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원수 왜적은 우리 민족을 없애려고 배로 나르고 차로 날라 바다 속에 넣으려 하니, 우리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호라! 저들이 있고 우리가 없어지든 우리가 살고 저들이 없어지든 사생을 결단해야 하니, 이 형세를 장차 어찌 하리오? 전국의 신민이 모두 창의(倡義)하는 마음으로 뭉쳐 있으니, 4천년 역사와 5백년 종사, 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이는 구한말에 덕유산을 무대로 삼았던 의병장 문태수 [1880-1913] 선생이 1908년 2월에 발표한 격문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전력이 투입되어 구국의 성전(聖戰)으로 승화된 의병전쟁이 한창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결사항전을 각오한 선생의 굳은 신념이 생생하게 배여 있다. ▲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문태수 선생은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신기(장구지)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평이고, 본명은 태진(泰珍)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가 태수(泰洙) 혹은 태서(泰瑞)였다고 한다. 어려서 선생은 마을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 한학을 공부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17세 되던 무렵 태어난 동네에서 육십령 너머의 장수군 계북면으로 이사하였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순국열사 김마리아에게 고함 -황인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이제야 김마리아, 당신에게 고합니다. 당신은 잠자는 조선여자 깨워 횃불 들게 하시고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셨습니다. 역사학자인 박용옥 교수는 당신을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이며 여성운동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한국민 이윤옥 시인은 당신을 이렇게 찬미합니다. 세상을 구원한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처럼/ 닭 우는 소리 멈춘 동방의 조선 땅에/ 인자한 마리아로 나투시어/ 미혹의 나라를 밝히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08년 9월 20일 밤, 장흥 신풍에서 전투를 마친 강무경 의병장은 온 몸에 신열이 나고 피로가 엄습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평소 인연이 있던 영암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梁德寬) 집을 찾는다. 양 선비집에 도착한 강 의병장은 신음 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는데 이를 간호 해준 사람이 양 선비의 둘째딸 양방매(梁芳梅, 1890. 8.18~1986.11.15) 처녀다. 아버지 양 선비는 이들이 좋은 배필이라 여기고 이들의 혼례를 치러주었다. 강 의병장이 양 선비 집을 찾은 지 이틀만의 일이다. 강 의병장이 몸을 회복하기 무섭게 일본군의 대토벌작전 소식이 들려왔다. 강 의병장은 채비를 차리고 집을 나서야했으나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아내인 양방매가 따라나서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말을 하며 갈 길을 재촉했다. 여자가 나설 데가 아니라며 극구 말렸으나 양방매는 막무가내였다.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강무경의 부인 양방매는 남편을 따라 이렇게 항일전에 투신하였다. ▲ 94살 때 남편의 무덤을 찾은 양방매 애국지사(1984) 전북 무주 출신의 강무경이 심남일 함께 전남 함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시냇물이 모여 큰 강물을이루고, 티끌 모아 태산도 이룩한다하거든, 우리 민족이 저마다 죽기 한(恨)하고 마음에 소원하는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우리 조선은 세계 강대국들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문제가 해결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1919년 4월 5일 해주 만세 운동 때 쓰기위해 옥운경을 비롯한 해주 기생들이 직접 한글로 쓴 독립선언서 내용이다. "오늘 해주 기생(海州 妓生) 일동이 해주 종로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남문에서 동문을 경유하여 서문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해중월, 벽도, 월희, 향희, 월선, 화용, 금희, 채주 등이 다른 남자들과 함께 체포되다." 이는 <매일신보,每日申報> 1919년 4월 5일치 기록이다. 이에 앞서 1919년 2월 말, 문응순(예명 月仙), 김성일(예명 月姬)은 고종의 인산(因山, 태상황, 황제, 황태자, 황태손과 그 비 들의 장례)을 보기 위해 상경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고종의 인산을 보고 해주로 돌아왔다. 해주의 만세운동은 3월 1일과 3월 9일에 이어 4월 5일에 크게 일어났는데 이날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기생들은 옥운경, 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의열단을 조직한 황상규 선생을 2015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황상규 [1890~1931] 선생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10대 말부터 노동야학과 사립학교 교사를 역임하다 1913년 이후 일합사,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1919년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 및 조선독립군정사 조직에 참여하여 재무책임자가 되었고, 처조카인 김원봉을 조력자로 삼아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할 청년결사대 조직인 의열단을 창단하였다. ▲ 황상규 독립투사 선생은 의열단의 국내 적 기관 총공격 거사에 직접 참여하고자 밀입국해 거사준비를 진행하던 중 1920년 여름에 잡혀 7년 징역형을 받았다. 1926년 봄에 출옥한 선생은 밀양의 지역사회운동에 진력하면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밀양지회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1929년 6월 중앙본부의 의결기구 및 집행부 간부가 되어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던 중 갑작스런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계봉우 [1880~1959] 선생은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나 1910년 함흥 영생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 선생을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북간도로 망명 후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신한독립사』, 『조선역사』, 『오수불망(吳讐不忘)』 등을 편찬하였으며, 북간도 연길 소재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로 활동하다가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 이동휘가 주동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건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건업신문」에 10회에 걸쳐 『만고의사 안중근젼』을 