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6세기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왜가 침략하여 조선과 명이 참전한 동아시아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 노인(魯認)의 《금계일기(錦溪日記)》 따위를 통해서 그 전쟁ᄋᆖᆯ 더듬어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는 그 책들 말고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관련된 여러 책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된 오희문(1539~1613의 《쇄미록(瑣尾錄)》은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 동안 쓴 개인 일기지만,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함, 피난민의 삶, 군대 징발과 군량 조달, 양반의 특권과 노비들의 비참한 생활상 따위가 담겨있지요. 오희문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지만, 그의 아들 오윤겸이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그밖에 국립진주박물관에는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임진ㆍ정유재란과 병자호란에 관련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한 《난중잡록(亂中雜錄)》, 이로(李魯)가 김성일의 활동을 중심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2008년~2009년 남양주 별내 택지개발사업 터의 무연고 여성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모두 52건 71점 가운데 사료적 값어치가 있는 10건을 국가민속문화유산 「남양주 16세기 여성 무덤 출토복식」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이번에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복식 유물은 16세기 중기 복식 연구 자료로서 값어치가 높으며, 당시의 복식과 장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직금사자흉배 운문단 접음단 치마’는 조선전기 연금사(撚金絲)*로 비단 바탕에 무늬를 짜 넣어 만든 사자흉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16세기 단령*이나 원삼* 등 남녀 예복용 포에 사용했던 옷감을 하의인 치마에 활용하였다는 사실이 처음 발견된 사례이자, 해당 치마의 겉감을 이루는 사운문(四雲紋)* 등을 통해 구름무늬의 특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지요. 이 밖에도 양반층 여성들이 예복으로 입은 ‘장삼(長衫)’ 역시, 그동안 출토된 형태가 젖힌 깃인데 견주어, 곧은 깃으로 제작한 여성용 습의*로 희소성이 있고, 장삼에 쓴 넓은 띠인 ‘대대(大帶)*’ 또한 상태가 양호하여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부 부 - 정낙추 온종일 별말 없이 풀 뽑는 손만 바쁘다 싸운 사람들 같아도 쉴 참엔 나란히 밭둑에 앉아 막걸릿잔을 건네는 수줍은 아내에게 남편은 멋쩍게 안주를 집어준다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하지 않고도 자식 낳고 곡식을 키웠다 사랑하지 않고 어찌 농사를 지으며 사랑받지 않고 크는 생명 어디 있으랴 한세월을 살고도 부끄러움 묻어나는 얼굴들 노을보다 붉다 우리 겨레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쓰는 부름말은 ‘임자’였다. 요즘에는 ‘주인’이라는 한자말에 밀려서 자리를 많이 빼앗겼지만 말이다. 알다시피 ‘임자’는 본디 ‘물건이나 짐승 따위를 제 것으로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여느 이름씨 낱말이다. 아내는 남편을 “임자!” 이렇게 부르고, 남편도 아내를 “임자!” 이렇게 불렀다. 서로가 상대를 자기의 ‘임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에게 매인 사람으로 여기고 상대를 자기의 주인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 조금도 높낮이를 서로 달리하는 부름말을 쓰지는 않았다. 토박이말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김수업 선생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 높낮이가 없다는 사실은 가리킴말(지칭어)로도 알 수 있다. 우리 겨레가 아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씨구나 절씨구야 돈 봐라 돈 봐라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맹상군의 수레바퀴처럼 둥글둥글 생긴 돈 생살지권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 얼씨구나 돈 봐라” 이는 판소리 흥부가 가운데 <돈타령> 대목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흥보가 우선 배고픔을 면하려고 박을 타다가 돈이 쏟아지자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라며 정신 없이 반기고 있습니다. 흥부만이 아닙니다. 요즘도 날마다 신문에는 ‘돈, 돈, 돈’ 하며 돈 얘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돈 없으면 못살 세상이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고 한다는 요지경 세상입니다. 그런데 돈은 있으면 있을수록 더 많은 돈에 욕심냅니다. 재벌 그룹이 탈세하다가 패가망신하는 예를 종종 봅니다. 여기 <돈타령>에도 그런 대목이 들어 있습니다. “아이고 좋아 죽겠네. 일년 삼백육십일을 그저 꾸역꾸역 나오너라.”라고 소리합니다. 그러나 뒷부분을 보면 흥보는 돈 욕심만 부리지 않습니다. 흥보는 “부자라고 자세를 말고 가난타고 한을 마소. 엊그저께까지 박흥보가 문전걸식을 일삼터니 오늘날 부자가 되었으니 이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옥션은 오는 10월 24일 저녁 4시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제175회 미술품 경매’를 연다. 출품작은 모두 98점, 총액 약 92억 원이다. 특히 이번 경매에서는 조선시대 달항아리, 희소성 높은 고서화와 고지도, 고려청자, 근대 공예품 등을 선보여 주목받는다. 이번 ‘제175회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조선시대 백자대호 곧 <달항아리>다.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풍만한 양감과 꾸밈없는 형태, 담백한 유백색의 피부가 돋보이는 출품작은 47.5cm에 이르는 큰 크기에도 전체적인 비례가 적당해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달항아리 가운데 40cm 이상의 크기는 주로 왕실행사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값어치가 높음에도 그 수는 국보, 보물을 포함해 20여 점에 불과할 정도로 적다. 지구촌 시장에서도 이러한 <달항아리>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와 9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출품작과 비슷한 시기 제작된 달항아리가 출품돼 각각 약 60억 원, 47억 원에 낙찰된 바 있다. 