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용인의 딸 열네 살 독립군 “오희옥” 이윤옥 류후공원 낡은 로프웨어에 매달려 산마루를 올랐다 저만치 발아래 류쩌우 시내가 육십 년대 사진첩 속 그림처럼 어리고 그 어딘가 열네 살 소녀의 씩씩한 군가가 들려올 듯하다 용인 느리재의 명포수 할아버지 의병장으로 나선 길 뒤이어 만주벌을 쩌렁쩌렁 호령하던 장군 아버지 그 아버지와 나란히 한 열혈 여자 광복군 어머니 그 어머니의 꽃다운 두 딸 희영 희옥 자매 광복진선 청년공작대원되어 항일연극 포스터 붙이러 어봉산 도락암 공원에도 자매는 다녀갔을까? 열네 살 해맑던 독립소녀 팔순 되어 사는 집 수원 대추골 열세 평 복지 아파트 찾아가던 날 웃자란 아파트 정원 은행나무 그늘에 앉아 낯선 나그네 반겨 맞이하던 팔순 애국지사 흑백 사진첩 속 서간도 황량한 땅 개척하며 독립의지 불사르던 오씨 집안 3대 만주벌 무용담 자랑도 하련만은 손사래 절레절레 치는 수줍은 여든여섯 광복군 소녀 그 누구 있어 치열한 3대의 독립운동사를 책으로 쓸까 욕심 없이 아버지 유품을 내보이며 들꽃처럼 미소 짓던 해맑은 영혼 그 눈동자에 비치던 우수 어린 한 점 이슬 아직도 광복의 영광 새기지 않는 조국 전설 같은 독립의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섬섬옥수 무궁화 수를 놓아 삼천리 금수강산 가르치던 스물셋 처녀 선생님 가갸거겨 글 가르쳐 민족혼 일깨우며 밤낮으로 독립의 끈 놓지 않게 타이르신 이여 어느 해 메마른 겨울 장이 꼬이도록 몸을 살피지 않고 열정을 쏟으시더니 끝내는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꽃상여 타고 코흘리개 곁을 떠나던 날 넘치던 샘골의 물이 마르고 하늘의 물도 말라 마을 아낙들 마른 울음소리만 가득했네 코흘리개 녀석들 엎어지고 자빠지며 상여 뒤쫓아가는 길 꽃상여 위로 흰 눈송이만 하염없이 내리었다네.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 처녀선생 '최용신'/이윤옥- ▲ 1935년 당시 최용신 관련기사 최용신(崔容信, 1909. 8.12 - 1935. 1.23)은 누구인가? 심훈의 상록수 모델이 된 최용신은 함경남도 덕원(德原) 출신으로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한 농촌사회의 부흥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나라사랑 이야기는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서간도에 들꽃 피다》2권에 자세히 그려져있다. ▲ 최용신 기념사업회를 이끈 김명옥 회장과 안산 샘골 최용신 애국지사 무덤에서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이육사 시신을 거둔 독립의 불꽃 이병희 이윤옥 경성감옥 담장이 서로 손잡고 올라가는 여름 요즘 아이들 밀랍인형 고문실에 멈춰서 재잘대지만 차디찬 시멘트 날바닥 거쳐 간 독립투사 그 얼마더냐 지금은 공부보다 나라 위해 일을 하라 아버지 말씀 따라 일본인 방적공장 들어가서 오백 명 종업원 일깨운 항일투쟁의 길 감옥을 안방처럼 드나들 때 고춧가루 코에 넣고 전기로 지져대어 살 태우던 천형(天刑)의 세월 잡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 죽어라 동지를 팔아먹지 마라 결코 팔아먹지 마라 혼절 속에 들려오던 아버님 말씀 새기던 나날 광야의 육사도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갔으리 뼈 삭는 아픔 숯 검댕이 영혼 부여잡으면서도 그러나 결코 비굴치 않았으리라 먼데 불빛처럼 들려오는 첫 닭 우는 소리를 어찌 육사 혼자 들었으랴. ------------------------------------------------------------------------------- 이병희 애국지사 (李丙禧, 1918.1.14~2012.8.2) 핼쑥한 모습이었지만 요양원 좁은 침대위에서 글쓴이를 반갑게 맞이해주시던 이병희 여사님은 이제 우리 곁에 없습니다. 그러나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 이윤옥 천안 아우내장터를 피로 물들이던 순사놈들 함경도 화대장터에도 나타나 독립을 외치는 선량한 백성 가슴에 총을 겨눴다 그 총부리 아버지 가슴을 뚫어 관통하던 날 열일곱 꽃다운 청춘 가슴에 불이 붙었다 관순을 죽이고 풍신을 죽인 손 정의의 핏발은 결코 용서치 않아 끓어오르던 핏빛 분노 차디찬 서대문 감옥소 철창을 녹이고 얼어붙은 조선인 가슴을 녹였다 보라 남과 북의 어린 열일곱 두 소녀 목숨 바쳐 지킨 나라 어이타 갈라져 등지고 산단 말인가 남과 북 손을 부여잡고 다시 통일의 노래를 부를 그날까지 님이시여 잠들지 마소서! --------------------------------------------------------------------------------- 동풍신(董豊信, 1904 - 1921) 서대문형무소공원 안 독립관에는 순국선열들의 위패가 모셔져있는데 거기에 동풍신 애국지사의 위패가 있다.