연재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선생은 하마탕 후하(後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다 1916년 11월 하마탕의 자택에서 일제 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 계봉우 선생 출옥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선생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북간도 대표의원으로 부임하여 1년간에 걸쳐 의정 활동을 하였고 이듬해 중한노공동맹연합회 국민회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유동열, 이탁과 함께 임시정부 간도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장석천 [1903~1935] 선생은 1903년 전남 완도군 신지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1918년경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차별과 인격적 모멸에 저항하여 보성고보로 전학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한 선생은 1926년 동맹휴학에 연루되어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지만 4개월 만에 광주로 돌아와 청년회 활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광주청년회는 시내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의 조직과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 결과 1926년 11월 초에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성진회'가 결성되었다. '성진회'는 이듬해 3월 해산되었지만 '성진회'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학교에 연구모임이 지속되었고, 1929년 6월에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광주청년동맹 집행위원이던 선생은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 결성을 후원하였고, 아울러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서 전남지역 단일 청년연맹 조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9년 11월 3일, 제1차 광주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한일 학생들 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종희 선생은 1890년 4월 19일, 전라도 금구현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정여립사건, 한말 동학 남접의 조직을 비롯하여 금산사를 배경으로 한 미륵신앙의 혁명적 사상과 역사를 토대로 민족의식을 키워나간 선생은 1919년 전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망명 후 1919년 조직되어 일본인 관리 암살 및 관청파괴를 주도한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하여 의열투쟁에 투신하였다. 1925년 북경에서 밀정 김달하 처단 거사에 참여한 선생은 1926년 1월에 광주로 이동하여 다른 10여 명 단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에 입학해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留#31925)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하면서 혁명운동의 열기를 만끽하고 새로운 운동의지를 다져갔다. ▲ 이종희 독립투사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한 선생은 남창 주둔 국민혁명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계속 활동하는 한편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청년 투사 양성 및 조직의 운동역량 강화로 의열단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1935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찬익 [1884~1949] 선생은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되기까지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한 선생은 20세가 되던 1904년, 서울의 농상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와의 마찰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보안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황무지개척 요구안에 반대투쟁을 하며 민족문제를 자각하게 되었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서북지역에서 계몽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1년 2월에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종교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대종교를 받아들이고 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에 온 힘을 다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남만주 지역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가해 독립군기지 건설에 앞장섰고 간민교육회ㆍ중광단에 참여하였으며 그 밖에 화룡현에 청일학교(靑一學校), 봉림동과 백초구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함은 물론, 신흥무관학교에서 중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에도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듯 오랜 기간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생은 해방 후에는 주화대표단을 구성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동포들의 귀국을 돕는 등 민족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19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자헤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고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해 약 10여년 궁중생활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 신분을 벗어난 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고,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다녔다. 졸업 후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하였다. 1919년, 간호부 근무 당시 31만세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자혜 선생 선생은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하고 선생도 직접 31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동 병원의 의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고,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났으며, 이후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에서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한 선생은 북경생활 1년여를 지낸 1920년 봄, 평생의 반려자 신채호 선생을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