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물고기 (조계사 앞마당) ▲ 물고기등(조계사 극락전 앞) ▲ 하늘을 나는 물고기등 ▲ 물고기등이 마치 희생자의 영혼이 하늘을 나는 듯하다. ▲ 떼지어 하늘을 나는 물고기등들 ▲ 멀리 멀리 떼를 지어 나아가는 듯한 물고기등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인천항에서 아름다운 제주를 향하여부푼 꿈을 안고 출항했던 세월호가 2014년 4월 16일 새벽엉터리 같은 선장과 승무원들의 미숙으로항해도중졸지에 침몰하여진도 근해에서 수장된지가 7월 24일로 어언100일이 되었다. 처음 인천항을 출발할 때 부풀었던 어린 싹들과 제주에서의 새삶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의꿈은 망망대해 바닷속으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사라졌고, 이제 300여명의원혼들은 대한민국을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원혼들을 달래줄 정부의 대책은 나오지 않고,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주지 못하는 유가족들만이 하염없는 안타까움에 애를 태우고 있다. 기본을 잘 지키지 않은 탓에 난 해난사고이지만, 그 해난사고를 막지는 못했더라도기본적인 구조활동만 제대로 했더라도 수많은 인명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나 하나 집어 볼수록 너무도 원망스러움에 허망한마음 달랠 길이
▲ 혜화동 주민센터 대문 ▲ 대문 앞에서 본 혜화동 주민센터 ▲ 한옥 주민센터 전경 ▲ 'ㄷ'자 집 주민센터 본채의 중정(가운데 뜰) ▲ 중정 밖에서 본 안쪽 ▲ 나무의 구조체와 문짝이 이루는 정갈한 주민센터 벽면 ▲ 중정 안쪽에서 본 중정 전경 ▲ 주민센터 내부 업무공간 ▲ 뒷 뜰 ▲ 주민센터 앞마당의 왼쪽 뜰 ▲ 담장의 꽃담과 화초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100여 년. 그 이전 시대에는 모두 한옥이었던 우리 건축문화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는 대부분 서양식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간 우리 조상들의 삶은 터전인 살림집은 물론이고 사무공간까지 모두 전통 건축이었으나 이 모든 것을 서양건축에 내 맡긴 이래 아무도 업무용 공공건축물을 한옥으로 지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로구에서는 다른 지자체에서는 꿈도 못꿀 시도를 하였다. 종로는 한국의 심장부로 조선시대 5대 궁궐과 많은 한옥이 그나마 잘 남아있는 곳이다. 이러한 특성을 잘 살려 종로구에서는 혜화동 주민센터를 한옥으로 짓고자하는 발상의 전환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계획에 따라 한옥으로 남아있으면서도 주민센터로서의 위치와 규모가 적당한 집을 물색하다가 현재의 집
▲ 짚으로 생활용품을 만드는 장인. 옛날에는 집에서 누구나 하던 일을 이제는 한옥마을 같은 곳에서 재현해주는 모습으로 봐야한다 ▲ 짚으로 만든 짚신들. 여름에는 땀이 차지 않아 무좀 걱정도 없다. ▲ 짚신꾸러미. 먼길을 갈 때는 괴나리봇짐과 함께 짚신봇짐을 챙겨서 갔다. ▲ 예쁘게 색실을 넣어 만든 아이들용 짚신 [그린경제/얼레빗= 최우성 기자] 지금으로부터 50년, 기자가 어렸을때만 해도짚신을 삼는 광경은심심치 않게 보았다. 그 때 고무신은 막 나온 신발로비싸고 귀했다. 우리의 삶이 50여년도 채 안되어 급속한 물질문명의발전으로 송두리째 바뀌었다.초가집과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마을은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자리를 잡은 요즈음 남산 한옥마을은 그나마 우리에게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이곳에는 한국인들도 많이 찾지만 푸른눈의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온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찾아 오고 있는 듯 한옥마을 곳곳에는 중국인들 일색이다. 이러한 외국인들을 위해 한옥마을에서는 짚신이나 짚방석 따위를 재현해주고 있다. 무더운 여름에도 쉬지 않고 짚풀을 엮어 짚신 따위를 삼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름없는 장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
