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권득수 [1873~1907] 선생은 1877년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서 출생하여 파주군 적성에서 성장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충효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을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자 김정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충군애국 사상을 배양해 갔다. 권득수 선생 선생은 망국이 현실로 다가오던 을사조약 늑결 후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뒤 거사를 위해 적지로 판단한 양평으로 내려갔다. 이후 선생은 순국할 때까지 양평을 주근거지로 삼아 경기도의 양주와 포천, 그리고 강원도의 홍천, 화천, 춘천 일대에서 투쟁을 벌이게 된다. 양평으로 내려온 선생은 거사를 위해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소장수를 가장하고 양평, 양주, 이천, 지평 등지로 다니면서 장날을 이용하여 격문을 돌리며 200명이 넘는 장정을 규합하였다. 창의 후 선생은 양평의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양주, 이천, 지평 등지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선생이 거느린 의병은 한때 400여 명에 이르는 대부대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강원도 일대에서 병력을 보강하여 세력이 크게 강화되던 무렵 선생은 민긍호 의병을 비롯한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차정(朴次貞)선생은 1910년 5월 7일 경남 부산 동래 복천동 417번지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의 3남2녀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신(新)문물에 눈을 떠 한말 동래 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탁지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기사였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1월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어머니 김맹련은 5남매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삯바느질을 하는 등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동래군 기장면 출신으로 일찍이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선생과 의형제를 맺었던 약수(若水) 김두전(金枓全)과는 육촌 사이었고 김두봉(金枓奉)과는 사촌의 사이었다. 이 같은 집안의 가계로 보더라도 어머니 역시 강한 사상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 역시 이러한 주변 환경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1924년부터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던 선생의 항일의식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한국문화신문 = 이나미 기자 ] 흰 저고리 고름 날리며 / 일본 칸다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 칼 찬 순사 두려워 않고 / 2.8 독립읜 횃불을 높이든 임이시여 /그 불씨 가슴에 고이 품고 / 현해탄 건너 경성 하늘아래 /모닥불 지피듯 독립의 의지 불붙이며...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 들꽃 피다 2권에 나오는 김마리아 시 일부분- 김마리아 애국지사는 2.8 동경독립선언의 선구자이지만 그의 독립을 위한 헌신과 열정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이러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그린 이윤옥 시인의 노래에 이무성 한국화가가 그림36점이 제 96주년 3.1절을 기념하여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이쿠코) 에서 선보인다. 이번 시화전에는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김마리아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유관순 열사,무명지 잘라 혈서 쓴 항일의 화신 남자현, 해주 기생 출신의 옥운경, 평남도청에 폭탄 던진 당찬 임신부 안경신,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길러낸 억척 어머니 곽낙원, 압록강 너머 군자금 나르던 임시정부 안주인 정정화, 하와이에서 활동한 강원신 애국지사 등 모두 36명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가시와 그림으로 그날의 함성을 전한다. 일제의 침략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대표 48인으로 3.1운동을 전개한 박인호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83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며, 1904년 진보회를 조직하여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선생은 천도교 4세 대도주에 임명된 후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후 이 학교 출신들이 3.1운동과 6.10만세운동 때 크게 활약하였다. 박인호 선생 선생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1919년 전국 대교구에 등사인쇄기를 배치토록 해 독립선언서 및 격고문 제작을 후원하였으며, 천도교 대교당 건축 명목으로 특별 성미를 거두어 3.1운동자금으로 사용케 하였다. 또한,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조선독립신문' 발간에도 가담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소위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기소되어 2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상해와 북경의 천도교 전교실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운영자금을 제공하였다. 선생은 1926년 6.1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동하 선생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소식이 보도되자 국민회 원동위원들과 대동공보사 관련 인물들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논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선생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안중근과 우덕순을 하얼빈역까지 무사히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여 의거를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 일로 투옥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이후 러시아로 복귀하여 러시아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거로 체포된 유동하와 우덕순, 조도선 등은 심문과 재판과정 내내 관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과 위증으로 일관하였으며 안중근 의사는 시종일관 자신의 단독 결행임을 주장하였고 그 외의 관련자들도 사전에 약속한 내용만을 진술하였다. 