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소[洞簫]’라는 말은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 우리가 쉽게 만나는 노래는 서도소리 초한가(楚漢歌)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산(算) 잘 놓는 장자방(張子房)은 계명산 추야월에 옥통소를 슬피 불어 팔천제자(八千弟子) 해산 할 제, 때는 마침 어느 때뇨. 구추삼경(九秋三更) 깊은 밤에 하늘이 높고 달 밝은데, 외기러기 슬피 울어 객(客)의 수심(愁心)을 돋워 주고 장자방의 사향가(思鄕歌) 퉁소가락이 얼마나 애절했으면 항우(項羽)의 8천 군사가 일제히 전의(戰意)를 잃고 항복을 하고 말았을까? 퉁소를 퉁수, 또는 퉁애라고도 한다. 이 악기는 단소에 비해 보다 굵고 긴 세로악기여서 저음을 내고 있지만, 대금처럼 청공(淸孔)이 있어서 그 음색이 매우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함께 불기 시작하면 흥겹고 장쾌한 가락이나 리듬에 모두가 하나가 되는 힘을 지닌 악기이기도 하다. 원래 소(簫)라는 악기는 위가 열려있고 밑은 닫혀 있는 세로 부는 관악기이다. 위는 열려있고 아래는 막혀 있는데 소리가 날까? 가령 물병이나 술병에 입술을 대고 바람을 넣어도 소리가 나는 원리와 같다. 그러나 퉁소는 위와 아래가 통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지난 주 단소의 재료와 구조, 그리고 소리 내는 요령에 관하여 간단히 소개하였다. 단소는 퉁소에 비해 작은 소(簫)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재료로는 오죽(烏竹), 황죽(黃竹), 소상(瀟湘)반죽(半竹)이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 죽관의 제1공은 왼손의 엄지, 제2공은 왼손의 집게, 제3공은 왼손의 장지, 제4공은 오른손의 장지, 제 5공은 항상 열어놓고 연주한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소리 내는 요령은 위아래의 입술을 최대한 넓혀서 - 휘 - 하고 바람을 넣으며 단소를 드는 각도도 다양하게 시도해 볼 것과 무엇보다도 약하고 부드럽게 바람을 넣어야 소리가 잘 난다는 안내를 하였다. 국악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대두 될 오늘을 기다리며 나는 학생들에게 엄한 단소의 실기 교육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단소는 소리내기가 약간 까다로운 반면, 한번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그 소리에 반해 쉽게 놓고 싶지 않은 악기이다. 그래서 단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소를 오래 사귄 친구와 같은 악기라고 말한다. 단소가 언제부터 우리 음악에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악학궤범≫이나 영조 때의 ≪증보문헌비고≫에도 언급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민간에
단소는 짧은 취악기(吹樂器, 입으로 불어서 관 안의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를 내는 악기)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길이는 40여 cm정도, 내경의 지름이 1.2~1.3cm 정도여서 그 이름처럼 작은 악기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세로 부는 악기인 퉁소가 있는데, 퉁소는 단소보다 굵고 긴 형태이며 단소는 퉁소에 비해 작은 소(簫)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단소의 재료는 검은 색깔의 대나무인 오죽(烏竹)이나 오래된 황죽(黃竹), 또는 소상(瀟湘)의 반죽(半竹)이라 하여 유명 강가에서 자라고 있는 얼룩무늬의 대나무가 많이 쓰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재료는 황죽이다. 그런데 마디가 촘촘하지 않은 일반 대나무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거나 더워질 경우, 또는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갈라지기 쉽게 때문에 비교적 단단한 재질의 쌍골죽이 악기의 재료로 좋다. 이러한 쌍골죽은 대밭에서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일종의 비정상적인 대나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제품을 위한 재료로 적합하지 않기에 일찍 베어 버리기 일쑤다. 때문에 주인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쌍골죽 만나기는 쉽지 않다. 단소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윗부분에 U 자 형태의 취구
