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신팔균(申八均, 1882. 5. 19(음)~1924. 7. 2) 장군은 1882년 5월 19일(음) 서울 정동 현재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신석희(申奭熙)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 내부협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부 신헌(申櫶)은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 등을, 고조부 신홍주(申鴻周)는 순조(純祖)때 훈련대장을 지냈다. 특히 조부는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측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흑전청륭(黑田淸隆)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고 1882년에는 미국의 r. w 휴페펠트와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최초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명문가(名門家)에서 출생한 장군은 천성적으로 무관(武官)의 기질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유학(儒學)과 고금병서(古今兵書)에 능통하였고 성품이 청렴(淸廉) 강직한데다가 문장 또한 비범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육군 무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하여 군사교육훈련을 받은 후 1903년 9월 육군 참위(參尉)로 임관하여 시위연대 제3대대에서 복무하였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석농(石農) 오영선(吳永善,1886~1939 ) 선생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사위이다. 어려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으며,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되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 온 선생은 1909년 이동휘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 그리어슨 선교사가 함북 성진군에 세운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소위 이동휘의 교육생이 되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북간도로 옮긴 오영선은 간민교육회가 1911년 3월 연길현 국자가에 세운 광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14년 2월에는 간민회 의원에 선출되어 간도 한인의 권익 옹호에 적극 나섰다. ▲ 오영선 독립지사 오영선은 1914년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이동휘가 길림성 나자구에 세운 대전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대전학교가 폐쇄되자 1917년 1월 이동휘와 훈춘의 대황구로 옮겨 북일중학교를 설립, 교사로 재
▲ 《백년편지 1》 표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펴냄 [우리문화신문=김영조기자] 할머니, 오늘, 임시정부 생일을 맞아 할머니께서 남긴 책 《장강일기》를 펼쳐 들어요. 다시금 읽어도 할머니 품에 안겨 처음 만났던 생동하는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어요. 이는 《백년편지 1》 첫 편지글의 한 토막으로 독립운동가 김의한・정정화 선생 손녀 김선현 씨의 글 이다. 그런가하면 《백년편지 1》에 실린 60통 편지 가운데 마지막 글은 80여 년 전 이역만리 중국대륙에서 영화 황제로 등극하셨으면서도 돈과 부귀영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항일영화, 민족영화에 투신하신 선생님 앞에 부끄럽습니다.라는 글로 이는 동양예술극장 유인택 대표의 편지 일부이다. 《백년편지 1》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주최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년(2019)을 맞아 지난 2010년 4월 13일부터 2019년 4월 13일까지 일반인들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쓴 편지글이다. 이 편지는 편지 대상에게 직접 발송하는 편지가 아니라 디지털 공간이라는 우편함을 통해 올린 글로 2010년 백년편지가 시작된 이래 지금(2016.3)까지 235통이 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먼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 후손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 독립 투쟁을 하시다가, 기어히 중국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시고 조국 대한민국에 신명을 바치신 의사님 영정앞에 깊은 존경과 사모의 마음을 올립니다. 저는 월간 저널 [영웅] 발행인 박창재입니다. 지난 3월 26일은 의사께서 순국하신지 꼭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는 오늘 이 편지를 의사님께 올리면서,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처단하시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시면서 남기신 의사님의 최후의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에 대하여 그 뜻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기어 보려합니다. 작년, 2015년 여름의 막바지는 한반도 전역을 뒤흔드는 천둥과 폭우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온 국민이 숨죽여야 했습니다. 이 천둥과 폭우는 다름 아닌 북측이 설치한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로 우리 측 군인 2명이 부상을 입으며 시작된 남북간 긴박했던 대치상황을 말합니다. 다행히 양측 고위급 접촉을 통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연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달렸다. 열차 안 중국인들은 해바라기 씨를 씹으며 무료함을 달랬지만 조선인 피를 받은 기자는 하얼빈이라는 세 글자가 찍힌 차표를 손에 쥐고 열 두 시간 내내 가슴이 아렸다. 이 길을 안 의사님도 열차로 달렸으리란 생각에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조국이 무엇이기에,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던진단 말인가! 2년 전 기자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끝 모를 대륙의 열차 안에서 그렇게 안 의사의 삶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안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역사 1번 플랫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지금도 하얼빈 역에는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한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거사 이후 안 의사는 곧바로 체포되어 뤼순감옥으로 떠나는 11월 1일까지 하얼빈에서 11일간 머물렀다. ▲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쪽 유리창에서 바라다 보이는 이토히로부미 처단 현장, 열차 앞 부분 바닥에 표시가 되어 있다. 2014년 준공한 하얼빈역사에 있는 안중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존경하는 신명균 선생님, 저는 선생님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일제의 