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지난 9월 21일 토요일 저녁 5시,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열린 이재화거문고회 창단연주회 「현묘(玄妙)」는 단순히 한 단체의 출범을 알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전통음악사의 맥락 속에서 오랫동안 잊히거나 변형되어 전해지던 풍류의 한 갈래를 다시 무대 위에 되살려낸, 역사적이고도 예술적인 사건이었다. 이번 무대에서 복원된 것은 1920년대 거문고 명인 백낙준(白樂俊, 1884~1933?)이 남긴 투리(投理)다. 투리는 그 이름조차 대중에게 생소하지만, 바로 그 낯섦이야말로 전통의 깊은 저변을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의 값어치를 일깨운다. 이번 복원은 춘산 전재완이 1958년에 채보·발간한 악보를 근거로 이루어졌다. 전재완은 특히 서양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는데, 그의 채보 방식은 전통 정간보의 세로 배열과 달리 가로형 정간보를 택했다. 이는 전통음악을 서양 기보법적 시각으로 다시 바라본 시도이자, 전통과 근대적 음악 교육이 충돌하고 융합하던 시대적 맥락을 반영한다. 더구나 이 귀중한 악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이진원 교수가 제공한 자료로, 이번 무대를 위해 이재화 명인에게 전달되었다. 연구와 교육의 맥락에서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온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 마음까지 덩달아 무거워지는 듯한 날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짙은 구름도 서로 맞닿은 채 끝없이 하늘을 덮고 있지는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토박이말 ‘구름짬’은 바로 그 구름과 구름 사이에 난 작은 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구름짬’을 ‘구름 덩이의 틈새’라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한데 뭉치어 이루어진 구름의 틈새’라고 풀이합니다. ‘짬’은 ‘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짬을 내다’처럼 아주 짧은 겨를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구름짬’은 구름 사이에 난 작은 틈이자, 그 틈으로 잠시 무언가 내비치는 눈깜짝할 새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이 말의 아름다움은 ‘구름’이 아닌 ‘짬(틈)’에 있습니다. 눈길을 구름에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빛과 하늘을 보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말집(사전)에 실린 보기들에서도 그 말의 느낌이 잘 드러납니다. 장마철이라고는 하나 간간이 구름짬으로 해가 보였다.(표준국어대사전) 먹구름 사이의 구름짬으로 실낱 같은 햇살이 보인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이처럼 ‘구름짬’은 우리에게 작은 달램과 바람을 주는 말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운영의 김옥균 암살 미수 사건이 불거져 세상이 한바탕 떠들썩했다. 1886년 7월 13일 김옥균은 내무대신 야마가타 아리모토로부터 통지문을 받는다. 15일 안으로 일본 영토를 떠나라. 추방명령이었다. 당시 김옥균은 치외법권 지역인 요코하마 프랑스 조계에 묵고 있었다. 그곳의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구명운동을 꾀할 생각이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일본인이 운영하는 미쓰이 여관으로 퇴거시킨다. 연금조치다. 김옥균은 미국행을 서둔다. 여비마련을 위해 애쓰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2주일만 더 연기해 줄 것을 외무성에 요청한다. 김옥균은 일본 측에 “다음번 미국 우편선의 출범일”에 출국하겠노라고 통보한다. 막상 그가 미국으로 떠날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정부가 방침을 돌연 바꾼다. 오가사와라 고도로 추방하겠다는 것이다. 유배를 보낸다는 게 아닌가. 분기탱천한 김옥균은 항의함과 동시에 외국 공사들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보낸다. “원래 본인은 15일 이내로 일본 영토를 떠나라는 추방명령을 받고 미국행을 준비중이었지만, 여비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 그런데 일본 정부는 갑자기 오가사와라로 추방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통보했습니다. 놀라움을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우리는 하늘을 보며 그 위에 떠 있는 구름을 이야기하지만, 때로는 그 구름이 땅으로 내려와 우리를 가만히 안아주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구름의 가장 부드럽고 살가운 끝자락을 일컫는 토박이말, ‘구름자락’을 만나 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구름자락’을 ‘구름의 아래로 드리운 부분’이라고 풀이하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넓게 퍼진 구름의 아래로 드리운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라고 덧붙여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참멋은 ‘자락’이라는 낱말에 있습니다. ‘자락’은 ‘치맛자락’이나 ‘두루마기 자락’처럼 옷의 아랫부분이 넓게 늘어뜨려진 곳을 가리킵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하나의 커다란 옷으로 보았고, 그 옷의 끝자락이 뫼와 들, 바다 위로 부드럽게 드리워진 모습을 ‘구름자락’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름을 알고 나면 바람빛(풍경)이 달리 보입니다. 