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시대의 유명한 세 명의 장수를 들라 한다면 단연코 오다노부나가, 도요토미히데요시, 도쿠가와이에야스를 들 수 있다. 두견새가 울지 않는다면 죽여 버려라 - 오다 노부나가 두견새가 울지 않는다면 울게 만들어라 - 도요토미 히데요시 두견새가 울지 않는다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 -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의 성격이 비유적으로 잘 나타나있다.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에 대한 묘사로는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의 표현을 빌리는 게 좋을 것 같다. “키가 크며, 마른 체격으로 수염이 적다. 목소리는 꽤 큰 편이며 항상 무예를 좋아해 천하고 상스럽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신 이외의 다이묘 대부분을 경멸하고, 마치 자신의 부하 다루듯 한다. 명목상 법화종을 신앙하는 듯하지만 조물주, 영혼 불멸, 사후 세계 등의 존재는 없다고 단언한다. 사업을 빈틈없이 하는 한편 공명에 온 힘을 기울인다. 사람과 대화할 때 둘러대는 것을 싫어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실력위주의 인재등용, 상업장려, 사회, 경제기반의 안정” 등을 들기도 한다.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일본인은 1년에 약 84회 카레를 먹는다 카레 천국 일본! 길거리 아무 곳에서나 손쉽게 카레를 사먹을 수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한 사람이 무려 1년에 84회나 카레를 먹는다고 한다. 일본은 카레만 파는 전문 식당도 많고 7~80살 된 노인들도 카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의 카레 역사가 길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반찬이 없어도 먹을 수 있는 간편함 때문에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일본 전국의 12,834개 카레 식당을 소개하고 있으며 카레 조리법(레시피)을 소개하는 사진이 2,440,000 건에 이를 만큼 일본인들의 카레 사랑은 가히 폭발적이다. 재미난 것은 ‘카레’라고 하면 인도음식으로 알지만 현지 고유의 언어로 ‘카레’라는 말은 없다고 한다. 대신 드라비다어족이 푸성귀, 고기, 식사, 반찬을 통틀어 말하는 ‘카리(타밀어:kari - 아래 갈무리 참조)’라는 말을 영어로 ‘curry’로 표기한 것을 일본인들 발음에 맞게 ‘카레(kare)'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이름만 카레로 바뀐 것이 아니다. 일본과 한국에서 카레라고 하면 카레라이스라는 하나의 음식으로 알고
“아사쿠사는 옛도시의 분위기를 간직한 유서깊은 절이 있는 도쿄에서 가장 전통적인 거리입니다. 수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아사쿠사간논절(淺草觀音寺)과 아사쿠사신사(淺草神社)는 물론 주변 지역에까지 아사쿠사의 매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사쿠사에서는 에도시대 서민 경제와 오락의 중심이었던 옛 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고 또한 현재 이 시대 서민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도 즐길 수 있습니다.” 다이토쿠(臺東區) 관광과에서는 아사쿠사 일대와 센소지에 대한 한국어판 안내문을 만들어 아사쿠사 일대를 편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아사쿠사 역 근처 여행안내소에서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아사쿠사 센소지(628년)는 신도들에게 관세음신앙의 명소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뭐니뭐니해도 나카미세(절 입구에 즐비한 상점)를 구경하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가미나리몽을 지나자마자 펼쳐지는 상점가는 다양한 일본 전통인형은 물론이고 직접 구워 파는 전통과자와 모찌(떡) 같은 먹거리와 핸드백을 비롯한 여성들의 소품 액세서리, 옷, 신발, 기모노를 만들 수 있는 옷감 종류까지 품목도 다양하다. 거기에