크리스티 출품작의 높이는 45.1cm, 소더비 출품작의 높이는 45.2c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날에 고씨(高氏)가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고구려(高句麗)라 하였고, 부여씨(夫餘氏)가 서남 지역을 차지하여 백제(百濟)라 하고, 박(朴)⋅석(昔)⋅김(金) 씨가 동남 지역을 차지하여 신라(新羅)라 하였으니, 이것이 삼국(三國)이다. 마땅히 《삼국사(三國史)》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펴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함에 이르러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하고 발해(渤海)라 했으니, 이를 남북국(南北國)이라 한다. 마땅히 남북국(南北國)의 역사책이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펴내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는 영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쓴 책 《발해고(渤海考)》 서문 일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삼국시대를 잇는 역사로 통일신라시대가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유득공은 김씨가 남쪽을 차지하여 ‘신라(新羅)’라 했고 그 북쪽은 고구려 사람 대씨(대조영)가 차지하여 ‘발해(渤海)’라 하였으니 당연히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후 대 씨가 망하자, 대 씨가 차지했던 북쪽 땅은 여진족이 들어가고, 또는 거란족이 들어갔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날 어느 마을에 문자 쓰기를 몹시 좋아하는 선비가 살았다. 어느 날 처가에 가서 자는데 밤중에 범이 와서 장인을 물어 갔다. 집안에 사람이라고는 장모와 내외뿐인 터라, 어쩔 수 없이 선비가 지붕에 올라가 소리쳐 마을 사람을 불러 모았다. ‘원산대호가 근산 래하야 오지장인을 칙거 남산 식하니 지총지자는 지총 래하고 지창지자는 지창 래하소! 속래 속래요!’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먼 산 큰 범이 와서 우리 장인을 앞산으로 물고 갔으니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들고 나오고 창을 가진 사람은 창을 들고 나오십시오! 어서요. 어서!> 뜻인즉 이렇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누가 총이며 창을 들고 뛰어나올 것인가?“ 윗글은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과 우리말대학원장을 지낸 고 김수업 선생의 《우리말 사랑 이야기 “말꽃타령”》에 나오는 글입니다. 글깨나 배웠다고 어려운 한자말로 소리쳤는데, 아무도 뛰어오는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하지요. 오늘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77년이 되는 한글날입니다. 그때 세종대왕은 한문에 능통하여 다른 글자가 필요 없었지만, 한문이란 기득권을 내려놓고 오로지 백성사랑으로 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은 1797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였습니다. 금강산 풍경을 유탄(柳炭, 그림의 윤곽을 그리는 데 쓰는, 버드나무를 태워 만든 숯)으로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2년 뒤인 1799년 3월부터 8월까지 6달에 걸쳐 가을 금강산(풍악산) 그림첩인 《해산첩(海山帖)》을 완성했습니다. 지리학자 집안 후손인 정수영은 남다른 관찰력, 독자적인 시각과 경물 배치 방식, 특유의 필법이 특징인 자신만의 금강산 그림을 남겼습니다. 금강산의 가을을 담은 정수영의 《해산첩》 단풍의 계절 가을이 오면 현대인들은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이를 블로그 등의 개인 누리집에 올려서 여러 사람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장소라도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 시각 경험에 따라 촬영 대상이 달라지고, 같은 대상을 찍어도 사진기의 종류, 촬영 각도, 촬영자의 기술에 따라 서로 다른 사진이 생산됨을 깨닫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도 가을 여행의 추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워서 ‘풍악산(楓嶽山)’이란 별명이 있는 금강산을 찾은 문인들은 자신이 본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7째 절기로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의 한로(寒露)입니다. 한로 무렵은 기온이 더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가을걷이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이때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고 쉬는 새참에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 맛은 농부들에게 있어 행복이며 또 지나가는 길손을 불러 함께 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가을 들판에는 콤바인이 굉음을 울리며 논을 누비면서 타작과 동시에 나락을 가마니에 담아내고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달리기에 한가롭게 길가는 나그네도 볼 수가 없어 예전처럼 막걸리 한잔을 나누거나 논둑에 앉아서 새참 먹는 모습도 보기 어려워졌지요. 한로와 상강(霜降) 무렵에 사람들은 시절음식으로 추어탕(鰍魚湯)을 즐겼습니다. 추어탕은 조선후기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추두부탕(鰍豆腐湯)”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또 1924년에 이용기가 쓴 요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별추탕”란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가을에 누렇게 살찌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조선의 출판문화’라는 주제로 스토리테마파크 누리잡지 담(談) 10월호를 펴냈다. 조선의 출판 역량과 지식 유통과정에 대한 모습을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서적의 유통이 곧 정보의 확산 <조선 시대 서적의 보급과 교육기관의 장서 관리>에서 육수화 연구원(한국고전번역원)은 조선의 출판 활동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과 함께 서적의 보급 및 관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본다. 조선 시대 서적의 출판은 교서관에서 담당하였으며, 서적 보급은 임금이 내려주는 반사의 형식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교서관을 규장각에 편입시키며, 규장각이 서적의 출판과 유통까지 관장하는 기구가 되었다. 반사의 대상은 주로 세자시강원, 성균관, 사부학당, 향교, 사액서원 등 교육기관이었다. 세자시강원에는 도서관 외에도 시강원책역소(侍講院冊役所)라는 서적을 출판할 수 있는 별도의 기관이 존재하였다고도 하며, 향교와 서원은 별도의 건물을 지어 서적을 보관하고 도서 목록을 만들어 서적의 출납을 엄격히 확인하는 등의 유사한 규정으로 관리하였다. 한편, 조선 전기 훈구세력은 서적의 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