리학을 출생 연월일시에 태월(잉태한 달)을 더한 다섯 기운으로 감정하는 삼명학으로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말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며, 세상을 받아들이는 손이다. 사람은 말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이라는 손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말이 흐릿하면 세상도 흐릿하게 보인다. 천수관음보살처럼 손이 즈믄(천)이면 세상도 즈믄을 받아들이지만, 사람처럼 손이 둘뿐이면 세상도 둘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치에서 중국말이나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얼마든지 끌어다 써야 한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들은 우리 토박이말로는 눈과 손이 모자라서 지난날 중국 한자말로 눈과 손을 늘렸다고 여긴다. 그 덕분에 이름씨 낱말이 얼마나 넉넉하게 되었는지는 국어사전을 펼쳐 보면 알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참말이 아니고 옳은말도 아니다. ‘산’은 마치 토박이말처럼 쓰이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끌어다 쓰기 전에는 우리에게 ‘산’을 뜻하는 이름씨 낱말이 없었을까? 이것이 들어와서 비로소 ‘산’을 뜻하는 낱말이 생겨나 우리가 산을 처음 바라보고 세상을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사실은 거꾸로다. ‘산’ 하나가 들어와서 이미 있던 토박이 이름씨 낱말 셋을 잡아먹었다. ‘뫼’와 ‘갓’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옛말에 “홧김에 서방질한다”라는 말이 있다. 김 교수는 싸움이 오래 계속되고 남편으로서의 욕구가 채워지지 못하니 “홧김에 바람피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심정이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전국의 아내들이 귀담아들을 속담이다.) 나뭇잎이 뚝뚝 떨어지는 어느 날 오후, 김 교수는 문득 미스 최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가을 햇살은 따사로이 비치고 있었다. 햇살 속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연구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오동나무에서 커다란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김 교수는 자기의 인생도 언젠가 끝이 나고, 저 오동나무 잎처럼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상념에 사로잡혔다.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인가 보다. 그날 김 교수의 행동은 분명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왜 그랬을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 날은 매우 아름답고도 쓸쓸한 가을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미스 최에게서 받은 전화번호를 들여다보며 10초 정도 망설였다. 그러다가 김 교수는 크게 용기를 내어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침 미스 최가 받았다. “여보세요, 김00 교수입니다.” “아, 오빠세요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16년 전에 경남에서 열린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 가운데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준 생태 관광지로 첫손 꼽힌 데가 바로 창녕의 ‘우포늪’이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는 창원의 ‘주남저수지’도 거기에 못지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관광지의 이름이 하나는 우리 토박이말 ‘우포늪’으로 람사르 정신에 잘 어우러지지만, 다른 하나는 ‘주남저수지’라는 한자말이어서 아쉽고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주남저수지’는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때에 바꾸어 쓴 이름일 터이고 본디는 틀림없이 ‘주남못’이었을 것이다. ‘못’은 쓸모 있을 적에 쓰려고 사람이 땅을 파고 둑을 쌓아서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이다. 못에 가두어 두는 물은 거의 벼농사에 쓰자는 것이라 논보다 높은 산골짜기를 막아서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 못은 거의 벼농사에 쓰자고 물을 가두어 두지만, 바닥의 흙이 좋으면 연을 길러서 꽃도 보고 뿌리를 캐서 돈을 벌자고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연을 키우려고 만든 못을 ‘연못’이라 부른다. 그리고 연못은 집 안에 뜰을 꾸미느라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뜰 안의 연못에 키우는 연은 꽃을 보자는 것일 뿐 뿌리를 팔아서 돈을 벌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박 교수와 점심 내기를 하고 나서 며칠 뒤에 김 교수의 가정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 교수는 고3 아들이 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늦둥이 아들이 하나 있다. 김 교수의 자녀 교육 방침은 자유방임에 가까웠다. 공부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부모가 시킨다고, 과외 선생을 붙여준다고, 안 하는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3 아들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10등 이내의 상위권에 들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학급 석차가 10~20 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정도의 실력이었다. 담임선생님 말로는 이러한 성적권의 학생들을 진학 지도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조금만 잘하면 이른바 서울대학(요즘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이면 다 서울대학이라고 부른다)에 보낼 수 있겠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된다. 어느 가정이나 사정은 비슷하리라. 교육과 관련한, 남편은 대개 방임형이고 아내는 극성형이다. 대학까지 나온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가 대학에 못 가면 자기가 창피를 당하는 줄로 안다. 자기가 모자라서 자녀가 공부를 못하고 대학에 못 가는 줄로 잘못 아는 것이다.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는 꼭 대학에 보내야만