한국의 관악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큰 소리를 내는 악기가 곧 태평소(太平簫)이다. 소리가 크고 높아서 실내음악에는 적합지 않고 야외 음악에 주로 쓰인다. 그래서 종묘제례악의 헌가음악이나 옛 군악인 대취타에 편성되고, 풍물이나 절에서 재를 올리거나 작법(춤)에 또는 시나위 음악에도 쓰이고 있다. 태평소를 호적, 쇠납, 소이나, 쇄나, 날라리 등으로도 불렀다. 태평소 역시 소리를 내는 서(舌, reed)와 관으로 구분되는데, 소리를 내는 서의 크기는 피리에 비해 매우 작아서 2cm정도이며, 관은 윗부분은 좁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넓어지며 나무 관 끝부분에 나팔꽃 모양의 동팔랑을 달아서 소리가 널리 퍼지도록 하였다. 전체 길이는 35cm 정도로 세로 부는 관악기의 하나이며 관은 오메, 산유자, 화류 등 성질이 강한 나무 관에 구멍은 뒤에 1공, 앞에 7공이 있어 모두 8공이다. 연주법은 피리와 거의 같으나, 피리에 비해 서가 작기 때문에 서가 모두 입 속으로 들어가는 점과 같은 음자리에서 한 음계 위아래 음을 피리처럼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지 못하는 점은 다르다고 하겠다. ≪악학궤범≫에 당악기로 소개되어 있고, 율은 향피리와 같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음공
지난주에는 심상건의 1920~30년대의 공연활동이나 방송활동 이야기, 가야금산조를 비롯하여 풍류, 병창, 단가, 판소리, 시나위, 민요, 기악, 무용반주 등 취입 음반이 40여 매를 넘고 있는 점으로 당시 대중들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 광복 후에 녹음한 30여분 소요의 산조가《5·16 민족상》의 본선 지정곡이 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는 이야기, 45년전 이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학생이 바로 심상건 산조 전 바탕을 재현하게 된 서원숙 교수라는 이야기, 심상건이 말한 풀고 죄는 맛과 음악미학의 대가 한슬릭(Hanslick)의 긴장과 이완의 표현이 맥을 같이 한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심상건류 가야금 산조음악이 다른 명인들의 음악과 다른 점, 즉 음악적 특징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그 동안 국악연구자들은 심상건의 산조음악에 관심을 갖고 학위 논문을 비롯한 연구 결과물들을 발표해 왔다. 논의해 온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각 음반마다 담겨있는 산조의 가락은 대부분이 동일하거나 유사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가야금산조는 전라도제나 충청도제로 구분되는데, 충청제의 심정순 산조는 심상건과 심재덕이 이어 받았으나 맥이 끊겨 전승이 단절되었다는 점, 심상건의 4촌 동생들, 즉 심정순의 아들 딸들은 심재덕, 심매향, 심재민, 심화영 등인데, 막내동생 심화영(1913~2009)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서산에서 판소리와 춤 등을 전수하다가 타계했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심정순의 큰 아들 심재덕은 5남매를 두었는데, 그 중 막내가 대중가수 심수봉이란 이야기, 그리고 줄풍류란 거문고, 가야금, 양금과 같은 줄악기들 중심의 합주음악이란 점, 정부에서는 이리와 구례지방의 풍류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이의 보존과 전승을 관장하고 있다는 점, 국립국악원에서는 줄풍류를‘영산회상’또는‘별곡’이라 부른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 속풀이에서는 심상건의 음악활동에 관해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겉으로 들어난 1920~30년대의 일제강점기에 심상건이 활동해 온 공연내용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소개되어 있어서 그가 어떤 곳에서 어떤 공연활동을 했는
지난주에는 심상건류의 가야금 산조와 관련하여 산조(散調)는 1890년경 판소리의 음악적 영향으로 만들어진 기악 독주곡 형식의 음악이란 점, 산조의 형식은 만(慢)-중(中)-삭(數)의 세틀형식과 맥을 같이 하는 형식이어서 시대성을 지닌 양식이란 점, 산조는 연주자의 기법이나 표출력이 최고도로 발휘되어야 하는 예술음악이란 점, 종래의 헛튼가락이라고 했던 의미는 이제 널리 확산되어 나가는 가락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산조음악의 생명은‘자유분방함’이나‘즉흥성’인데, 지금은 고정된 가락을 연주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말하였다. 우리가 지금 자주 대하고 있는 가야금산조는 전라도제나 충청도제로 구분할 수 있다. 가야금산조를 창시했다는 김창조(1856-1919)계열, 가령 김창조에서 한성기를 통해 김죽파로 이어지고 있는 산조라든가, 김창조-최옥삼-함동정월로 이어지는 산조, 또는 김창조-강태홍-김춘지-구연우로 이어지는 산조, 그리고 김창조에서 시작된 가락이 안기옥-정남희-김윤덕으로 이어지고 있는 산조라든가 김병호를 통해서 내려오는 산조 등 대부분이 전