1909년 10월에 들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할 것을 논의한 결과 명사수인 안중근 의사가 추천되었으며, 유동하의 부친인 유경집과 우덕순,조도선,김성화,탁공규 등이 구국혁신을 맹서하고 연서한 뒤7인 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동맹은 의거를 구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이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의 식솔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었다.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이주는 증조부 되는 윤재옥(尹在玉)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재옥이 43세 때인 1886년 부인과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본래 살던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를 떠나 두만강 건너편 자동(紫洞. 현재의 자동(子洞))에 처음 자리잡으면서,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생활은 시작되었다. 북간도 이민 초창기에 자동으로 이주한 윤재옥은 부지런히 농토를 일구어 주변에서 부자 소리를 들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동열 [1879~1950] 선생은 1879년 3월,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아버지 유종식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나 19살 때 사촌형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성성학교(成城學校)에 입학, 이를 계기로 군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선생은 대한제국 장교로서 노백린이동휘 등과 함께 비밀결사 효충회를 결성하여 친일파 대신의 암살을 계획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09년 대한제국 참령(소령)으로 군대를 떠났으며, 이후 서우학회와 신민회, 서북학회에 관여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북경으로의 망명했다. 이후 선생은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북경은 물론 국내각지에서 활동하다 1911년 8월 일제가 조작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신한혁명당,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후 선생은 중국관내에서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0년 광복군 창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수흥[1905~1929]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기 이천 출신의 대학자 이식의 후손으로 이천 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한때 입산하여 승려생활을 하였다. 1923년 19세 때 만주로 망명해 통의부와 참의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참의부는 국내 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1925년 일제의 기습 공격으로 고마령에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선생은 독립군 활동이 주춤해지자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들을 처단함으로써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1926년 5월 국내로 들어왔다. 선생은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자격으로 황해도 평산을 거쳐 경성에 잠입한 후 동소문파출소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안성 부호의 아들을 처단하고, 이천 현방경찰주재소와 백사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 이수흥 선생 일제 경찰은 선생의 신장이 5척에 불과하다는 단서를 잡고 관내에 거주하던 키 작은 젊은이들 조사하였다. 3천 여 명이 동원된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투쟁을 이어가던 선생은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선생은 3년의 예심 끝에 경성지방법원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춘곡 임치정(林蚩正, 1880. 9. 26 ~ 1932. 1. 9 )선생은 1880년 평안남도 용강군 산남면 홍문동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던 1900년까지 약 7~8년간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자원하여 아내를 고국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도미하였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선생은 사탕농장에 배속되어 노동자로서 미주생활을 시작하였다. 1903년 8월 7일 선생은 홍승하, 윤병구, 안정수, 이교담, 박윤섭, 문홍석, 임형주, 김정국 등 주로 기독교 감리교 출신 인사와 유학생들과 함께 구국정신 고취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정치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신민회 창립 후 선생 등은 동족단결, 민지계발(民智啓發), 국정쇄신을 강령으로 설정하고 홍승하를 회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같은 해 12월 2일에는 하와이 카우아이(kauai)와 카파(kapaa)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27일 이강이 국내로 파견된 것을 기점으로 이재명, 오대영이 파견되었고, 10월 24일에는 이재명의 매국적 처단 협조와 국내와의 통신연락을 위해 선생이 국내로 파견되었다. 선생은 1907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안공근 [1889~1940] 선생은 1889년 7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안태훈 진사와 조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1906년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 등에서 영어 및 일본어를 배우고 1907년 3월 경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후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거 직후 중국 대련에서 안중근 의사를 면회하고, 사형이 집행된 후 여순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망명을 선택하게 된다. 형 안정근과 함께 1910년 5월경 평양에서 북간도를 거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갔고, 안중근의사의 주요 활동지이자 단지동맹의 근거지인 연추로 옮겨가 안창호선생의 도움으로 정착하였으며, 1912년 6월부터 상트페테르브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으나 경비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4년 4월경에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형이 개설한 상점에서 일하던 중 1914년 9월에 김정국처단사건을 주도하였고 형 안정근과 함께 대규모 농장 경영을 통한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힘쓰기도 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