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담징스님의 맷돌로 일컬어지는 맷돌을 보기위해 후쿠오카 관세음사(福岡 觀世音寺)를 찾은 것은 2012년 2월 중순이었다. 후쿠오카는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지만 그날은 오전부터 함박눈이 펑펑 내려 그곳 주민들은 몇십 년 만의 서설이라며 반기고 있었다. 관세음사는 큐슈지방의 대표적인 고찰로 창건 시기는 686년으로 추정되며 나라의 동대사(東大寺), 관동의 약사사(藥師寺)와 더불어 일본의 ‘삼계단(三戒壇, 계를 주는 단)’이 설치되었던 주요 절이다. 또한, 이곳에는 698년에 주조된 교토 묘심사의 동종(銅鐘)보다 앞선 일본 최고(最古)의 동종과 함께 국보급 불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담징스님의 맷돌은 단연 돋보이는 유물이다. 절의 주지이자 서남학원대학 문학부교수인 타카쿠라(高倉洋彰) 씨의 《태재부와 관세음(太宰府と觀世音), 1996》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하면 “이 맷돌은 610년 고구려에서 온 승려인 담징이 처음 만든 것으로 이것이 그 실물이다. 이 맷돌은 식용의 가루를 가는 용도가 아니라 가람 건립 때 사용되는 적색안료인 ‘주(朱)’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밝히면서 일본의 맷돌 권위자인 미와(三論茂雄)씨의 ‘다자이부 관세
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 아오이마츠리, 7월17일 기온마츠리, 10월 2일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일본열도가 마츠리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교토는 특히 유명한 3대마츠리와 더불어 청수사, 금각사 등 이름난 절과 유적지가 많은 곳이라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거기다가 인접한 오사카와 나라 지방까지 아울러 셋트로 여행상품을 끼워 팔다 보니 관광사업은 날로 발전하는 모습이다. 천년고도답게 볼거리가 풍부한데다가 반듯하게 정비된 도시는 고전과 현대를 조화시킨 느낌이 들어서인지 전 세계인에게 일본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를 꼽으라면 도쿄도 아니고 오사카도 아닌 교토가 첫 번째이다. 그만큼 도시 구성원들이 천년고도에 대한 “경(京)의식”이 강하다. 대표적인 “경과자(京菓子)”라든가 “경요리(京料理)”도 교토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葵祭)는 고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하타씨 일족과 관계가 깊은 가모씨(賀茂氏)와 조정(朝廷)의 행사로 당시 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주류는 귀족들이라 귀족 마츠리라고도 불렸으며 한편으로는 가모신사의 마츠리라해서 가모마츠리(賀茂祭)로도 불렸다. 아오이마츠리 유래는 ≪가모신사유래기≫에 따
푸르른 오월 하늘에 색색으로 펄럭이는 모형잉어(비닐 따위로 만든 잉어를 딱히 부를 말이 마땅치 않아 모형잉어라고 부름)들이 눈부시다. 5월이 되면 슬슬 일본의 하늘을 장식할 잉어들이 선보이고, 5월 5일은 그 고이노보리(잉어날리기) 절정의 날이다. 이때쯤 일본을 찾는 사람들은 아파트 베란다나 시골집 마당 장대에 매달린 잉어를 보게 될 것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아예 모형 잉어 축제를 하는 곳도 있다. 일본 가호쿠신보(河北新報) 4월 30일 자 보도에 따르면 미야자키 시로이시(宮城 白石市)에서는 무려 500마리의 잉어를 내달았다고 한다. 이렇게 대규모의 잉어날리기는 올해 7회째로 지난 2년간은 동북지방의 대지진으로 중지했다가 2년 만에 재개한 것이다. 주민들은 지진복구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으로부터 모형잉어를 기증 받았는데 개인과 단체로부터 약 600마리의 모형잉어를 받아서 이날 500개를 80미터 철삿줄 8열에 장식했다고 한다. 말이 500마리지 바람에 펄럭이는 잉어들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일대 장관이며 이를 보도하려고 전국에서 기자들이 몰려들고 관광객들도 앞다투어 몰려들어 지역경제 살리기에도 한 몫을 톡톡히 한다고 전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고
후쿠오카 탄광촌에 평범한 광부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야마모토 사쿠베이(山本作兵衛,1892-1984)씨. 탄을 캐는 아버지를 따라 일곱 살 무렵부터 형과 함께 갱내에 들어가 탄차를 미는 등 가계를 도우면서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사쿠베이 씨는 15살 때 야마우치 탄광에 입사하여 1955년 다가와시 이토탄갱의 폐광으로 퇴직할 때까지 약 50년간 18개의 탄광에서 청춘을 보냈다. 정년퇴직 후 그는 그림에 몰두했다. 자신의 50년 탄광 생활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탄광 그림은 놀랄만한 정확도와 치밀함으로 지금까지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탄광 기록화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쿠베이 씨는 일본에서 가장 큰 탄광도시 이즈카(飯塚)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쿠베이가 그림을 그리려고 한 것은 형과 함께 갱내에 들어가기 시작한 초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지인이 동생에게 선물한 가토기요마사의 무사 인형을 반복해서 그리기 시작한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소년기에는 일시적으로 광부를 그만두고 화가를 목표로 후쿠오카시의 페인트가게에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가정 형편상 결국에는 탄광 광부 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바람에 약 40년 동안은 붓을 잡을 여유가