뫼허리에 걸린 구름은 그냥 구름이 아니라, 뫼에 하늘의 옷이 살짝 걸친 모습이 됩니다. 그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구름자락’은 솜털처럼 부드러운 모습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곧 쏟아질 비를 머금어 무거운 얼굴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달 초 미국 조지아주 서배나에 있는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300여 명의 우리 근로자들이 미국 출입국 단속반의 무차별 단속을 당해 비인권적,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고생하다가 일단 우리나라로 돌아온 사건은 여러모로 지금까지 우리가 살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지구상에 있음을 각성하게 하였다. 사건의 경위야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 대통령이 위대한 미국을 건설한다고 미국의 국경을 사실상 틀어막고, 미국 안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들을 마구잡이로 단속해 실적을 올리려 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지만 이제 세계의 질서를 이끌어가던 미국이 이상이나 신념, 관행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익 앞에 형편없이 무너져 내린 것을 세계가 알게 되었고, 이로써 그동안 알게 모르게 미국의 도덕과 가치를 존중해온 많은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관세를 몇 10%씩 마구 올려 미국정부가 그 관세 수익으로 미국민들에게 혜택을 주겠다고 하니 다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지켜보며 일부 환영하는 국민이 있는 것 같은데 그 관세도 제멋대로, 자기 기분에 따라 관세를 매겼다가 연기하고 취소하고 깎아주고 하는 행태가 이어지면서 정작 미국인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새로운 하루의 그림을 그리기 비롯하는 아침입니다. 우리는 거의 다 반듯한 금을 그을 때 쓰는 곧은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누리의 금들이 모두 곧은 것은 아니지요. 오늘은 그 어떤 자로도 그리기 어려운, 많고 많은 굽은금을 그리는 데 쓰는 자, ‘구름자’를 만나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구름자’를 ‘곡선을 그리는 데 쓰는 자’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는 ‘곡선자(曲線-)’나 ‘운형자(雲形-)’,를 들고 있습니다. ‘운형자’는 ‘구름 모양 자’라는 뜻이니, ‘구름자’와 그 뜻이 꼭 닮았습니다. 다만 풀이를 할 때 쓴 '곡선'을 '굽은금'이라고 했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기는 합니다. 왜 하필 ‘구름’이었을까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떠올려보면 그 까닭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구름은 하나의 곧은 금도 오롯한 동그라미도 없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마음껏 피어납니다. 굳어진 모양 없이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굽은금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름이지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 연장에서 그런 구름의 모양을 보았고, ‘구름자’라는 더없이 멋진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옷본을 뜨는 바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온 누리에서 가장 가볍고 아름다운 옷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저마다 좋아하는 또는 아름답게 여기는 옷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온 누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에 ‘구름옷’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구름옷’을 ‘구름처럼 가볍고 아름다운 옷’이라고 풀이합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가볍고 아름다운 옷을 하늘에 뜬 구름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조금 다르게 풀이를 해 놓았구요. ‘구름’과 ‘옷’이라는 두 낱말이 만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옷의 느낌을 넘어선, 아득하고 가물가물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자락을 잘라 지은 것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고 눈부시게 고운 옷을 바로 ‘구름옷’이라 부른 것입니다. 말집(사전)의 보기월을 보면 이 말이 ‘선녀’의 옷차림으로 그려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구름옷에 안개치마를 입은 선녀라도 보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표준국어대사전》 구름옷에 안개치마를 입은 선녀 하나가 고이 걸어 나오더니 양생에게 말을 걸었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보시다시피 '구름옷'은 ‘안개치마’라는 짝꿍을 데리고 나올
