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어제 3.1절, 구파발에서 녹번에 이르는 국도를 지나는 사람들은 국도변에 걸린 태극기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었을 지 모른다. 실제로 아는 사람이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와 '국기 불량'이 아니냐고 흥분해 하는 사람이 있엇을 정도 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태극기는 은평구에서 3.1만세운동 당시 쓰던 진관사에 보관된 피묻은 태극기를 상징화 한 것이다.독립만세를 부르는 관중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던 일제 경찰들에 굴하지 않고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동포들이 흘리던 피가 고스란히 태극기에 묻어 그날의 참상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 있는 태극기는 2009년 진관사 칠성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3호) 해체 복원 조사 중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태극기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변하고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되었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크기는 가로 89㎝, 세로 70㎝, 태극의 직경은 32㎝이다. 이 태극기의 4괘는 현재의 국기와 비교하면 리ㆍ감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이는 194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하여튼 철저히 나라일 밖에 모르는 분이셨어요. 한번은 중경에서 큰아들이 결핵에 걸렸는데 마이신이 아주 비쌌을 때였지요. 중경은 1년에 안개가 4~5개월이나 껴서 햇볕이 아주 귀하여 결핵환자에게는 안 좋은 환경이지요. 거기다가 중일전쟁 상황이라 영양상태도 나빠서 더욱 치료가 어려웠을 때인데 큰아들에게 마이신 주사 한 대도 못 맞히고 결국 결핵으로 죽게 됩니다. 그때 백범 선생은 임시정부 살림을 맡아 독립자금을 쥐고 계셨지만 그 돈을 아들의 마이신 주사 한 대도 쓸 수 없다고 하실 만큼 공과 사의 선을 분명하게 긋던 분입니다. 이 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 2015, 서울시》에서 김구 주석에 대한 기억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대한 김자동 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의 답이다. 김자동 회장은 어린 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자란 산증인으로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1846~1922)이다. 동농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에 중추원 의장을 지낸 분으로 1919년 항일 비밀결사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10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마 저의 지루한 수험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의 시 한 구절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구절과 같은 아름다운 말을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신이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간 시험 하나를 목표로 하던 저는 계절마다 당신의 평전을 읽으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갔고 당신의 시를 읽으며 어떤 생각을 지닌 분인지 깨닫고 싶어 했습니다. 2015년 여름, 오사카행 비행기를 탄 까닭의 하나는 시인의 시비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산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날아 다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을 가면 도쿄 도시샤 대학이 나옵니다. 그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교의 교정 한쪽에는 당신을 기념하는 시비가 있습니다. 싱그러운 여름비가 연보랏빛 수국 위로 데굴데굴 떨어지던 날이었습니다. 도시샤 대학 근처에 다다르자 자신이 이 대학의 교수라며 길을 안내해주신 영국인 교수님을 따라 도시샤의 교정을 거닐며 당신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수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시인의 기념비를 물어보니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길을 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촉도)보다 험하고 泰(태)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萬里飄然一粟 舟中皆敵有誰親 崎嶇世路難於蜀 忿憤輿情甚矣秦 今日潛踪浮海客 昔年嘗膽臥薪人 此行己決平生志 不向關門更問津) -김지섭 선생- 김지섭(金祉燮, 1884. 7. 21~1928. 2. 20) 선생은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에서 풍산(豊山) 김씨(金氏)인 부친 김병규(金秉奎)와 모친 신천 강씨(信川康氏)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5세에 인근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竹林洞) 예천(醴泉) 권(權)씨 가문의 권석희(權錫禧)와 혼인하였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은 훗날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자 벌인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선생은 일어를 배우기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습득하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상주보통학교(尙州普通學校) 교원과 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1910년 2월 14일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겨레의 원수 일본의 이등박문을 처단하여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다. 그런 2월 14일이 언제부터인가 젊은이들 사이에 쵸코렛을 주고 받는 날로 여겨지고 상술이 부추겨 대대적인 기념일처럼 술렁이고있다. 안중근 의사는 공판정에서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등박문을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또 재판장의 신문에 대하여 이등박문은 대한(大韓)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인의 적이요, 우리 겨레만대의 원수인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안의사가꼽은 이등박문의 15개조 국혼 말살 죄악을보자. 1.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한국의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을사보호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독립을 요구하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 체제로 바꾼 죄 6.철도,광산,산림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7.일본이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산 선생님,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 오는 나머지,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일까요? 