일명 담징스님의 맷돌로 일컬어지는 맷돌을 보기위해 후쿠오카 관세음사(福岡 觀世音寺)를 찾은 것은 2012년 2월 중순이었다. 후쿠오카는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지만 그날은 오전부터 함박눈이 펑펑 내려 그곳 주민들은 몇십 년 만의 서설이라며 반기고 있었다. 관세음사는 큐슈지방의 대표적인 고찰로 창건 시기는 686년으로 추정되며 나라의 동대사(東大寺), 관동의 약사사(藥師寺)와 더불어 일본의 ‘삼계단(三戒壇, 계를 주는 단)’이 설치되었던 주요 절이다. 또한, 이곳에는 698년에 주조된 교토 묘심사의 동종(銅鐘)보다 앞선 일본 최고(最古)의 동종과 함께 국보급 불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담징스님의 맷돌은 단연 돋보이는 유물이다. 절의 주지이자 서남학원대학 문학부교수인 타카쿠라(高倉洋彰) 씨의 《태재부와 관세음(太宰府と觀世音), 1996》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하면 “이 맷돌은 610년 고구려에서 온 승려인 담징이 처음 만든 것으로 이것이 그 실물이다. 이 맷돌은 식용의 가루를 가는 용도가 아니라 가람 건립 때 사용되는 적색안료인 ‘주(朱)’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밝히면서 일본의 맷돌 권위자인 미와(三論茂雄)씨의 ‘다자이부 관세
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 아오이마츠리, 7월17일 기온마츠리, 10월 2일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일본열도가 마츠리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교토는 특히 유명한 3대마츠리와 더불어 청수사, 금각사 등 이름난 절과 유적지가 많은 곳이라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거기다가 인접한 오사카와 나라 지방까지 아울러 셋트로 여행상품을 끼워 팔다 보니 관광사업은 날로 발전하는 모습이다. 천년고도답게 볼거리가 풍부한데다가 반듯하게 정비된 도시는 고전과 현대를 조화시킨 느낌이 들어서인지 전 세계인에게 일본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를 꼽으라면 도쿄도 아니고 오사카도 아닌 교토가 첫 번째이다. 그만큼 도시 구성원들이 천년고도에 대한 “경(京)의식”이 강하다. 대표적인 “경과자(京菓子)”라든가 “경요리(京料理)”도 교토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葵祭)는 고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하타씨 일족과 관계가 깊은 가모씨(賀茂氏)와 조정(朝廷)의 행사로 당시 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주류는 귀족들이라 귀족 마츠리라고도 불렸으며 한편으로는 가모신사의 마츠리라해서 가모마츠리(賀茂祭)로도 불렸다. 아오이마츠리 유래는 ≪가모신사유래기≫에 따
푸르른 오월 하늘에 색색으로 펄럭이는 모형잉어(비닐 따위로 만든 잉어를 딱히 부를 말이 마땅치 않아 모형잉어라고 부름)들이 눈부시다. 5월이 되면 슬슬 일본의 하늘을 장식할 잉어들이 선보이고, 5월 5일은 그 고이노보리(잉어날리기) 절정의 날이다. 이때쯤 일본을 찾는 사람들은 아파트 베란다나 시골집 마당 장대에 매달린 잉어를 보게 될 것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아예 모형 잉어 축제를 하는 곳도 있다. 일본 가호쿠신보(河北新報) 4월 30일 자 보도에 따르면 미야자키 시로이시(宮城 白石市)에서는 무려 500마리의 잉어를 내달았다고 한다. 이렇게 대규모의 잉어날리기는 올해 7회째로 지난 2년간은 동북지방의 대지진으로 중지했다가 2년 만에 재개한 것이다. 주민들은 지진복구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으로부터 모형잉어를 기증 받았는데 개인과 단체로부터 약 600마리의 모형잉어를 받아서 이날 500개를 80미터 철삿줄 8열에 장식했다고 한다. 말이 500마리지 바람에 펄럭이는 잉어들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일대 장관이며 이를 보도하려고 전국에서 기자들이 몰려들고 관광객들도 앞다투어 몰려들어 지역경제 살리기에도 한 몫을 톡톡히 한다고 전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고
후쿠오카 탄광촌에 평범한 광부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야마모토 사쿠베이(山本作兵衛,1892-1984)씨. 탄을 캐는 아버지를 따라 일곱 살 무렵부터 형과 함께 갱내에 들어가 탄차를 미는 등 가계를 도우면서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사쿠베이 씨는 15살 때 야마우치 탄광에 입사하여 1955년 다가와시 이토탄갱의 폐광으로 퇴직할 때까지 약 50년간 18개의 탄광에서 청춘을 보냈다. 정년퇴직 후 그는 그림에 몰두했다. 자신의 50년 탄광 생활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탄광 그림은 놀랄만한 정확도와 치밀함으로 지금까지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탄광 기록화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쿠베이 씨는 일본에서 가장 큰 탄광도시 이즈카(飯塚)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쿠베이가 그림을 그리려고 한 것은 형과 함께 갱내에 들어가기 시작한 초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지인이 동생에게 선물한 가토기요마사의 무사 인형을 반복해서 그리기 시작한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소년기에는 일시적으로 광부를 그만두고 화가를 목표로 후쿠오카시의 페인트가게에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가정 형편상 결국에는 탄광 광부 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바람에 약 40년 동안은 붓을 잡을 여유가
