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현 하기시(山口縣 萩市) 를 찾은 것은 죠카마치(城下町)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죠카마치란 일본국어사전에서 “전국시대로부터 에도시대에 걸쳐 다이묘(大名)의 거성(居城)을 중심으로 한 도시”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쉽게 말해서 오래된 일본 전통가옥을 구경 할 수 있어 고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죠카마치는 하기시 말고도 성주(城主)가 살던 곳은 어디에나 있으며 지금은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지방정부에서도 이들 고건축물을 복원하고 당시의 거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등 관심이 많다. 무사 시절에는 북적였는지 모르겠지만 인구 5만의 하기시는 조용하다 못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처럼 고요했다. 하기시내를 전망 할 수 있는 지월산 등산로에서 만난 노년의 아저씨는 천년고도 교토가 찾아드는 관광객으로 번잡해졌다면서 더 조용한 곳을 찾아 하기시로 이사 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 냄새가 물씬 풍기면서도 번잡스럽지 않은 곳이 하기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전통가옥을 살피다가 뜻밖에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으니 그 이름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였다.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토기념관과 고택에 이르는 곳에는 이토의 밀랍인
사가성혼마루역사관(佐賀城本丸歷史館)을 찾아가던 날은 볼을 스치는 2월의 바람이 아직 쌀쌀했다. 후쿠오카 옆 도시 사가현은 일본열도의 남쪽 지방이라고는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조용한 중소도시의 한적함이 한눈에 느껴지는 사가 시내는 자동차들의 속도도 느리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그다지 바쁘지 않다. 사무라이 시절 성주가 살던 사가성(佐賀城)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조선시대 원님이 살던 곳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금은 새로 말끔하게 단장하여 역사자료관으로 쓰는 사가성의 본관 건물 안에는 때마침 꽃꽂이 전시회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일본에서는 사철 꽃꽂이 전시회가 열리지만 특히 1월과 2월에는 신년 축하 의식으로 이르는 곳마다 꽃꽂이 전시회가 한창이다. 흔히 이케바나(いけばな, 生け花、活花、揷花)라고 불리는 일본의 꽃꽂이는 다른 말로는 카도(かどう,華道, 花道)라고 한다. 일본말로 ‘카도(華道)’라고 부를 때에는 꽃꽂이보다는 넓은 범위로 ‘구도(求道)’의 냄새를 풍긴다. 이케바나에는 여러 유파(流派)가 있으며 양식이나 기법 따위가 유파별로 각양각색이다. 일본 이케바나의 유래는 불교에서 꽃을 바치는 공화(供花)에서 그 기
*2011년 11월 9일부터 수원일보에서, 2012년03월07일부터는 제주해피코리아뉴스에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국내외로 뛰어 다니며 그동안 사회에서 조명 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내어 한분 한분께 드리는 '헌시'를 짓고 이분들의 일생을 요약하여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라는 책으로 엮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남성 독립운동가들은 12,000여명이 훈포장을 받았지만 여성들은 200여명 밖에 훈포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200여명의 이름조차 모르는 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하면 '유관순열사' 외에는 더 이상 모르는 우리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변에 널리 소개하여 이분들의 헌신적인 삶을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저의 작업은 200여명을 모두 알리는 그날까지 이어 갈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청주에 사시는 분이 여성독립운동가의 자료를 보내 오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가지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제게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분들은 저를 불러 주십시오. 서간도의 북풍한설 속에서 오로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생을 건 이분들의 삶을이해하고 고난극복의 숭고한 정신을 함께 나누