▲ 삼척 천은사 아래에 있는 동안사(動安祠, 이승휴의 사당), 사당의 앞에는 연못이 있다. ▲ 동안사 정면 ▲ 동안사 측면 ▲이승휴의 유허지에 세워진 기념비,천은사에서 1km 아래에 있다. ▲ 동안사 근처 통방앗간, 물레방아의 원형으로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방아를 찧던 방앗간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삼척 두타산 기슭에는 '천은사'라는 절이 있고 그바로 밑에는'동안사(動安祠)'라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고려말 무신정권 이후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절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한민족의역사를 대 서사시로 읊은 이승휴를 기리는 사당이다.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지어서 역대 조상들의 왕계보를 시로읊은 시인이기도 하다. 고려중기김부식은 우리의 역대 단군의 조선과 삼한의 역사가 중국과 비슷한 시기였다고 기록한고서들을 믿을 수 없다며모조리빼버리는 우를 범했다. 하지만 이승휴와 일연스님은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견주어서 전혀 못할 게 없다는 생각으로 당시 있었던'고기'의 기록들을 믿고 그대로 인용하여고조선과 단군을 비롯한 삼한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한민족의 역사와 유래를 오늘의 기록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고기에 적혀있던 고대 한국
▲ 죽서루 앞마당에서 본 죽서루, 누정에 올라보면 오십천 변의 경치가 보인다. ▲ 죽서루의 현판 정면 2층 누각에 쓰인 명필의 글들, 관동제일루, 죽서루 ▲ 죽서루의 측면, 왼쪽에는 오십천이 흐른다. ▲ 죽서루의 1층 기둥-1,자연상태의 바위들이 제멋대로 놓여있다. ▲ 죽서루의 1층기둥-2, 바위와 기둥이 서로 이를 맞추어 자리하고 있다. ▲ 죽서루의 1층기둥-3,바위가 없는 곳에는 자연초석을 설치하고 기둥을 세웠다. ▲ 죽서루 2층누각, 누각에는 200명이 앉아도 충분할 만큼 넓다. ▲ 누각의 외부에서 내려다 본 오십천 주변은 옛 정취는 사라지고아파트와 현대 건축물이 빼곡하다. 동국박람회를 기념한 야릇한 건물이 경관을 차지하고 있다. ▲ 죽서루의 공포, 조선조에 세워진 다른 누각들보다는 단순 간략한 공포를 하고 있다. ▲ 누각 안에서 본 모습. 자연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나무들이 정비가 안된채 자라났다. ▲ 누각에서 무더위를 식히며 글을 읽는 사람들, 마치 옛날 선비들 모습을 연상해본다. ▲ 제일계정 조선조 현종때 명필 허목의 글씨, 유려한 필체가 마치 계곡의 물이 휘몰아 내려간 듯 하다. ▲ 율곡이 죽서
▲ 화양서원 전경 ▲ 화양서원 내삼문 측면(내삼문은 솟을 삼문) ▲ 만동묘를 세원 내력을 기록한 비와 비각 ▲ 만동묘 묘정비. 대원군은 내부 글씨를 모두 훼손하였다. ▲ 만동묘를 오르기 위해서는 반듯히 서서 오르지 못하고 저렇게 옆으로 올라가고 내려가야 한다.그 이유는 명나라 황제를 모신 사당을 감히 바른 자세로 오르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리 만든 듯.. ▲ 명나라 황제를 모신 사당 만동묘 정면 ▲ 만동묘 안에 모셔진 명나라 황제의 신위 ▲ 외삼문에서 본 만동묘 모정비각 ▲ 여름 선비되기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것(?)인지 궁금하다. ▲ 화양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화양서원 묘정비, 화양서원의 영욕을 기록하엿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속리산 깊은계곡 화양계곡에는 계곡의 이름을 딴 화양서원이 있다. 화양서원은 조선조 후기 세도정치가 열리기 전 예학의 대가이면서학자로 그 이름을 날리던 '우암' 송시열의 뜻에 따라세워진 서원이다. 서원이라 함은 조선조 유학 중에서도 성리학을 근본으로 도학을 공부하되 자신들이 존경하는 선대의 도학자를 표상으로 그분의신주로 모시고,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을 지어 그
▲ 선유동 계곡에 있는 학천정 ▲ 학천정의 쪽문 자물쇠가 채워져서 들어갈 수는 없었다. ▲ 담장안의 학천정 ▲ 학천정 앞 선유동계곡 ▲ 선유동 계곡에서 노니는 사람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속리산의 서쪽면은 경상북도 문경땅이다.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백두대간을 넘을 수 밖에 없는데, 그 백두대간이 곧문경땅이화령이다. 이화령을지나 가은읍에는 속리산의 한 줄기인 대야산 자락이 있다. 이곳 계곡에는맑은 물이 흐르는 선계가 있으니 이를 옛부터'선유구곡'이라고 부른다. 선유구곡중에도 선유동에는 조선조 학자였던 이재가 세운 학천정이 있어 신선처럼 학처럼 고고하게 산천에 거하던 옛 선인들의 풍류를 잘 느껴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신라후기 당나라에 유학하여 신라인의 기상을 떨치던 명문장가인고운 최치원이 남긴 유적도 있다. 당에서 돌아와 자신의 학문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골품제도의 한계에 막혀서좌절을 했을 고운 최치원은,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 하다가 지리산의 산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고운 선생은 은퇴하여 이곳 저곳을 찾아 신선처럼노닐다가이곳 바위에다 선유동{仙遊洞)이라 쓴 글자를 새겼다고 하는데 기자는 그 글을 찾지