지난 11월 22일 밤, 경기국악당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심상건류의 가야금 산조 발표회가 열렸다. 단국대 서원숙 교수가 단절위기를 맞은 심상건의 산조음악을 재현하여 청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은 것이다. 서원숙 교수는 이미 국악고교 재학 때에 5·16 민족상 대통령상을 받음으로써 그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단국대와 이대 대학원을 졸업 후 본격적인 연주가로, 대학의 교수로 활동범위를 넓혀 왔다. 그는 국내외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20여회 이상 열었는가 하면, 유명 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도 십 수차에 이른다. 평생 한번 갖기도 어려운 독주무대를 생각해 보면 대단한 열정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수학을 했는가 하면 플로리다 대학교나 알라바마 대학교에서 교환교수를 지냈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현재도 그는 가야금 연주자들의 모임인 《금우악회》를 이끌고 있는 한편, 숨 끊어진 음악들의 재현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여류 국악인이다. 국악속풀이 86부터는 심상건류 가야금산조와 관련하여 심상건은 어떤 사람이고, 이 음악의 전승과정이
신라의 3죽 중에서 가장 작은 악기로 가장 높은 소리를 내는 악기가 바로 소금(小)이다. 서양 악기에 피콜로와 비슷하다. 소금은 주로 궁중의 합주음악에 쓰였을 뿐, 독주나 노래 반주 등에는 편성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민속음악이나 줄풍류에도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창작 국악곡에서는 높은 음역을 담당하는 악기로 또는 독주악기로 폭넓게 쓰이고 있다. 조선조 성종 때의 유명한 악서, 악학궤범의 악기조에는 소금의 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없이“소금의 제도는 대금과 같다”고 하였으며, 속악진설도설(俗樂陳設圖說)을 보면 소금은 당시의 종묘 영녕전(永寧殿) 헌가에만 편성될 뿐, 모든 속악진설에는 언제나 당적(唐笛)이 편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적이란 중국에서 들어온 작은 횡적을 말한다. 악학궤범 이후에도 당적은 문헌에 계속 그 이름이 보이고 있지만, 소금은 거의 그 이름을 찾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조 후기의 각종 의궤(儀軌)와 1930년대 이왕직아악부에서 편찬한 아악생교과철 의 악기편에도 당적의 이름만 보일 뿐, 소금은 빠져 있다. 소금은 악학궤범이후
지난 주 대금의 소개에서 지공(指孔)이 모두 6공이란 점, 그런데, 대금에는 청공(淸孔)이 하나 더 있어 중금이나 소금과는 다르다는 점, 청공은 갈대의 속청을 붙여 대금의 아름다운 떨림 음색을 만들어 내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는 점, 바람을 넣을 때에는 입술 모양이‘휘-’가 되도록 펴야 한다는 점, 위로부터 1.2.3공은 왼 손의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 약손가락으로 4.5.6공은 오른손의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 약손가락의 순으로 지공을 여닫는다는 점, 취법에는 저취, 평취, 역취 등 세 종류가 있어서 하나의 악기가 위 아래의 음색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음색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소개하였다. 대금의 쓰임은 매우 광범위한 편이다. 대금은 그 청울림에 의한 음색이 일품이어서 독주 악기로 정평이 나 있다. 평조회상중에서 상령산이나 또는 청성잦은한잎과 같은 곡은 대금의 독주곡으로 유명한 곡들이다. 독주 음악뿐이 아니다. 정악 전반의 합주음악에도 대금의 자리는 매우 크다. 대금은 정악에만 편성되는 악기가 아니다. 민속악의 대소합주에도 대금이 빠지면 음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