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향산 이만도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나 14세 때, 선대 고향인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돌아왔다. 하계마을은 퇴계의 학문을 가장 전형적으로 계승한 곳으로 조선 후기 걸출한 인재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다. 선생은 24세가 되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과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의 청직(淸職)을 지냈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여 파직당하기도 하였고,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같은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 향산 이만도선생 순국비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던 중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에 서상철이 거병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선생은 왕의 명령이 없는 거병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되자 선생은 거병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여준 선생은 1862년 죽산군 원삼면(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문을 공부한 선생은 성년이 되어 서울에서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등과 어울려 한학 뿐 아니라 신학문도 섭렵하였으며, 1896년 성균관 직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선생은 이상설, 정순만, 이동녕 등과 함께 황무지 개척권 반대 운동과 을사늑약 강제체결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호응을 끌어내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 선생은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교육계몽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회영, 이동녕 등과 함께 국외 망명을 계획하였다. 1906년, 계획대로 망명을 결행하였고 간도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선생은 이듬해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자 제2대 숙장을 맡아 서전서숙을 끌어나갔다. 그러나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감시와 방해로 폐교에 이르자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는 한편, 1908년 용인 원삼면 죽릉리에서 삼악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법린 선생은 1899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품은 선생은 1913년 영천 은해사로 출가하여 이듬해 항일불교의 중심사찰인 범어사로 승적으로 옮겼으며, 신식학교인 명정학교 보습과 및 구학교육인 강원과정을 배웠다. 이 때 스승인 국어학자 권덕규와 독립투사 서상일과의 만남이 후일 조선어학회 활동과 3.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되었다. 1917년 선생은 범어사의 인재양성 책에 힘입어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하였다. 이 시기 한용운 선생이 유심회를 조직하고, 불교잡지 [유심]지를 발간하자 선생은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하였으며, 한용운으로부터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같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국내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며 항일비밀결사 한국민단본부의 기관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하는 한편,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대지(1891~1942)선생은 1891년 경남 밀양군 밀양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선생은 부친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한학을 익히고 선비로서의 절개와 지조를 배웠다. 1905년 밀양지역의 반일독립투사의 요람인 동화학원에서 수학 한 후 민족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밀양에 청년회관을 건립하여 비밀결사 조직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밀양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항일독립단체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 만주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전개하던 중 검거되기도 하였다. 출옥 후 고향인 밀양에서 비밀결사조직을 추진하다 여의치 않자 만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 일봉 김대지 독립투사 1919년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동기부터 임시정부 의정원의원과 국무위원을 겸임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하였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안녕하세요. 저는 아이들과 더불어 꿈과 희망을 틔워가며 지내고 있는 교사입니다. 사실 선생님께 편지를 띄우면서 참 여러 생각이 깃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긴 역사를 볼 때 진리, 정의,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 발 딛고 선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솔직히 먹먹하고 비통한 마음을 크게 느끼고 있던 터였습니다. 세월호 참사라는 안타까운 일과 또 그 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홍원식 선생( 1877~1919 )은 경기도 수원 향남면 제암리에서 출생하여 대한제국 서울시위대 제1대대 서소문병영에서 근무하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 충남 등 각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1914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안종후, 김성렬 등과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신교육운동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만세함성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은 3월 1일 수원 방화수류정(용두각)에서 시작된 이후 3월 26일 송산면 만세시위를 계기로 조직적이고 격렬해졌다. 