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고 할 정도로 알려졌던 두 열사는 어찌 된 영문인지 한쪽은 만고의 애국지사인데 한쪽은 그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이 없다. . ▲ 서대문형무소공원 안 독립관에 모셔져 있는 순국선열들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길러 낸 억척 어머니 곽낙원 이윤옥 비탈진 언덕길 인천 형무소 터엔 지금 ▲ 사형을 기다리는 아들 백범에게 밥을 얻어 나르던 겨레의 어머니 곽낙원 애국지사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찜질방 들어서 사람들 웃음꽃 피우며 여가 즐기지만 예전 이곳은 백범 어른 잡혀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곳 국모 살해범 츠치다를 처단한 사형수 아들 위해 정든 땅 해주 떠나 남의 집 식모살이 밥 얻어 감옥 드나들며 아들 옥바라지 하신 어머니 삼남 지방으로 쫓기는 아들 마곡사서 머리 깎고 중 된다고 소식 끊었을 때 애간장 타셨을 어머니 인과 신 어린 손자 두고 먼 이국땅서 눈 감은 며느리 대신하여 빈 젖 물리며 길러 내신 어머니 상해 뒷골목 배추 시래기 주어 애국청년 배 채우고 광복 위해 뛰는 동포 뒷바라지로 평생 등이 굽은 겨레의 어머니 오늘도 허리띠 질끈 동여매고 오른손에 밥사발 든 어머니 겨레에게 건네는 말 나지막이 들려온다 너희가 통일을 이루었느냐! 너희가 진정 나라를 되찾았느냐! 곽낙원(郭樂園, 1859.2.26~1939.4.26) 곽낙원 여사는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선생의 어머니이다.평양숭실학교 3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7월 3일 화요일 오전 11시 아그네스 안 씨를 만난 것은 서울 시내 한 커피숍에서였다. 까만 원피스에 초록빛 스카프가 잘 어울리는 아그네스 안 씨는 단발머리에 아담한 체구의 밝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우리였지만 그녀는 한복 차림의 나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방한 중인 아그네스 안 씨는 보스톤에서 산부인과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그가 건넨 명함에는 Dr. Agnes Rhee Ahn 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인 교포 3세인 아그네스 안 씨를 알게 된 것은 여성독립운동가 오정화 (1899.1.25~1974. 11.1) 애국지사 때문이었다. 오정화 애국지사는 아그네스 안 씨의 할머니로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유관순 열사와 함께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일제의 감시를 견디지 못해 만주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며 피해 살다가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75살로 삶을 마감한 분이다. 오정화 애국지사는 2001년에 독립운동이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부모님의 이민으로 1961년 미국에서 태어난 아그네스 안 씨는 이러한 외할머니의 독립운동사실을 모른 채 동양인으로서 미국문
[우리문화신문=이항증(이상룡 애국지사 후손)] 가장이 나라를 위해 죽거나 불구자가 되면 그 가족 전부가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은 몸뿐이 아니라 재산도 모두 바쳤다. 그 때문에 후손은 유산은커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보다도 훨씬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이 어렵기 때문에 나라가 개입해주는 것이 보훈제도다. 군사독재 시절이라 하는 3공화국은 그래도 이 보훈제도를 철저히 지키려 했다. 당시 기업은 정부의 독려에 보훈유족 고용유지비율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업이 알아서 채용하도록 위임했다. “보훈유족이라는 것” 하나로 기업에 고용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니 기업으로서는 보훈유족을 고용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나는 지난 2009년 초 딸의 취업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정부가 저축은행 계약직(비정규직)을 소개하여 거절했다. 그리고 곧바로 국민권익위원회에 항의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그해 11월 고위공직자를 보내 유감의 뜻을 전하며, 2010년 1월 20일 이후 선처하겠다는 공문까지 받았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