문득 선생님이 사신 서른세 해가 깊고 높은 뜻을 펼치기에는 너무 짧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으로 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강렬하고 인상적인 삶을 사셨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1937년 중국 옌안 시절의 김산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83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여 전이었습니다. 미국의 기자 출신 작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 Song of Ariran에서, 망국의 한을 안은 한 젊은이의 짧고도 치열한 삶을 처음 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받은 충격은 가히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고수해 왔던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바뀌는 초유의 경험을 했다고 하더군요.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사후 45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생애가 실체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 이외에도, 님 웨일즈의 표현대로 현대적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종익(宋鍾翊, 1887. 2. 27~1956. 1. 7)선생은 1887년 2월 27일 경북 대구에서 부친 송인구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05년 일본에 유학하였다가 큰 뜻을 펴고자 1906년 4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당시 한인들의 항일민족 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 1908년 3월에 일제 통감부의 외교고문인 스티븐스(stevens, d. w.)가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에 일제의 한국의 보호국화를 왜곡 선전하자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선생은 이들 두 의사의 법정 투쟁에 대비하여 조직된 재판후원회의 재무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송종익 선생 한편 1912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의 리버사이드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맨 먼저 선생에게 흥사단 약법의 초안을 보이고 상의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흥사단의 첫 동지가 되어 일생을 단(團) 운동에 바치게 된다. 흥사단 미주본부를 이끌다 흥사단은 1913년 창단 이후 1920년까지 8년 간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하였고 1921년부터 이사부와 의사부, 심사부의 3부역원제가 실시되었다. 선생은 1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힌한시대[1889~1981]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03년 부모를 따라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부친의 강렬한 민족의식을 물려받아 3대가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독립운동 가족이다. 선생은 1913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멘티카에서 사탕무 농장을 경영하였다. 1916년 선생은 멘티카에서 부친을 도와 대한인국민회 멘티카지방회를 설립하면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해져 대한인국민회 주관으로 독립의연금 모금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때 한시대 선생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적극 동참하였다. 선생은 구미위원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공채를 구입하고 외교비 지원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24년 경 다뉴바 한인국어학교의 교장이 되어 한인 2세의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이후 딜레노로 옮겨 부친의 국어학교인 태극학교 설립 운영을 돕고 있던 중 1930년 딜레노지방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36년 선생은 재미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실행위원이 되어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고 부흥시키는데 앞장섰으며, 193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와 맞서 언어독립투쟁을 전개한 이극로 선생의 부인되시는 김공순 여사님께 편지를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극로 선생을 연구하면서, 김공순 여사님에 대해서도 글로 쓰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여사님에 대해 쓰게 되었습니다. 이극로(18931978) 선생은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1929년 1월에 귀국하여 우리 말글을 지키는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29년 10월 우리말사전을 편찬하고자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고, 위원장에 뽑혔습니다. 그해 12월 24일에 김공순(1907?) 여사님과 결혼하였구요. 그의 나이 37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여사님의 나이는 23살이었지요. 김공순 여사님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넘겨준 김창걸의 막내딸이었는데 김창걸은 이 일로 일제 경찰에 잡혀 희생되었습니다. 김공순 여사님은 평남 강서 진남포에서 출생했고, 평양여고와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시기 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지요. 이극로 선생은 다른 회원과 달리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만을 전담하고자 직업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한글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병조 선생(1877.12.23 ~ 1942.2.25)은 평북 용천(龍川) 출신으로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동년 10월 2일에는 평양에서 전국 각도 대표 24명이 모여 대한국민총회(大韓國民總會)를 조직하게 되자 향촌회, 부군회(府郡會), 도(道)대회, 국민총회 등의 대표들이 박인관(朴寅寬)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그는 양석진(梁錫鎭)채필근(蔡弼根)김태희(金泰熙) 등과 함께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송병조 선생 그러나 일경의 위협과 감시가 점차 가중되자 그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재무부 참사(參事)가 되었다. 1921년에는 한중 양국민의 친선과 대일항쟁을 도모할 목적으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유종주(兪宗周)윤기섭(尹琦燮)김홍서(金弘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기독교 목사 손정도(孫貞道)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 등을 중심으로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여 국내외 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