[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가을의 문턱에 선 과천은 지난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예술’로 물들었다. 2025년 과천공연예술제의 주제는 ‘기억과 상상이 솟아오르는 시간’. 단순한 표제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며 현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감각적 중심어가 눈길을 끌었다. 축제의 현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풍선을 활용한 야외 공연장이었다.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설치 구조물은 관객들에게 마치 비현실의 세계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안겨주었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관객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았다. 공간 자체가 공연의 일부가 되어 관객의 감정을 예열하는 효과적인 연출이었다. 올해 축제는 ‘지역축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가 뚜렷했다. 특히 나라 밖 예술단체들의 활발한 참여가 눈에 띄었다. 무언의 신체극, 독창적 오브제 퍼포먼스, 현대무용과 영상이 결합한 무대 등 익숙하지 않은 형식들이 주제의 서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는 과천공연예술제가 단순한 지역 행사를 넘어 지구촌 예술 축제로 발돋움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나라 밖 단체의 참여가 신선한 자극을 준 반면, 지역 예술단체와의 긴밀한 서사의 연결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02) 매화나무 드문드문 꽃 적게 붙어 있고 그 성기고 마름과 비스듬히 기운 것 사랑하네 다시 삼성이니 저녁이니 새벽이니 변별할 필요 없으리니 향기로운 가지 끝에 달이 떴나 바라보게나 지폐 속에는 우리 역사가 가득하다. 천 원, 오천 원, 만 원, 오만 원권은 이제 카드에 밀려 점점 꺼낼 일이 없어졌지만, 언제든 꺼내 들면 역사 속 인물과 그에 걸맞은 문화유산을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하나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폐는, 가장 손쉽게 지니고 누릴 수 있는 우리 역사다. 박강리가 쓴 이 책, 《지갑 속의 한국사》는 그런 지폐의 친근한 매력으로 우리 역사에 한 발짝 다가가는 책이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모르는 것들, 아마 지폐 속 인물과 배경도 그러한 것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눈에 익어서 오히려 무심히 지나치게 되지만, 한 번쯤 알아두면 두고두고 좋은 이야깃거리가 된다. 이 책은 만 원, 천 원, 오만 원, 오천 원에 각각 실린 세종대왕, 퇴계 이황, 신사임당, 율곡 이이를 차례대로 다룬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지폐에 담긴 그림과 문물은 이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친절히 일러준다. 그 가운데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비가 온 뒤 갠 아침이나, 뫼허리를 굽이도는 고갯길에서 문득 온 누리가 잿빛과 흰빛으로 가득 차 발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안개가 꼈다’고 말하지만, 이럴 때 꼭 들어맞는 아름다운 토박이말이 있습니다. 바로 ‘구름안개’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구름안개’를 ‘구름처럼 보이는 안개’라고 풀이합니다. ‘구름’과 ‘안개’, 두 낱말이 만나 그 뜻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과학 배움책을 들여다보면 ‘구름’과 ‘안개’는 만들어지는 자리가 다르다고 일러줍니다. 아주 작은 물방울이 하늘 높이 떠서 뭉치면 ‘구름’이 되고, 땅 가까운 곳에서 뭉치면 ‘안개’가 된다는 것이지요. 떠 있는 높낮이로 둘을 가르는 셈입니다. 그런데 ‘구름안개’는 바로 그 둘의 다른 점을 슬그머니 지우는 재미난 말입니다. 하늘 높이 있어야 할 구름이 땅으로 내려와 안개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땅에 머물러야 할 안개가 뭉게뭉게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름안개’ 속에서는 하늘과 땅의 가름이 사라집니다. 말집(사전)에 실린 보기는 뫼에 오를 때의 일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