멸망을 보기 전에 돌아가시다니,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선생님이 지킨 우리 말글은 광복 71주년이 되는 올해에도 당당히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민족 문화의 상징인 성과 이름을 말살한 일제에 맞서 순국한 선생님의 노선을 계승하여, 현재 우리 민족은 우리의 성과 이름을 당당히 쓰고 있고, 한자와 한자말이 아닌 순우리말과 한글로 지은 이름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저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조선어학회 사건 예심 판결문을 통해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판결문에 선생님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신명균 선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학회의 사업을 추진하였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추적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결과를 얻어내었습니다. ▲ 신명균 선생의 모습(1927년 보성전문학교 졸업앨범) 신명균 선생님은 주시경의 직계제자로 우리말과 글을 수호하는 국어학자로서, 독도(뚝섬)공립보통학교와 동덕여고보에서 교육에 종사한 교육자로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백정기(白貞基, 1896. 1. 19(음)~1934. 6. 5) 의사(義士)는 1896년 1월 19일(음)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농가(農家)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구파(鷗波), 자(字)는 용선(溶善)이며, 수원 백씨(水原白氏)이다. 어릴 때 엄친(嚴親)을 여의고 편모(偏母) 슬하에서 성장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과는 달리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여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독학(獨學)으로 공부를 하였으며 의리가 강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어린 소년의 가슴에 항일의식이 싹트다 의사(義士)가 15세가 되던 1910년에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어린 소년의 가슴에는 울분과 굴욕감을 가져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일념(救國一念)이 싹트고 있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항일의식은 이미 10대 소년시절부터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며 일제를 타도하는 일에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하였다. 시대적 갈등과 마찰 속에서 스스로 고민에 빠지곤 했던 의사는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정읍(井邑)같은 시골에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에는 사람도 있고 문화도 있고 기댈 곳
[우리문화신문 = 이한영 기자] 세브란스 병원 암병동에서 본관으로 연결 된 통로 벽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의 의사들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무심히 지나면 그저 의사에 지나지 않을 인물들이지만 꼼꼼하게 찬찬히 살펴보면 이들에게서 오늘의 의사와 다른 점을 살필 수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는 사실이다. ▲ 이태준 독립운동가 먼저 이태준 (1883-1921)을 보면 독립운동을 위해 몽골로 망명하여 국왕의 주치의로서 몽골인의 질병퇴치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울란바토르에 기념공원이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 박서양 독립운동가 그런가 하면 박서양(1885-1940)은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은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북간도에서 독립군 군의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 김필순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김필순(1878-1919)은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의학서를 번역 했으며 중국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이 건립되던 시절은 아직 일제의 마수가 뻗치기 전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용정의 3.13 만세운동에 희생된 이들에게 이한꽃 나는 보았네 그대들 무덤에 꼿꼿이 세운 빗돌에 새겨진 붉은 맹세를 나는 들었네 열일곱 꽃다운 그대들 독립을 향한 절규의 목소리를 나는 맹세했네 결단코 두 번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아무도 찾지 않는 그대들 외로운 무덤가에 서서 굳게 굳게 맹세했네 ▲ 간도 독립운동의 대부(大父) 김약연 선생 1919년 3월 1일, 조국의 산하에서 일제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이 자주민임을 선포한 우리겨레의 함성은 중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포사회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물론 고국의 31 만세 운동 이전부터 중국 각지에는 항일우국지사들이 모여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지만 특히 고국의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3월 13일에 간도 용정에서는 타오르는 불길 같은 만세운동이 있어났다. 간도의 3.13 만세운동 1년 전인 1918년에는 간도의 대부(大父) 김약연 선생을 중심으로 여 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등 38인이 고국의 31독립선언서보다 빠른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한 기틀 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선생님! 입춘도 지났고 꽃피는 춘삼월이 다가오지만 아직도 쌀쌀한 늦겨울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며칠 전 한번 가보고 싶었던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을 방문 하였습니다. 관계자분께서 독립운동가분들께 드리는 100년편지를 부탁하시기에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승낙을 하고 선생님께 서신을 드립니다. 재작년 선생님의 순국70주년추모 사업으로 저명한 학자분들과 선생님의 후손 분들이 중심이 되셔서 추모논총을 발간하였습니다. 또한 부산에서 백산상회 건립 100주년 사업으로 학술대회를 개최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학술대회는 참석을 하지 못했지만 후에 백산상회 자리에 건립된 기념관을 방문하여 선생님 관련 자료를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국가보훈처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국외사적지 탐방 준비를 앞두고 있었는데 마침 부산 MBC에서 선생님 관련 다큐영상을 촬영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의령 생가 및 백산상회, 그리고 중국 흑룡강성으로 촬영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래도 사람이 있는 풍경이 좋겠다는 생각에 사적지 탐방단에 촬영 팀도 동행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