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자네는 지겹지도 않아서 평생을 두고 수학만을 그렇게 연구하는가? 자네가 하는 그 일이 인류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럴 때마다 그 수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그만이지, 제비꽃이 핌으로써 봄의 들녘에 어떤 영양을 끼칠 것인가, 그건 제비꽃으로선 알 바가 아니라네.” 법정 스님의 저서 '서 있는 사람들'에 나오는 글이다. 세상이 어지럽다. 지겨운 코로나는 언제 우리 곁을 떠나려나? 이런 때에 제비꽃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걱정하지 말고 그저 자기 일이나 또박또박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문득 고개를 드니 오후의 햇살이 길게 창문을 타고 들어온다. 물끄러미, 아무 생각 없이, 오랫동안 그 햇살을 본다. 그러다가 햇살을 말한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떠올랐다. 小窓多明 使我久坐(소창다명 사아구좌) 뜻이야 뭐 “작은 창으로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니, 그것을 보느라 한참 앉아있네” 정도일 것인데 원래 뜻글자인 한자를 상형문자화 해서 표현하는 추사의 솜씨가 기가 막힌다. 창(窓)을 격자무늬의 칸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갈수록 시름이 많은 세상이다. 해가 바뀌면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퇴출될 듯하다가 다시 기승을 부린다. 이번엔 북에 사는 정치인들이 자기들의 핵문제는 팽개치고 교류 안한다고 남에 짜증을 낸다, 세상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 묶이고 왕래를 안 하니 돈이 돌지 않아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말라버린 돈을 돌리려 해도 제도에 가로막혀 끙끙대고 있다. 이런 세상에 시름을 잊고 좀 마음 편히 사는 방법은 없는가? 이 가운데 시름없는 것은 어부의 생애로다 일엽편주를 만경창파에 띄워놓고 인간세상 다 잊었으니 날 가는 줄 알겠는가 1549년 6월 유두(流頭) 사흘 뒤에 귀밑털에 서리가 내린 노인은 낙동강의 지류인 분강(汾江)의 고깃배 뱃전에서 어부가 보는 세상을 노래하는 시조를 선보인다. 이 시조를 만든 이는 당시 83세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서른둘에 벼슬길에 올라 중앙과 지방의 온갖 요직을 거치며 유능한 관리로서 인정을 받고 명성을 쌓았지만, 중앙 정계의 소용돌이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오려는 소망은 일흔넷이 되어서야, 그것도 겨우 병을 핑계로 허락될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금강산과 백두산에 관한 전문사진작가이며 영상작가이신 이정수 님이 새로 이사한 집을 위해서라며 액자에 넣은 사진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다. 사진을 보니 금강산 천화대의 모습이다. 구름이 영봉들을 휘감아 오르는 신령한 풍경사진인데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선경이다. 지금 금강산에 가면 딱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금강산 관광이 끊어진 지 10년이 넘어 가볼 수가 없으니, 사진으로라도 이렇게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전 세계 아무리 좋은 경치도 구경하러 갈 수가 없으니, 옛날 교통편이 힘들어 천하의 명승이라도 구경을 하지 못한 선인들의 처지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선조들이 실제로 가보지도 못하면서도 가장 많이 애송한 시가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의 '등악양루(登岳陽樓)'라는 시이다. 사실 옛날 악양루를 가서 볼 우리 선인들이 몇 명이나 있었겠는가? 얼마 전까지야 숱하게 우리가 관광으로 다녀왔지만, 이제는 못 가보는 그 악양루의 경치와 그것을 보는 시인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昔聞洞庭水러니 今上岳陽樓라. 吳楚東南坼이요, 乾坤이 日夜浮라. 고등학교 때 문과반에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다시 장미의 계절이 돌아왔구나. 요즈음 서울 등 대도시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장미이다. 장미는 장미이되, 땅에서 나무처럼 크는 것이 아니라 긴 줄기가 무한히 뻗어가는 넝쿨장미(rambling rose)다. 어릴 때 많이 듣던 낫 킹 콜의 노래 그대로다. 