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퍼문이라 더 크게 보이는 한가위 보름달, 저녁 8시 무렵북한산 위로 떠 오른 보름달 모습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갑오년 한가위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올해 한가위 보름달은다른 달에 견주어 크다고 하여 수퍼문(super moon)이라고 부른다. 달은 1년에 12바퀴와 1/4만큼의 공전주기로 지구를 돌고 있다. 이 때문에 1년이면 12바퀴와 약7.5일씩 더 돌고 있기에, 날짜 상으로 음력과 양력의 차이가 나서 우리의 음력명절과 양력의 계절은 차이가 난다. 매달 한바퀴씩 지구를 도는 달의 공전궤도가 완전한 원이라면 수퍼문도 없을텐데, 공전궤도가 타원형이므로 어떤 때는 가까이 왔다가 어떤 때는 멀어지는 것으로 공전주기는 매달29.5일이다. 달이 가까이 오는 때에 보름이 되면 수퍼문이 되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일반 보름달이 된다. 이러한 작용으로 어느 때는멀어지는 때도 있는데 이 때는 보름달이 왜 이리 작을까 하는 의심이들 정도로 작을때도 있다. 올해 한가위 보름달은 달이 지구를 도는 공전궤도상가장 가까이 있을 때 보름이 되었기에 수퍼문이 된 것이다. 올해 한가위 보름달은 수퍼문이어서 더욱 크게 보여, 분화구까지 생생하게 보인다. 저 모습
▲백마강 건너편 부소산 왼쪽 산 기슭에 고란사가 있다. ▲ 부소산에 안겨있는 고란사 ▲ 갈대숲 너머로 고란사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 고란사 앞으로 백마강을 따라 백로가 날고 있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백제의 마지막 왕도인 부여는 주변에높은 산은 없고,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여있다. 부여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진 땅으로 백마강이 감싸도는 땅이기도 하다. 공주가 산에 갇혀있는 곳이라면 부여는 산보다는 평야와 강이 있어 교통도 편리하고 수확물도 풍성하여 공주에서 아버지를 잃은 위덕왕이 큰마음 먹고 왕도를 천도하여 아버지가못다이룬 백제비상을 꿈꾸던 곳이다. 이러한 역사의 도시부여는 600년 역사를 간직한백제의 마지막 왕도로 영원히 기억되는 곳이지만애잔함도 동시에 서려 있는 곳이다. 그 가운데서도부소산 북측에 자리한 작은 암자인고란사는 백제의 애닲은 넋들을 달래는 절이다. 사찰의 창건연대는 여러 설이 있으나 백제말기 또는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옛 정취의 건물은 없고 현재 당우(불교 전각건물을 높여부르는 말)들은 1930년대 지어진 것이다.건축연대는 오래지 않지만 백제인의 한을 달래며 그 영혼들이 극락왕생
▲ 전주지역의 가장 큰 효자동공원묘원으로 근세에 전주시가 조성한 묘지공원으로 자연 구릉지에 수많은 무덤이 있다. 이곳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달동네같은 곳으로 무질서하지만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 효자공원 중에서도 구릉지를 잘 다듬어 층단지게 꾸며놓은 묘원지역이다.이곳은 1980년대에 조성하여 질서가 느껴지는 지역으로 살아있는 사람들로 치면 대단위 아파트지역이다. 무질서한 묘지지역보다 돈을 더내야 묻힐 수 있다. ▲ 잘 정리된 묘역을 전주시가 묘지 이전 정책이라 이유를 들어 묘지 이장을 요구하고 있다. 일부 이장한 무덤의 팻말이 보인다. ▲ 공원묘지 인근에는 납골당들이 들어서고 있다. 공원묘지에 묻혀있는 고인들을 다 저곳으로 이전하라는 듯.. 성업 중이다. ▲ 전주시에서 설립한 효자공원묘지 입구에 세운 납골당, 답답한 느낌이다. 공원묘지에 안식을 취하는 조상들의 묘를 파묘해 가라는 공지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한민족의 최고명절 한가위가 다가온다. 한가위는 수확의 계절이 문턱에 왔음을 실감나게 하는 우리의 명절이다. 옛날 농경을 위주로 살던 나라에서는 가을 추수철이 되면, 추수한 첫 수확물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곡식과 과일