135. 극히 절제된 전통가무극 노가쿠(能樂)를 관람하고… 오-오-잇(합창소리) 타타타탁(북소리) 오-오-잇(합창소리) 타타타탁(북소리) “북잽이들의 북 치는 소리도 절도가 있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 역시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내는 소리처럼 획일적인데다가 질러내는 소리가 각이 져서 마치 사무라이들의 칼싸움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말은 한국인들이 노가쿠(能樂)를 함께 보고 나오면서 내뱉은 첫마디이다. 나 역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 출연자들의 바로 코앞에 앉아서인지 유달리 북잽이의 절도 있던 손놀림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나 분라쿠(인형극) 등은 일본에서 여러 번 볼 기회가 있었지만 노가쿠 공연은 좀처럼 볼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얼마 전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처음 보는 기회를 얻었다. 일본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 타츠미만지로(辰巳滿次郞) 씨 등 노가쿠시(能樂師) 일행의 한국공연 소식을 알려준 천안 순천향대학 교수인 후지타 선생은 나와 오랜 지인으로 순천향대학에서 노가쿠 특강을 마친 뒤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공연이 있으니 함께 보자고 권유해와 보러 간 것이다. 노가쿠(能樂)는 1,000여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가무극으로 유네스코 세
사쿠라(벚꽃)가 온 나라에 지천이다. 그 꽃을 보고 즐기는 말이 한국에서도 보통명사화 된지 오래인데 이름하여 벚꽃(사쿠라)놀이이다. 일본에서는 사쿠라를 보고 즐기는 것을 하나미(花見)라고 한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꽃보기’이다. 하나미(花見) 속에 벚꽃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지만 하나미라고 하면 봄철 벚꽃놀이를 가리킨다. 벚꽃이 나라꽃(가을에 피는 국화는 천황가의 문양)인 일본사람들은 이 꽃이 피길 기다려 색색의 하나미벤토(벚꽃놀이 도시락)을 싸들고 사쿠라 나무 밑으로 몰려든다. 삼삼오오 가족단위 또는 회사 동료끼리 모여 도시락을 나누고 맥주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은 일본인의 연례행사 중 으뜸으로 꼽힌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꽃놀이 풍습은 나라시대(710-794)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꽃놀이 행사였는데 당시에는 주로 매화꽃놀이였다가 헤이안시대(794-1192)에는 서서히 벚꽃으로 바뀐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최고가집(最古歌集)인 만엽집(万葉集)에 벚꽃을 읊은 노래가 40수 (매화는 100수)나오다가 헤이안시대의 작품인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에서는 이 숫자가 역전된다. 따라서 헤이안시대부터 하나미(花見)란 거의 벚꽃을 가리키는 것으로
“금은도 번쩍이는 보석조차도 귀한 자식에 이르겠는가” -銀も金も玉も何せむに勝れる子に及かめやも,(万葉集 ⑤-803)- 후쿠오카현 남부 인구 4만여 명의 조용한 도시 가마시(嘉麻市) 누리집에는 만엽시인 산상억량(山上憶良, 660-733, 야마노위에노오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에 편찬된 만엽집万葉集, 만요슈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학이다. 천황으로부터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읊은 노래가 20권에 4516수(首) 실려 있다. 치쿠호(筑豊, 지방이름)에도 그가 지은 수십 수의 노래가 전한다.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던 치쿠호는 다자이후정청(太宰府政廳)이 있던 곳으로 세토내해 물길을 타고 바로 수도(나라 ‘奈良’)로 연결되던 곳이다. 당시 관내의 지방군수로 부임한 산상억량은 특히 빈궁문답가(貧窮問答歌)로 유명한 시인이다. 귀족이면서 항상 가난한 사람의 위치에 서서 그들의 슬픔을 노래하여 그들을 높은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산상억량이 백제출신이라는 점은 밝히지 않고 있다. 아니 밝히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공산이 크다.