[우리문화신문=안승열 명리학도] 인간은 35억 년 전 발생한 생명체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인간의 출생은 출생자의 의지와 무관한 우연의 에너지가 총체적으로 집적된 특별한 사건이다. 국적이나 가문, 부모의 인성이나 능력, 건강, 체질, 빈부 그리고 출생자의 성별, 신체의 강약, 유전병, 재능, 인성 등은 출생자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출생자의 인생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명리학은 이들의 에너지가 인간 운명의 본질이며, 인생사에 있어 많은 길흉화복의 근원이라고 관념하였다. 이 관념에 따라 “운명은 출생시 천기(天氣- 하늘의 에너지)에 의해 출생자 인생의 길흉화복으로 예정되며, 이렇게 예정된 에너지를 사주 간지로 확인하여 감정하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정의(定義)하였다. 이 정의는 명리학의 중요한 공리(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사실이나 진리로 다른 명제의 전제가 되는 원리)가 되었다. 운명은 출생 전에 주어진 것이고 살면서 겪게 되는 길흉화복은 출생 후에 일어나는 일이니 운명이 길흉화복으로 예정되는 시점은 출생 시점일 것이다. 또한 인간을 별의 먼지와 그 에너지로 만들어진 소우주라 하였으니 이러한 예정이 천기에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구는 쉬지 않고 태양 주위를 돌면서 가을이 깊어 갔다. 봄이 여자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말이 있다. 봄이 되면 여자들은 생기가 나고 멋도 부리고 싶고 노출되는 옷으로 치장을 하고 싶어진다. 여자들은 봄에 괜히 들뜬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여자는 봄에 물이 오른다. 여자가 바람나기 쉬운 계절이다. 남자들은 가을이 되면 괜히 울적해지고 감상에 젖는다. 낙엽 떨어지는 돌담길을 걷고 싶어진다. 어디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인생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념에 사로잡힌다.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고서 어떤 남자는 우울증에 빠진다. 어떤 남자는 시를 쓰기도 한다.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날,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떤 남자는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깨달음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어려운 말로 표현한다. 여기서 행이라는 말의 의미는 광범위하다. 보이는 사물, 느끼는 감정, 관념적인 개념 등등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행이라고 말한다. 제행무상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는 뜻이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말꽃’은 ‘문학’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토박이말이지만 예로부터 써 오던 것이 아니라 요즘 새로 나타난 말이다. ‘문학(文學)’은 본디 ‘글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공자님이 처음 썼다고 하는 중국말인데, 우리는 지금 그러한 뜻으로 ‘문학’이란 낱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문학’은 놀이(희곡), 노래(시), 이야기(소설) 같은 것을 싸잡아 서양 사람들이 ‘리터러처(literature)’라고 하는 그것이다. 이것을 일본 사람들이 ‘문학’이라 뒤쳐 쓰니까 우리가 그대로 가져와서 쓰는 것이다. 그러나 놀이, 노래, 이야기는 이른바 ‘말의 예술’이므로, 중국말이었든 일본말이었든 글의 학문을 뜻하는 ‘문학’이라는 말로는 그것들을 마땅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게다가 말의 예술인 놀이, 노래, 이야기는 입말, 글말, 전자말을 두루 싸잡아야 하는데, 글말만을 뜻하는 ‘문학’이라 부르면 입말과 전자말로 즐기는 예술은 싸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중국 한자말 ‘문학’과 우리가 싸잡아 담으려는 뜻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데, 언제까지 우리가 ‘문학’이라는 남의 말을 빌려다 써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가슴에 품고 마땅한 낱말을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와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반가우며,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만남 뒤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이별을 어쩌란 말인가. 만남은 무엇이고 이별이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내 곁에 있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회자정리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란 고사성어가 있다. ‘회자정리’란, 만난 자는 분명코 헤어진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지만 만남 뒤에 이별이 올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보다,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거자필반’이라 했다. “헤어진 사람은 언제가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라는 사자성어가 마음에 간다. 만난 자는 반드시 떠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하였으니, 만남과 헤어짐에 너무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말라는 뜻일 게다. 이러한 언어의 중심에는 누구나 태어나면 불가항력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위안과 대책이라 보인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 이집트 고대 무덤 곧 4,300년 간 굳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