▲ 백팔계단을 땀을 흘리면서 오르는 어머니와 아들 ▲ 마애불의 정면, 손의 모습은 선정인과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 좌정한 마애불 ▲ 마애불에서 내려다 본 백팔계단과 북한산 계곡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북한산(삼각산)에는 많은 절과 암자들이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승가사의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사진으로 소개한다. 승가사는 서기 756년 경덕왕 때 수태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고려 숙종 때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왕을 모시고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 그만큼 영험이 있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는데 조선시대에는 불교탄압으로 스님들의 한양성 출입도 되지 않았으나, 이곳은 도성을 벗어난 곳이라 무사했다. 특히 한양을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 4개의 사찰 중에북쪽에 위치한 승가사는많은 신도들이 당시 찾아와 기도하던 절이다. 승가사의 보물인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높고 험한 바위 위에 부처님을 새기고 그 부처님의 머리 위에는 돌로 처마를 만들어끼웠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있는 곳을 보호하기 위하여 바위에 구멍을 뚫어 기둥을 세우고 보궁을 세웠던 흔적도확연하다. 지금은 마애석가여래불 이외에도 석조승가대사상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일출이다. 두물머리란 강원도 삼척 대덕산에서 발원한 샘물이 영월을 거쳐 충청도 단양 도담삼봉을 지나고,제천 충주를 거치는 동안 충주호에 잠시 머물렀다가 여주 신륵사와 영릉을 거쳐양평을지난다. 이어, 설악산 봉정암 오세암 백담사를 돌아온 물줄기에서 발원한 물이인제 홍천을거친홍천강과 합하여남한강이 되었고, 북한 금강산에서 발원한 물이 북에서는 임남댐을 거쳐 화천 평화의 댐을 거치고, 강원도에서 인제에서 발원한 물은 소양댐 소양강을 거쳐 춘천에서 합류하여 호반의 도시 춘천을 돌아의암호에 잠시 머물고, 겨울연가로 세계적인 명소가 된 남이섬을 돌아 가평 청평을 거처 이곳에서 만난다. 그리하여 두물이 만나는 곳을 우리말로 두물머리라한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서 행정 명칭 한자로 양수리(두물머리=두물이 만나는 곳)이 되고 이곳에서도 또 팡당댐에 머물러 수도권 시민들이 마시고 살아가는 생명의 물이 되었다가 흐르고 흘러 구리 하남서울을 감싸고 돌아서 김포강화 앞에서는 임진강과 만나서 서해로 빠져 나간다. 한국인의 절반이 사는 수도권의 젓줄인 한강. 그
▲ 벼도 알곡을 맺고 고개를 숙이는 가을하늘도 쾌청합니다. ▲ 들깨밭도 열매맺기 시작하고 ▲ 활짝핀 들깨 송이들 ▲ 요즈음 당뇨병에 특효라고 인기있는 여주 ▲ 더덕 넝쿨도 초록빛을 벗어나고 ▲ 소담스러운 더덕꽃 ▲ 억새도 꽃을 피우고 ▲ 도꼬마리도 열매를 맺고 있네요 ▲ 김장을 위하여 이제 막 심은 끝없는배추밭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어느덧 성큼 다가온 가을! 하늘은 청자빛으로 물들고 들판의 곡식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갑니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계절의 시계 앞에 들판의 초목과 곡식들은 어김없이 자신들의 앞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봄에 심은 곡식들은 추수를 기다리고, 가을 김장 무, 배추는 이제 자라기 시작 하네요.. 다만 사람들만이 철모르고 한낮의 더위에 여름인듯 착각하다가 한가위가 다가오니 문득 정신차리며 세월가는 것만 아쉬워만 하는 듯 하네요.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 세종대왕동상 뒤에 가득한 경찰들. 메아리가 사라진 광화문광장!! 메아리가 되지 않고 외침만이 지속되고 있다. ▲ 광화문 광장의 주변에 집회 참석자보다 더 많은 경찰들이 장막을 치고 있다. ▲ 세종대왕동상 앞에서 더 이상 전진이 용납되지 않고 있다. ▲ 이순신장군 동상 뒤에 모인 참가자들 이순신장군처럼 공평하고 정대한 지도자가 나오길 고대한다. ▲ 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자리에는 약자들의 대표격인 지체장애인들이 앉아있다. ▲ 기존에 있는 법으로 안되고 왜 꼭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인가? 귀 기울여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 진실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는 광화문의 만인공동회 연사로 나선 사람.. ▲ 진실을 알아야 잘못한 사람들을 처벌도 할 수 있고 잘못에 대하여 시인을 해야 용서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가족들. ▲ 국민적 열풍이 된 단식...그 진원지는 광화문이었다. ▲ 국민서명에 참여한 젊은이들. 근래 보기 드물게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특히 여성들이 2/3는 되어보인다 ▲ 함께 해주는 것이 힘이된다며 종이배를 접고 있는 동참자들. ▲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서라도...