야마구치현 하기시(山口縣 萩市) 를 찾은 것은 죠카마치(城下町)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죠카마치란 일본국어사전에서 “전국시대로부터 에도시대에 걸쳐 다이묘(大名)의 거성(居城)을 중심으로 한 도시”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쉽게 말해서 오래된 일본 전통가옥을 구경 할 수 있어 고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죠카마치는 하기시 말고도 성주(城主)가 살던 곳은 어디에나 있으며 지금은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지방정부에서도 이들 고건축물을 복원하고 당시의 거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등 관심이 많다. 무사 시절에는 북적였는지 모르겠지만 인구 5만의 하기시는 조용하다 못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처럼 고요했다. 하기시내를 전망 할 수 있는 지월산 등산로에서 만난 노년의 아저씨는 천년고도 교토가 찾아드는 관광객으로 번잡해졌다면서 더 조용한 곳을 찾아 하기시로 이사 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 냄새가 물씬 풍기면서도 번잡스럽지 않은 곳이 하기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전통가옥을 살피다가 뜻밖에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으니 그 이름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였다.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토기념관과 고택에 이르는 곳에는 이토의 밀랍인
사가성혼마루역사관(佐賀城本丸歷史館)을 찾아가던 날은 볼을 스치는 2월의 바람이 아직 쌀쌀했다. 후쿠오카 옆 도시 사가현은 일본열도의 남쪽 지방이라고는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조용한 중소도시의 한적함이 한눈에 느껴지는 사가 시내는 자동차들의 속도도 느리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그다지 바쁘지 않다. 사무라이 시절 성주가 살던 사가성(佐賀城)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조선시대 원님이 살던 곳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금은 새로 말끔하게 단장하여 역사자료관으로 쓰는 사가성의 본관 건물 안에는 때마침 꽃꽂이 전시회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일본에서는 사철 꽃꽂이 전시회가 열리지만 특히 1월과 2월에는 신년 축하 의식으로 이르는 곳마다 꽃꽂이 전시회가 한창이다. 흔히 이케바나(いけばな, 生け花、活花、揷花)라고 불리는 일본의 꽃꽂이는 다른 말로는 카도(かどう,華道, 花道)라고 한다. 일본말로 ‘카도(華道)’라고 부를 때에는 꽃꽂이보다는 넓은 범위로 ‘구도(求道)’의 냄새를 풍긴다. 이케바나에는 여러 유파(流派)가 있으며 양식이나 기법 따위가 유파별로 각양각색이다. 일본 이케바나의 유래는 불교에서 꽃을 바치는 공화(供花)에서 그 기
*2011년 11월 9일부터 수원일보에서, 2012년03월07일부터는 제주해피코리아뉴스에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국내외로 뛰어 다니며 그동안 사회에서 조명 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내어 한분 한분께 드리는 '헌시'를 짓고 이분들의 일생을 요약하여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라는 책으로 엮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남성 독립운동가들은 12,000여명이 훈포장을 받았지만 여성들은 200여명 밖에 훈포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200여명의 이름조차 모르는 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하면 '유관순열사' 외에는 더 이상 모르는 우리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변에 널리 소개하여 이분들의 헌신적인 삶을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저의 작업은 200여명을 모두 알리는 그날까지 이어 갈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청주에 사시는 분이 여성독립운동가의 자료를 보내 오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가지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제게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분들은 저를 불러 주십시오. 서간도의 북풍한설 속에서 오로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생을 건 이분들의 삶을이해하고 고난극복의 숭고한 정신을 함께 나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