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의열단을 조직한 황상규 선생을 2015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황상규 [1890~1931] 선생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10대 말부터 노동야학과 사립학교 교사를 역임하다 1913년 이후 일합사,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1919년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 및 조선독립군정사 조직에 참여하여 재무책임자가 되었고, 처조카인 김원봉을 조력자로 삼아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할 청년결사대 조직인 의열단을 창단하였다. ▲ 황상규 독립투사 선생은 의열단의 국내 적 기관 총공격 거사에 직접 참여하고자 밀입국해 거사준비를 진행하던 중 1920년 여름에 잡혀 7년 징역형을 받았다. 1926년 봄에 출옥한 선생은 밀양의 지역사회운동에 진력하면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밀양지회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1929년 6월 중앙본부의 의결기구 및 집행부 간부가 되어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던 중 갑작스런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계봉우 [1880~1959] 선생은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나 1910년 함흥 영생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 선생을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북간도로 망명 후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신한독립사』, 『조선역사』, 『오수불망(吳讐不忘)』 등을 편찬하였으며, 북간도 연길 소재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로 활동하다가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 이동휘가 주동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건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건업신문」에 10회에 걸쳐 『만고의사 안중근젼』을 연재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선생은 하마탕 후하(後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다 1916년 11월 하마탕의 자택에서 일제 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 계봉우 선생 출옥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선생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북간도 대표의원으로 부임하여 1년간에 걸쳐 의정 활동을 하였고 이듬해 중한노공동맹연합회 국민회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유동열, 이탁과 함께 임시정부 간도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장석천 [1903~1935] 선생은 1903년 전남 완도군 신지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1918년경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차별과 인격적 모멸에 저항하여 보성고보로 전학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한 선생은 1926년 동맹휴학에 연루되어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지만 4개월 만에 광주로 돌아와 청년회 활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광주청년회는 시내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의 조직과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 결과 1926년 11월 초에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성진회'가 결성되었다. '성진회'는 이듬해 3월 해산되었지만 '성진회'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학교에 연구모임이 지속되었고, 1929년 6월에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광주청년동맹 집행위원이던 선생은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 결성을 후원하였고, 아울러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서 전남지역 단일 청년연맹 조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9년 11월 3일, 제1차 광주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한일 학생들 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종희 선생은 1890년 4월 19일, 전라도 금구현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정여립사건, 한말 동학 남접의 조직을 비롯하여 금산사를 배경으로 한 미륵신앙의 혁명적 사상과 역사를 토대로 민족의식을 키워나간 선생은 1919년 전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망명 후 1919년 조직되어 일본인 관리 암살 및 관청파괴를 주도한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하여 의열투쟁에 투신하였다. 1925년 북경에서 밀정 김달하 처단 거사에 참여한 선생은 1926년 1월에 광주로 이동하여 다른 10여 명 단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에 입학해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留#31925)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하면서 혁명운동의 열기를 만끽하고 새로운 운동의지를 다져갔다. ▲ 이종희 독립투사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한 선생은 남창 주둔 국민혁명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계속 활동하는 한편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청년 투사 양성 및 조직의 운동역량 강화로 의열단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1935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찬익 [1884~1949] 선생은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되기까지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한 선생은 20세가 되던 1904년, 서울의 농상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와의 마찰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보안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황무지개척 요구안에 반대투쟁을 하며 민족문제를 자각하게 되었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서북지역에서 계몽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1년 2월에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종교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대종교를 받아들이고 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에 온 힘을 다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남만주 지역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가해 독립군기지 건설에 앞장섰고 간민교육회ㆍ중광단에 참여하였으며 그 밖에 화룡현에 청일학교(靑一學校), 봉림동과 백초구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함은 물론, 신흥무관학교에서 중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에도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듯 오랜 기간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생은 해방 후에는 주화대표단을 구성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동포들의 귀국을 돕는 등 민족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19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자헤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고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해 약 10여년 궁중생활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 신분을 벗어난 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고,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다녔다. 졸업 후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하였다. 1919년, 간호부 근무 당시 31만세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자혜 선생 선생은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하고 선생도 직접 31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동 병원의 의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고,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났으며, 이후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에서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한 선생은 북경생활 1년여를 지낸 1920년 봄, 평생의 반려자 신채호 선생을 만나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윤병구 [1880~1949] 선생은 1903년 10월 5일,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정착하여 목회자로서 그리고 미주사회의 중심인물로서 한인사회의 화합과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이전,한성사범학교에서 헐버트의 영향으로 기독교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선생은 하와이 이민 후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하와이에서 조직된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 활동과에와친목회를 결성하여 일본 상품 배척 및 동포들의 친목과 권익보호를 위해 힘썼다. ▲ 윤병구 선생 1905년 7월 12일, 선생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러일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이승만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직접 청원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미국 정부는 일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묵인한 후였다. 1907년 8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특사로 활동한 이상설과 이위종이 이준 열사의 자결 후 뉴욕에 도착했을 때, 박용만의 주선으로 선생도 이들의 외교활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구국 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유럽순방외교를 떠난 후 약 6개월 후인 1908년 3월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양근환 [1894-1950] 선생은 1894년 5월 9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에서 태어나 18세에 사립 동명학교를 졸업하고 20세가 되던 1914년에 서울에 올라와 공업전습소를 다녔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선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한때 조선보병대에 입교하여 일본인과의 다툼으로 체포되어 50일간 구류를 살기도 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즉시 고향에 내려가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이 어려워지자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심하였다. 도항 후 일제에 대항할 힘을 기르기 위해 니혼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으나 가난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친일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 중 국민협회는 신일본주의를 내세우며 총독부를 적극 지지하였고 친일파 규합운동에 앞장섰다. 회장인 민원식은 내선일체론을 주장하며 참정권 운동을 주도했고, 1921년 2월 이를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하게 되었다. 선생은 민원식의 방문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921년 음력 2월 16일 도쿄역 호텔 제14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홍병기 [1869~1949] 선생은 1869년 11월 5일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홍익룡과 한익화 사이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무예를 닦아 19세 때인 1887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24세 때인 1892년에 동학에 입교한 선생은 손병희의 휘하에서 무장, 영동, 보은, 음성, 공주 우금치전투 등에 참가하였다. 1905년 12월 동학이 천도교로 바뀐 후 천도교의 중앙총부에서 천도교의 정책과 노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교직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선생은 1918년 말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을 알고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1919년 2월 10일 무렵 권동진을 만나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한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참석하여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참석하였고 독립선언식 거행 직후 곧 일본관헌에 체포되었다. 홍병기 독립투사 선생은 심문을 받을 때 판사가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운동을 할 것이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도연 [1894~1967] 선생은 경기도 김포(현 강서구 염창동)에서 아버지 김종원과 어머니 초계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나 7세 때부터 한학을 익히고, 우국인사들이 세운 태극학교(太極學校)에 입학해 근대학문을 배웠으며 졸업 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이후 1913년 일본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 3학년에 입학한 선생은 반도중학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졸업 이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들어가 일본 유학생의 중추 조직이었던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총무로서 학우회의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ymca 총무 백남훈을 도와 청년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동경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출옥한 뒤찍은 사진(김철수,윤창석,김도연,최팔용,백관수,송제백,서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한 동경유학생들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동경시내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하여, 약 2개월에 걸쳐 준비한 끝에 1919년 2월 8일 조선ymca회관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임의 명칭을 동경유학생 임시총회로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