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 동북공심돈 원경과 궁사들의 과녁 ▲ 동북공심돈 원경 ▲ 동북공심돈을 찾은 중국관광객들, 꽤 많은 어린이들도 부모들과 성곽을 둘러보고 있다. ▲ 동북공심돈의 원경 ▲ 동북공심돈을 가까이서 본 모습 지붕이 잘 보이지 않는다 ▲ 동북공심돈의 망대창 ▲ 공심돈 외벽에 난 총안 ▲ 동북공심돈 출입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의 북쪽, 동북노대(東北弩臺)의 서북쪽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군사시설로 비교적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맨 위에 올라서면 화성 전체의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이전에는 없던 형태와 재료로 기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화성성역의궤에 그려진 도면에 따라서 다시 중건된 것이다. 외부는 구워만든 벽돌로 둘러싸고, 내부는 돌음계단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맨 위에 한옥으로 된 망대에 오를 수 있으며, 외벽의 벽 위에서는 군데군데 망을 볼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 또한 총도 쏠 수 있는 구멍들이 뚫려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기획에 의하여 정약용이 총감독으로 세워진 근세 조선의 특이한 형태의 성곽이다. 화성은 이전에
▲ 연무대 전경 넓은 마당에서 무술을 겨루고 연마했다. ▲ 연무대 정면 ▲ 연무대 측사면 ▲ 연무대 현판 ▲ 출입문에서 본 연무대 ▲ 연무대 출입문 ▲ 연무대 창고, 병사들의 무술연마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연무대 내부 건축구조 ▲ 연무대 기단부 ▲ 연무대 상징기가 펄럭인다. ▲ 연무대 옆문에서 본 동북공심돈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뒤,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하여 세운 화성은 실권을 잃은 조선 후기 임금이 임금다운 임금이 되기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당시 임금은 세습에 의하여 대물림이 되었으나, 임금의 아들이라고 무조건 저절로 임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왕자지만 당시 기득권 세력들의 힘에 기대야 살수 있었고, 임금의 종친보다는 외척들의 비호하에 외척과 권신들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지 않으면 생명조차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임금은 임금이로되 집권세력들의 살벌한 기운이 언제나 대궐의 주변에 뻗어있었고, 집권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다른 파벌에게 빼았기지 않기 위하여 자기들 끼리만 더욱 더 파당을 짓고 잇권을 나누어 가졌다. 그리하여 집권세력들은명
▲ 복원한 허균, 허난설헌 생가. 신분과 계급이 먼저인 사회에서는 아무리 큰 뜻이 있어도 용납되지 않았다. ▲ 허균 ,허난설헌의 옛집 안채 ▲ 안채의 다른 모습 ▲ 안채의 뒷모습 ▲ 안채 모습. 건물이 지붕을 서로 맞대고 있는 'ㅁ'자 모습이다. ▲ 옛 대문 ▲ 허균과 허난설헌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전시관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기념관은 강릉시 초당동 477-8 번지 경포대 근처에자리하고 있다.이들은 500년 전허씨 5문장가의 인물로 5문장가란 허균의 아버지 허엽과 허균의 형제 허봉, 허초희, 허성을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잘 알려진 인물이교산(허균)과 난설헌(허초희)이다. 허균은시대를 앞서간 탓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허초희 또한 남녀차별의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나 자신보다 못한 남편을 섬기며뛰어난기량을 맘껏펴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아깝게 생을 마감했다. 허균은 1569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상관찰사를 역임한 허엽의 정부인에게서세째아들로 태어나 당시 사회에서는신분상 하등의 지장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이달)은 서자출신이었고, 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