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백정기(白貞基, 1896. 1. 19(음)~1934. 6. 5) 의사(義士)는 1896년 1월 19일(음)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농가(農家)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구파(鷗波), 자(字)는 용선(溶善)이며, 수원 백씨(水原白氏)이다. 어릴 때 엄친(嚴親)을 여의고 편모(偏母) 슬하에서 성장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과는 달리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여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독학(獨學)으로 공부를 하였으며 의리가 강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어린 소년의 가슴에 항일의식이 싹트다 의사(義士)가 15세가 되던 1910년에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어린 소년의 가슴에는 울분과 굴욕감을 가져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일념(救國一念)이 싹트고 있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항일의식은 이미 10대 소년시절부터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며 일제를 타도하는 일에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하였다. 시대적 갈등과 마찰 속에서 스스로 고민에 빠지곤 했던 의사는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정읍(井邑)같은 시골에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에는 사람도 있고 문화도 있고 기댈 곳
[우리문화신문 = 이한영 기자] 세브란스 병원 암병동에서 본관으로 연결 된 통로 벽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의 의사들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무심히 지나면 그저 의사에 지나지 않을 인물들이지만 꼼꼼하게 찬찬히 살펴보면 이들에게서 오늘의 의사와 다른 점을 살필 수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는 사실이다. ▲ 이태준 독립운동가 먼저 이태준 (1883-1921)을 보면 독립운동을 위해 몽골로 망명하여 국왕의 주치의로서 몽골인의 질병퇴치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울란바토르에 기념공원이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 박서양 독립운동가 그런가 하면 박서양(1885-1940)은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은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북간도에서 독립군 군의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 김필순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김필순(1878-1919)은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의학서를 번역 했으며 중국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이 건립되던 시절은 아직 일제의 마수가 뻗치기 전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용정의 3.13 만세운동에 희생된 이들에게 이한꽃 나는 보았네 그대들 무덤에 꼿꼿이 세운 빗돌에 새겨진 붉은 맹세를 나는 들었네 열일곱 꽃다운 그대들 독립을 향한 절규의 목소리를 나는 맹세했네 결단코 두 번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아무도 찾지 않는 그대들 외로운 무덤가에 서서 굳게 굳게 맹세했네 ▲ 간도 독립운동의 대부(大父) 김약연 선생 1919년 3월 1일, 조국의 산하에서 일제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이 자주민임을 선포한 우리겨레의 함성은 중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포사회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물론 고국의 31 만세 운동 이전부터 중국 각지에는 항일우국지사들이 모여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지만 특히 고국의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3월 13일에 간도 용정에서는 타오르는 불길 같은 만세운동이 있어났다. 간도의 3.13 만세운동 1년 전인 1918년에는 간도의 대부(大父) 김약연 선생을 중심으로 여 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등 38인이 고국의 31독립선언서보다 빠른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한 기틀 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선생님! 입춘도 지났고 꽃피는 춘삼월이 다가오지만 아직도 쌀쌀한 늦겨울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며칠 전 한번 가보고 싶었던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을 방문 하였습니다. 관계자분께서 독립운동가분들께 드리는 100년편지를 부탁하시기에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승낙을 하고 선생님께 서신을 드립니다. 재작년 선생님의 순국70주년추모 사업으로 저명한 학자분들과 선생님의 후손 분들이 중심이 되셔서 추모논총을 발간하였습니다. 또한 부산에서 백산상회 건립 100주년 사업으로 학술대회를 개최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학술대회는 참석을 하지 못했지만 후에 백산상회 자리에 건립된 기념관을 방문하여 선생님 관련 자료를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국가보훈처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국외사적지 탐방 준비를 앞두고 있었는데 마침 부산 MBC에서 선생님 관련 다큐영상을 촬영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의령 생가 및 백산상회, 그리고 중국 흑룡강성으로 촬영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래도 사람이 있는 풍경이 좋겠다는 생각에 사적지 탐방단에 촬영 팀도 동행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장진홍(張鎭弘,1895. 6. 6~1930. 6. 5(음)) 선생은 1895년 6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문림리(文林里)에서 아버지 장성욱(張聖旭)과 어머니 순천(順天) 김씨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14년 3월에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교하여 군사지식과 학문을 배운 후 상등병까지 승진하였으나 일제 치하에 있는 군대에서 더 이상 복무하기가 양심적으로 용납되지 않아 1916년 제대하고 말았다. 같은 해 12월에 서울로 이사하여 향리 출신인 이내성(李乃成)의 권유로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경의 감시가 점점 심해져 활동이 더 이상 어렵게 되자 1918년 만주 봉천(현 심양)으로 건너갔다. 만주에 도착한 의사는 조선광복단 소속의 이국필,김정묵 등과 접촉하여 독립운동 방략에 관하여 논의한 결과 보다 더 과감하고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정예화된 독립군을 양성, 후일 국내로 진격하여 일제와 무력항전을 전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이필국 등과 함께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한인