송산면 만세시위 군중을 저지하기 위해 발포한 순사부장 노구찌가 군중들에 의해 처단되었고 격렬한 시위는 3월 31일 발안장터로 이어졌다. 홍원식 선생과 안종후, 김성렬, 이정근 등이 주도한 발안장터의 1,000여 시위군중이 일본인 상점 등을 상대로 거센 투석전을 벌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제의 무자비한 발포와 탄압으로 이정근이 수비대장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는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 3일에는 발안만세운동과 연계한 우정, 장안면의 대규모 연합만세운동이 전개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석진 선생의 호는 오천(梧泉)이며,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한 김상헌의 11세 손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생부 낙균과 남원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60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홍문관, 사간원, 호조, 사헌부, 성균관, 규장각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면서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894년 이후 일제의 침탈과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격고 을미년의 변고에 하찮은 목숨을 버리지 못하였을 망정 어찌 차마 벼슬 길을 찾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연양리 사안당(思安堂)에 은거하면서 매일 의기를 참지 못하고 격앙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즉각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을사토역소(乙巳討逆疏)를 내어 조약에 찬성한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5적을 처단할 것과 각 공관에 성명을 내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할 것을 주창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을사늑약에 통분을 참지 못한 재야의 인사들이 자결, 순국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노병대(1856-1913) 선생은 속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삼남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체포되어 한 눈을 제거당하고 유형 10년을 받았으며, 다시 의병활동을 도모하다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단식 28일만에 순국하였다. 선생은 경북 상주군 화령면 관제리에서 아버지 노종주와 어머니 의성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기호 남인학자이며 당대 유림의 거두인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889년 34세에 창릉참봉이 되었다. ▲ 을사늑약 당시 대한문앞 일본군대 ▲ 경술국치날 통곡하는 국민 1882년 선생은 조선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무사를 모집하여 군란에 관련된 인물의 제거를 모의하였고, 1895년 10월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진사 허운 등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무너져 가는 조선의 현실 타개를 위해 적극 참여하였다. ▲ 을사늑약 조문 일부 1905년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낸 일본은 보호라는 미명 하에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선생은 통분을 삭히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가 거사를 간청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의열투쟁의 선봉장 이성구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선천면사무소 방화사건을 주도하여 징역 10년 형을 받았고, 병인의용대 소속으로 상해 일본영사관에 2차례 폭탄을 투척하여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 중 순국하였다. 선생은 1896년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고동읍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 기간 중 이수봉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선생은 이밖에도 이동농, 또는 김동농이라는 이명을 사용하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선생은 선천읍에 있던 선천면사무소 공격 방화사건을 주도하였다. 보안법위반 및 방화소요죄로 징역 10년의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병보석을 얻어 1923년 5월 형집행정지 석방되자 선생은 이를 이용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1923년 9월 상해 독립신문사에 입사한 선생은 2년 여 동안 식자공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 상황을 살피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다가 마침내 의열투쟁의 선봉에서 일제에 항거하기로 결심하고 1926년 1월 병인의용대에 참여하였다. 1926년 병인의용대에서는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 그림 이무성 화백 빗창으로 다구찌 도지사 혼쭐낸 제주 해녀 부춘화 이윤옥 물질하던 옷 벗어 말리며 가슴 저 밑바닥 속 한 줌 한을 꺼내 말리던 불턱에 겨울바람이 일고 있오 비바람 눈보라 치는 날 무자맥질 숨비소리 내뱉으며 거친 바닷속 헤매며 따 올린 처녀의 꿈 짓밟고 착취하며 검은 마수의 손 뻗치려던 도지사 다구찌 놈 보란 듯이 빗창으로 혼쭐내던 세화리 장터의 억척 여인이여! 그대의 분노로 저들의 야수는 꺾이었고 그대의 피흘림으로 조국 광복은 한발 앞서 이뤄졌나니 평화의 섬 제주를 찾는 이들이여! 세화민속오일장 한 접시 회 마주하고 부디 말해주소 해녀 부춘화의 간담 서늘한 애국 이야기를! ▲ 족자 그림 (38 x 118cm) *불턱: 해녀들이 물 밖으로 나와서 모닥불을 지피고 젖은 옷을 말리는 곳 *숨비소리: 해녀들이 작업하다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호오이하며 길게 내쉬는 숨소리 *빗창: 전복채취 때 쓰는 쇠갈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