조선의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寺內正毅,1852-1919)는 동양 3국의 고문헌 18,000여 점을 끌어모아 고향인 야마구치에 가져갔다. 그가 죽자 아들 수일(壽一)이 그 장서를 모아 1922년 고향인 야마구치시에 데라우치문고를 설립하게 된다. 부자로 이어지는 문화재 약탈의 전승이다. 데라우치가 조선관련 문화재를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 취임 때부터이다. 그의 곁에는 책 전문가인 고도소헤이(工藤壯平,1880-1957)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데라우치는 그를 조선총독부 내대신비서관(內大臣秘書官) 등의 자리를 주어 고서묵적(古書墨蹟)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규장각 등의 고문헌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했다. 군인 출신의 무식한 데라우치를 도와 고도소헤이는 값나가는 유구한 고서들을 데라우치 손에 넘겨주었다. 지금 야마구치현립대학 도서관에 있는 데라우치문고 (1957년에 데라우치문고는 야마구치현립여자단기대학에 기증했다가 현재는 야마구치현립대학 부속도서관 소속으로 바뀌었다)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양심 있는 일본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이외수 선생의 ‘닭도리탕=토박이말’에 한 표 [진단] 닭도리탕 어원도 모르는 한심한 국립국어원과 조선일보 이윤옥 최근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트위터에 “닭도리탕은 일본식 이름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도 트위터를 통해 “닭도리탕의 도리는 일본어 'とり(새)에서 온 것으로 보고, 이를 닭볶음탕으로 다듬었다. 도리의 어원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분명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밝혀 일부 언론에서는 이외수 선생이 망신당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일본말찌꺼기를 연구해온 필자는 이를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다음에 두 가지 쟁점으로 살펴 나눠본다. 쟁점(1) 이외수 선생이 주장하는 ‘도리=토박이말’에 대하여... 작가 이외수 선생은 일본말 도리(tori,とり)를 새(또는 닭 ‘니와도리지만 도리라고도 함')로 보지 않고 우리 토박이말로 보는 근거로 닭을 ‘도려내어(토막 쳐) 만든 요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이 틀렸다기보다 이 말의 근거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닭도리탕을 만들려면 닭을 토막 내야 함은 상식이다. 통째로 인삼을 넣고 고아 먹는다면 삼계탕으로 간단히
조선일보는 구로다 망언 부추기지 말라 [논단] ‘오뎅’을 어묵으로 부르는 것이 어찌 ‘언어 내셔날리즘’인가 이윤옥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츠히로(黑田勝弘, 71) 씨의 조선닷컴 글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 붓을 들었다. 조선닷컴(인터넷판 조선일보)에 소개된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는 “한국의 애국자들은 오뎅이라는 일본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뎅을 어묵꼬치로 바꿔 부르고, 일부 포장마차에서도 메뉴판에 그렇게 쓰고 있다.”며 상대가 일본이 되면 한국은 언어 내셔널리즘으로 고생한다고 했다. 이어 “와사비는 고추냉이로, 낫토는 생청국장이라고 바꿔 말해야 한다며 일본어를 거부하는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까다로운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먹을거리에까지 일본을 트집 잡는 사람은 이제 옛날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담긴 글을 인용하여 “조선닷컴 토론장 2012-02-17”에는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러한 구로다 씨의 말은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말이라고 제쳐 놓겠지만 그가 주장하는 ‘언어 내셔널리즘’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구로다 씨의 한국인 추종자들을 위해 두 가지만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1) 올해로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3돌이다. 그 뜨거운 함성으로부터 약 100년 가까운 세월에 이르고 있지만 한일관계는 매끄럽지 못하고 찜찜하기만 하다. 오만한 식민역사의 반성은커녕 일본이 한국땅 독도에 품은 검은 야욕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 가지고야 어찌 사이좋은 ‘이웃’임을 말할 수 있으랴! 