넝쿨장미야, 넝쿨장미야 왜 너는 넝쿨이 지는 건지 아무도 모르네 거친 세파에 겪으며 너는 자랐지 누가 넝쿨장미에 가까이 가 주겠는가? Ramblin' rose, ramblin' rose Why you ramble, no one knows Wild and wind-blown, that's how you've grown Who can cling to a ramblin' rose? 장미는 원래 화단에 길고 넓게 심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우리나라 도회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담장에 심어져 넝쿨로 뻗어가면서 담을 대신한다. 꽃이 피는 오뉴월에는 보기도 좋을뿐더러 가시 때문에 자연스럽게 방범 효과도 높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도회지에 가장 흔한 식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가시이다. 꽃의 여왕, 계절의 여왕이란 직위를 부여받았으면서도 장미는 잎 뒤에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한 달 가까이 걸린 이삿짐 정리가 끝나자 비로소 둘레길 숲에도 발길이 가능했다. 홀가분한 마음이다. 사실은 부엌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뻐꾸기의 소리로 비로소 귀가 열린 것이다. 어 뻐꾸기구나. 너 어디 있었는가? 그 뻐꾸기 소리를 따라 둘레길 숲속으로 들어가 본다. 문득 나는 어느새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가 되어버린다. 해가 벌써 지고 나니 별들이 두셋씩 나와 있네 작은 새들은 숲속에서 나무에서 여전히 지저귀고 있구나 아 저기 뻐꾸기, 그리고 개똥지빠귀들 저 멀리서 바람도 불어오고 물 솟아 흐르는 소리도... 뻐꾸기 목소리는 왕의 그것인양 빈 하늘을 울려 퍼지네 The sun has long been set, The stars are out by twos and threes, The little birds are piping yet Among the bushes and trees; There's a cuckoo, and one or two thrushes, And a far-off wind that rushes, And a sound of water that gushes, And the cuckoo's sovereign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현대인들은 마음이 바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수필이건 시이건 소설이건 빨리 결론이 뭔가, 뭐가 가장 중요한가를 파악하는 능력이 우선시 된다. 새잎이 나기 시작하는 4월에는 ‘사월은 잔인한 달’이란 어느 외국 시인의 글귀만을 인용하는 것이 그것이고 5월이 되면 영문학자인 피천득 선생님의 <오월>이란 수필을 들먹거리면서도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라는 구절만을 반복해서 듣고 인용하는 것으로 오월을 보낸다. 그런데 오월을 신록이라는 개념으로만 보면 오월의 진정한 맛을 모르듯이 피천득 선생님의 <오월>을 첫 구절에만 머물고 더는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면 그 수필과 수필에 담긴 진정한 맛을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된다. 그만큼 우리의 삶을 겉핥기식으로 마구 보내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 <오월>이란 수필을 조금 더 읽어보자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이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친구가 복권을 산다고 하기에 옆에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2천원을 꺼내어 그 친구보고 사달라고 했다. 나는 복권에 당첨되는 그런 행운은 없는 사람이기에, 평소 돈을 잘 만지고 돈도 잘 버는 친구의 손기운을 받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왜 이럴까? 무엇때문에 되지도 않을 일을 기대하고 있는가? 당첨이 되어 일확천금을 하면 그것을 감당이나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왜 복권에 손을 대는가? 한 참 전에 휴일 아침에 집 근처 숲속을 산책하던 적이 있었다. 한 시간 남짓 걸었기에 허리가 조금 아파서 허리도 펼 겸 잠시 길옆에 주저앉아 눈에 띄는 클로버 덤불 속을 눈으로 훑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있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네 개의 잎이 달린 클로버가 있었다. 하나를 찾아서 집사람에게 주니 집사람도 자기도 찾았다며 즐거워한다. 다시 보니 그 옆에 또 있었다. 그 옆에도 또. 이런 추세라면 더 찾을 수 있겠지만 나는 거기서 그만하자고 제의했다. 우리 식구가 4명인데 더 찾아서 무엇하랴. ‘행운의 네 잎 클로버도 너무 많으면 행운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었다. 프로 바둑기사가운데 묘수를 잘 두는 분이 있었다. 과거 7단인가