[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고성의 독립운동 역사와 운동가를 정리한 《고성독립운동사》가 니왔다. 고성군(군수 최평호)은 고성 출신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밝히고 널리 알리기 위해 그들의 행적을 살핀 《고성독립운동사》를 펴냈다고 밝혔다. 고성문화원(원장 도충홍)이 주관한 고성독립운동사 발간은 공동저자인 정해룡, 하기호 작가의 2년여 동안에 걸친 방대한 자료수집과 각고의 집필 노력 끝에 결실을 맺었다. 《고성독립운동사》는 총 4장 271쪽 분량으로 1장 31운동의 배경과 전개, 2장 고성지역의 31운동 전개, 3장 고성의 독립저항운, 4장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 개인약전으로 구성됐다. 책은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수록해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 역사의 발자취를 담는 한편 고성 출신의 독립운동가도 함께 실어 고성이 충국의 고장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군 관계자는 국권침탈의 억압과 핍박 속에서도 굳건히 항일독립정신을 이어간 우리 지역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리고 후세에 유용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정이형(鄭伊衡,1897. 9. 16~1956. 12. 10) 선생은 1897년 9월 1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화하리(化下里)에서 아버지 정효기(鄭孝基)와 어머니 수원 백씨(水原白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호는 쌍공(雙空)이며, 본명은 원흠(元欽)이나 이명인 이형(伊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재산이 넉넉하고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부친의 덕택으로 선생은 어려서부터 독선생(獨先生)을 모시고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에게 한학을 가르쳐준 사람은 김평식(金平植)이었는데 그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 후일 만주로 망명하여 대동향약(大東鄕約)을 운영하다가 3.1운동 이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군부(義軍府) 등 복벽주의(復?主義) 독립군 단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었다. ▲ 정이형 선생 따라서 선생은 그로부터 한학과 더불어 복벽적 항일의식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근대적 민족의식을 수용하였다. 그것은 한말 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원으로 활동하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독립군에게 군자금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최근 방한 한 제니퍼 L. 테일러는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을 만나 할아버지 앨버트 테일러의 유품 일체와 딜쿠샤 관련 자료를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앨버트 테일러는 AP통신의 한국특파원으로 3.1 독립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세브란스 병원 침상에서 발견해 서방언론에 알렸던 인물이다. 그의 손녀 제니퍼 L. 테일러는 할아버지의 유품과 딜쿠샤 관련 유물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하여, 2016년 3월 2일 오전 11시에 기증증서를 수여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장 강홍빈과 제니퍼 테일러 기증수여식 ▲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제니퍼 L. 테일러는 할아버지의 유품과 딜쿠샤 관련 자료 기증으로 3.1 독립운동을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와 그가 거주했던 가옥 딜쿠샤를 일반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매우 뜻 깊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기증한 제니퍼 테일러(Jennifer Taylor)의 자료들은 앨버트 테일러가 사용한 담배파이프, 3.1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편지, 호박 목걸이의 저자 메리 테일러의 호박 목걸이, 딜쿠샤 내부사진가 관련 문서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어제 3.1절, 구파발에서 녹번에 이르는 국도를 지나는 사람들은 국도변에 걸린 태극기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었을 지 모른다. 실제로 아는 사람이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와 '국기 불량'이 아니냐고 흥분해 하는 사람이 있엇을 정도 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태극기는 은평구에서 3.1만세운동 당시 쓰던 진관사에 보관된 피묻은 태극기를 상징화 한 것이다.독립만세를 부르는 관중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던 일제 경찰들에 굴하지 않고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동포들이 흘리던 피가 고스란히 태극기에 묻어 그날의 참상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 있는 태극기는 2009년 진관사 칠성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3호) 해체 복원 조사 중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태극기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변하고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되었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크기는 가로 89㎝, 세로 70㎝, 태극의 직경은 32㎝이다. 이 태극기의 4괘는 현재의 국기와 비교하면 리ㆍ감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이는 194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하여튼 철저히 나라일 밖에 모르는 분이셨어요. 한번은 중경에서 큰아들이 결핵에 걸렸는데 마이신이 아주 비쌌을 때였지요. 중경은 1년에 안개가 4~5개월이나 껴서 햇볕이 아주 귀하여 결핵환자에게는 안 좋은 환경이지요. 거기다가 중일전쟁 상황이라 영양상태도 나빠서 더욱 치료가 어려웠을 때인데 큰아들에게 마이신 주사 한 대도 못 맞히고 결국 결핵으로 죽게 됩니다. 그때 백범 선생은 임시정부 살림을 맡아 독립자금을 쥐고 계셨지만 그 돈을 아들의 마이신 주사 한 대도 쓸 수 없다고 하실 만큼 공과 사의 선을 분명하게 긋던 분입니다. 이 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 2015, 서울시》에서 김구 주석에 대한 기억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대한 김자동 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의 답이다. 김자동 회장은 어린 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자란 산증인으로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1846~1922)이다. 동농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에 중추원 의장을 지낸 분으로 1919년 항일 비밀결사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10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