지지난 주에 이어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를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문화재 약탈이야기를 모두 4회에 걸쳐 실어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오만의 역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3) -고려불화의 90%는 일본에 있다- “한국인들이 가장 간절하게 반환을 원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천리대학(天理大學)에 있다. 또한, 13~14세기 고려불화는 90%가 일본에 있다.” 위 이야기는 양심 있는 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유실된 조선 문화 유산 -식민지 하에서의 문화재 약탈, 유출, 반환·공개 책 20쪽에 나와 있는 말이다. 이 책에는 구체적으로 약탈된 조선의 문화재 행방을 소개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문화재는 고
일본열도를 뒤덮는 “히나인형”의 의미 슬슬 한 쌍의 인형이 일본열도를 뒤덮을 시간이다. 그 한 쌍의 이름을 히나인형(ひな人形)이라 부른다. 히나인형은 남자와 여자 형상을 한 부부금실이 좋은 원앙처럼 꼭 쌍으로 만드는데 그 재료는 실로 다양하다. 도자기의 고장인 아리타(有田)나 이마리(伊万里)같은 곳에서는 도자기로 만들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식으로 응용해서 창작 히나인형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비단옷을 겹겹이 입혀 헤이안시대의 화려한 왕실을 나타내기도 한다. 규모도 왕과 왕비를 나타내는 달랑 한 쌍의 인형을 만드는가 하면 층층시하 상궁과 하녀, 악사와 잘 차린 음식까지 표현한 히나인형도 있다. 인형을 즐기는 층도 다양해서 개인이 사다가 집에다 모셔 놓기도 하지만 호텔로비나 기념관 등에 대규모 히나인형을 전시하는 곳도 있다. 아예 웬만한 도시에서는 히나인형을 전시하는 기간을 한 달씩 잡고 전국 구경꾼들의 발걸음을 끄는데 이름하여 히나마츠리(雛祭り)다. 이날을 위해 수백 년 가업으로 히나인형을 만들고 만든 인형을 전시하여 마을을 관광도시로 만든다. 히나인형을 새겨 넣은 과자며 액세서리 소품을 만들고 앞다투어 히나인형을 활용한 이벤트를 여는 등 일본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2) - 오구라가 약탈해간 조선 유물들 - 오구라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가 게걸스럽게 긁어모은 한국의 값나가는 유물들은 그의 사후 보존회에 의해 보존되다가 1982년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유물은 일본의 중요문화재 8점, 중요미술품 31점을 포함한 1,110점이다. 세목을 살펴보면 조각 49점, 금속공예 128점, 도자기 130점, 칠공예(漆工藝) 44점, 서적 26점, 회화 69점, 염색작품 25점, 토속품 2점, 고고시대 유물 557점이다. 시대별로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전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특히 고고유물(考古遺物)은 낙랑시대와 삼국시대의 고분출토품인 기와류와 통일신라시대의 귀중한 금속공예와 토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고분출토품’이라는 말인데 고분이란 주로 왕릉이나 고대 통치자의 무덤을 말한다. 국보급 문화재를 싹쓸이해간 것도 용납할 수 없거늘 신성한 왕릉을 파헤쳐서 문화재를 약탈해갔으니 그 패륜적 행위를 어찌 말로 다하랴! 《잃어버린 조선문화유산, 동경 고려박물관 발행》18쪽에 보면 “오구라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1) 동경 우에노공원(上野恩賜公園) 안에 있는 동경국립박물관은 일본 최고(最古)이자 최대 박물관이다. 본관, 동양관, 법륭사보물관 등 5개의 전시관과 자료관을 갖춘 곳으로 소장품 수만도 11만 건을 넘으며 국보 87건, 중요문화재 622건(2009. 3. 31 현재)을 보유하고 있다. 이곳에 한반도에서 약탈한 오구라콜렉션이 자리하는데 총 1,111점이 전시되고 있다. 오구라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는 1903년에 조선에 건너와 대구에서 전기사업권과 금융업으로 일약 부자가 된 이래 조선의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는 도굴품도 개의치 않고 사들인 사람인데 그의 광적인 유물 수집은 도굴꾼과 꿍짝이 맞아 소중한 가야 시대 고분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는 불행을 만들었다. 오구라는 하나 둘 손에 거머쥔 문화재가 값나가는 것이라는 평을 듣자 그 야심을 조선 전역에 뻗치게 되는데 정당하게 문화재를 입수하지 못할 때는 협박과 공갈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금속문화재 수집가로 알려진 김동현 씨는 오구라의 공갈과 협박을 무릅쓰면서 우리의 문화재를 고집스럽게 지켰는데 그가 지킨 문화재는 지금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