[우리문화신문=글, 사진 이동식 인문탐험가] 온 세상이 푸르다. 봄이 온 가장 확실한 증명은 세상이 온통 푸르게 변하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푸르다. 공원의 산책로에도, 자동차 도로 옆 조그만 화단도, 길옆 나뭇가지도 온통 푸르다. 가까이 있는 나무들, 멀리 보이는 숲에서 연하거나 짙은 푸르름이 점점이 박혀있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저 보세요!” “제가 얼마나 싱그러운지 보이시죠?” 코로나19 사태로 게임이 중단된 골프장의 잔디들도 다 푸르름으로 되살아났다. 싱그럽고 푸르른 봄, 이 말을 표현하는 색깔은 연두색, 연둣빛 등 단연 연두다. 연두, 완두콩의 빛깔을 상징하는 색이름이리라. 한자로는 ‘軟豆’라고 쓰니, 연한 콩이란 뜻이리라. 식물의 푸르름을 표현하는 한자말의 도움으로 형성된 우리말의 개념을 보면 록(綠)이라는 글자가 중심이라고 하겠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단어가 녹색(綠色)이라면 그보다 조금 연한 것은 초록(草綠)일 것이요, 그보다 더 연한 것이 연두(軟豆)일 터이다. 이 록(綠)이 더 진해지면 진녹색, 검녹색이 된다. 그러니 싱그럽다는 말, 푸르다는 말은 곧 연두색 잎과 싹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겠다. 우리 말로는 그냥 ‘연두’라는 말 하나일 것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봄을 맞아 문화재청에서 의미 있는 일을 벌이는 모양이다. 전국에 있는 25개의 문화재를 대상으로 안내문을 더욱 쉽고 멋있고 더 편하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써서 보내주면 우수한 작품을 뽑아서 표창도 하고 그것을 안내판에 쓰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우리 함께 만들어요! 문화재 안내판 안내문안’ 온라인 공모전으로서 오는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안내문안을 공모해 받는다. 문화재 안내문은 원래가 복잡한 한자말에서 온 것이 많아서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음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 점이다. 전국에 있는 모든 문화재의 안내문을 새로 쓸 수는 없으니 우선 25개만을 뽑아서 안내문을 새로 써보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명승 제20호인 제천 의림지와 제림에 대한 기존의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제천 의림지(義林池)는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로 호반의 둘레는 1.8km이고 수심은 8m이다. 제방을 따라 소나무,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제림(堤林)이라 불린다. 물과 숲이 주변의 영호정(映湖亭) 및 경호루(鏡湖樓) 등과 함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뽐내고 있다. 호서(湖西), 호수의 서쪽이라는 충청도의 다른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봄이 오기는 왔구나. 꽃들은 다 피어나고 잎들은 다 얇은 나들이옷을 입고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숨이다. 울고 싶은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이상한 전염병이 몸만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주머니까지 털어가니 몸과 마음이 다 무너지는 것인가? 사정이 딱한 분들도 점점 많아진다. 그런 분들 가운데는 울고 싶은 분들도 있다. 그런데 울지 말아야 한단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이 시인에게 울음을 주는 것은 외로움인 모양이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더 외로워지는 모양이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위 시의 제목은 특이하게도 <수선화에게>다. 정호승 시인의 작품이다. 수선화를 보면 노랗고 생기있고 밝은 표정인데 거기서 외로움과 눈물을 본다. 과연 시인의 감수성은 다르구나. 그런데 요즈음 울고 싶은 것은 그런 외로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는 게 힘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