135. 극히 절제된 전통가무극 노가쿠(能樂)를 관람하고… 오-오-잇(합창소리) 타타타탁(북소리) 오-오-잇(합창소리) 타타타탁(북소리) “북잽이들의 북 치는 소리도 절도가 있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 역시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내는 소리처럼 획일적인데다가 질러내는 소리가 각이 져서 마치 사무라이들의 칼싸움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말은 한국인들이 노가쿠(能樂)를 함께 보고 나오면서 내뱉은 첫마디이다. 나 역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 출연자들의 바로 코앞에 앉아서인지 유달리 북잽이의 절도 있던 손놀림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나 분라쿠(인형극) 등은 일본에서 여러 번 볼 기회가 있었지만 노가쿠 공연은 좀처럼 볼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얼마 전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처음 보는 기회를 얻었다. 일본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 타츠미만지로(辰巳滿次郞) 씨 등 노가쿠시(能樂師) 일행의 한국공연 소식을 알려준 천안 순천향대학 교수인 후지타 선생은 나와 오랜 지인으로 순천향대학에서 노가쿠 특강을 마친 뒤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공연이 있으니 함께 보자고 권유해와 보러 간 것이다. 노가쿠(能樂)는 1,000여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가무극으로 유네스코 세
사쿠라(벚꽃)가 온 나라에 지천이다. 그 꽃을 보고 즐기는 말이 한국에서도 보통명사화 된지 오래인데 이름하여 벚꽃(사쿠라)놀이이다. 일본에서는 사쿠라를 보고 즐기는 것을 하나미(花見)라고 한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꽃보기’이다. 하나미(花見) 속에 벚꽃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지만 하나미라고 하면 봄철 벚꽃놀이를 가리킨다. 벚꽃이 나라꽃(가을에 피는 국화는 천황가의 문양)인 일본사람들은 이 꽃이 피길 기다려 색색의 하나미벤토(벚꽃놀이 도시락)을 싸들고 사쿠라 나무 밑으로 몰려든다. 삼삼오오 가족단위 또는 회사 동료끼리 모여 도시락을 나누고 맥주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은 일본인의 연례행사 중 으뜸으로 꼽힌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꽃놀이 풍습은 나라시대(710-794)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꽃놀이 행사였는데 당시에는 주로 매화꽃놀이였다가 헤이안시대(794-1192)에는 서서히 벚꽃으로 바뀐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최고가집(最古歌集)인 만엽집(万葉集)에 벚꽃을 읊은 노래가 40수 (매화는 100수)나오다가 헤이안시대의 작품인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에서는 이 숫자가 역전된다. 따라서 헤이안시대부터 하나미(花見)란 거의 벚꽃을 가리키는 것으로
“금은도 번쩍이는 보석조차도 귀한 자식에 이르겠는가” -銀も金も玉も何せむに勝れる子に及かめやも,(万葉集 ⑤-803)- 후쿠오카현 남부 인구 4만여 명의 조용한 도시 가마시(嘉麻市) 누리집에는 만엽시인 산상억량(山上憶良, 660-733, 야마노위에노오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에 편찬된 만엽집万葉集, 만요슈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학이다. 천황으로부터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읊은 노래가 20권에 4516수(首) 실려 있다. 치쿠호(筑豊, 지방이름)에도 그가 지은 수십 수의 노래가 전한다.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던 치쿠호는 다자이후정청(太宰府政廳)이 있던 곳으로 세토내해 물길을 타고 바로 수도(나라 ‘奈良’)로 연결되던 곳이다. 당시 관내의 지방군수로 부임한 산상억량은 특히 빈궁문답가(貧窮問答歌)로 유명한 시인이다. 귀족이면서 항상 가난한 사람의 위치에 서서 그들의 슬픔을 노래하여 그들을 높은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산상억량이 백제출신이라는 점은 밝히지 않고 있다. 아니 밝히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