▲ 오죽헌 전경 ▲ 율곡선생을 모신 사당 ▲ 사당에 모셔진 율곡선생 초상화 ▲ 오죽헌(오른쪽 방문 위에는 율곡이 태어난 몽룡실이 있다.) ▲ 오죽헌의 현판(검은 대나무가 있는 주변에 있는 집) 집 주면에 오죽들이 많이 있다. ▲ 율곡선생이 살았다는 외가(신사임당의 본가) ▲ 어제각(임금님이 하사한 벼루가 있다. 벼루의 뒷면에는 정조임금이 율곡의 친필인 격몽요결과 어릴 때 쓰던 벼루와 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가져오게 하여직접 본 뒤에 벼루 뒷면에 율곡선생을 찬양하는 글을 새기게 하고 격몽요결의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서 잘 보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여 작은 전각을 지어 현재 그 책과 벼루를 보관하고 있다. ▲ 어제각에 진열된 율곡선생이 쓰던 벼루와 먹 ▲ 율곡선생 동상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강릉 오죽헌(烏竹軒=검은 대나무가 있는 집)은 조선조 성리학의 양대 산맥 중서인들이 종조로 추앙하는 율곡선생의 외갓집이 있던 곳이다. 본가가 아닌 외가에서 태어나는 것이 당시에는 너무도 흔한 일이었고, 이는 장가들면 한동안 처가살이하던 옛 풍속의 연장이다. 율곡은 외갓집인 이곳 강릉 오죽헌(몽룡실)에서 태어났을
▲ 경포대와 주변의 소나무들 ▲ 경포대 누정에 오르는 입구 ▲ 경포대 현판 큰 글씨로 당당한 필체다. ▲ 넓은 루마루에 올라앉아 더위도 식히고 주변 경계를 나름대로 표현하는 시회를 열고 있다. ▲ 루에 올라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져도 본다. ▲ 경포대 주변의 낙낙장송들 ▲ 동쪽에 펼처진 경포대 호수 ▲ 루마루에서 바라본 경포주변 경계 ▲ 낮은 언덕위에 울창한 소나무 숲 안쪽에 경포대가 있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강릉하면 경포대가 생각난다. 바다가 접한 낮은 언덕위에 자리한강릉은동으로 바다가 넓고 파랗고, 주변에는 낮은 산과 들이 펼쳐진 강원도의 큰 고을이다. 강원도가 강원도라 이름이 붙은이유는 백두대간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인대관령의 동쪽에 바다를 면하여 강릉이 있고, 백두대간 대관령의 서쪽에는 깊숙한 내륙에원주가 있기 때문이니, 이 두 고을의 첫자를 따서 강원도가 아닌가? 그 강원도의 첫 고을은 누가 뭐래도 강릉이고, 강릉의 첫 째 경관은 경포대인 것이다. 경포대는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경계를 살펴보고 나름대로의 시상을 읊조렸다. 그래서 경포대의 천장에는 그들이 읇었던 시들을 나무판에
강릉 객사문 외부정면 객사문 내부 측면 강릉객사문 내부 측면 객사문 측면 박공면 객사문 기둥과 공포 객사문 공포 상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강릉 객사문은 강릉이 신라시대부터 동해의 큰 고을로 동해안 각 고을을 다스리는 관영으로서 주 건물인 객사로 들어가는 문이다. 따라서 본래는 객사문 안에 수많은 전각들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지만, 지금은 고려말기에 지어진 객사문만 그대로 있고, 객사문 안쪽에 있는 수많은 전각들은 일제시대에 다 헐려나갔다. 이곳도예전에 학교를 지어 운영하다가 이후 학교를 이전하고 본래 있었던 객사의 주 건물들만 복원해 놓았다. 주건물은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지만 주건물보다 못한 객사문만 살아남은 까닭은이 건물이 야릇하게도 부속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영역이나 중요한 건물이 안쪽에 위치하지만, 중요한 건물에 다다르기 까지는 과정적인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경계짓는것은 문이다. 사찰의 경우 중요 법당에서 먼 곳에 사찰의 경계가 되는일주문이 있고, 일주문을 지나서 한참을 올라가면 천왕문이 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올라가야 금강문과 루문이 있는 등 법당에 이르는 길이간단치 않는데 이는 그 만큼 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