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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를 사랑한 푸른 눈의 여인 엘리자베스 키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김창희가 《가도 가도 왕십리》에서 말하고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한국인인데, 딱 1명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스코틀랜드 애버딘셔에서 태어난 푸른 눈의 여인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입니다. 키스가 어떻게 왕십리에? 흥미가 바짝 당기지요? 키스의 언니 엘스펫은 1910년대 일본에서 발행되고 있던 <뉴 이스트 프레스> 편집인 존 로버트슨 스콧의 아내입니다. 엘스펫은 호기심 많고 독신으로 지내던 동생을 1915년 동경으로 불러 같이 살았습니다. 두 자매는 1919. 3. 28. 한국을 방문합니다. 둘은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의 인상을 엘스펫은 글로, 키스는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두 자매의 여행기는 1946년 《Old Kore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엘스펫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나무 하나 없는 야트막한 언덕의 경치는 원시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봄은 일러서 겨우 나온 볏잎은 약간의 푸른 빛을 보일 뿐이었고, 동산들은 그 둥그런 모습이 마치 오래된 한국 도자기를 닮아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붉은 해가 올라올 무렵,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땅은 옛날 도공들이 사용했을 듯하게 질펀했고, 끝없이 이어지는 논밭 사이로 가느다란 농로가 이어졌다 사라졌다 계속되고 있었다. 가끔 여기저기에 초가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기차 안에서 보기에는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버섯들의 군락처 같았다.” 동산의 둥그런 모습을 보고 한국 도자기를 떠올리고, 모여있는 초가집들을 보고는 버섯 군락처를 연상하다니, 엘스펫은 작가로서 역량이 충분히 있었네요. 이들은 동대문에서 낙산으로 올라가는 서울 성곽 바로 바깥의 감리교 의료선교회관에 숙소를 정함으로 왕십리와 연을 맺습니다. 당시 이곳은 감리교 선교사들이 서울 동부 지역의 선교 거점으로 설정한 곳으로, 이곳에는 동대문교회와 나중에 이대부속 동대문병원으로 승계된 동대문부인병원이 있었기에 의료선교회관도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자매들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는 3월 1일 점화한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때입니다. 그래서 자매들의 책에는 만세운동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확성기 소리가 멈추자 숨겨 갖고 있던 태극기를 일제히 휘두르며, ‘독립 만세, 독립 만세’를 크게 부르며 춤을 추며 길로 나갔다. 함성이 터지면서 군중은 모이고 헤어지고 또 모이면서 질서 정연하게 서울의 대로를 행진했다. 양반, 선비들,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 상인들, 막노동자, 거지, 심지어는 술집 여자들까지, 계급의 상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키스 자매는 3.1만세운동에 크게 공감하여 이화학당 교장과 함께 감옥에 갇힌 한 학생을 면회하기도 했는데, 글에서 여학생을 ‘Ruth’라고 한 점과 기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유관순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여학생에 대해 묘사한 부분도 보지요. “학교에서 루스라고 불리는 이 여학생은 반질거리는 까만 머리를 등 뒤로 땋아 내렸다. 기품이 고고한 얼굴이었고, 치아는 하얗고 뺨은 불그스레했으며 새까만 눈동자는 반짝거렸다. 슬픈 표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환희에 넘친 표정이었다. 여학생은 왜 자기가 학교의 명령을 어기고 독립운동에 참가했는지, 또 어떻게 체포되었는지 말했다.” 두 자매가 바로 동대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숙소를 정하였기에, 키스의 그림에는 동대문이 많이 나옵니다. 창희는 키스의 그림을 본 소감을 이렇게 말합니다. “작품 하나하나는 그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갖고 있던 페이소스를 바탕에 깔고 있다. 어떤 때는 식민지의 우수 어린 색채가 화면을 지배하다가도, 어떤 때는 그가 만난 한국인들을 신뢰와 애정으로 지켜보는 조용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그가 접한 한국인들의 일상 속에 녹아 들어가 함께 즐기는 흥겨운 기분이 화면 전체에 배어 나오기도 한다.” 키스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날마다 스케치 여행을 나갑니다. 그리고 원래 계획한 3달이 다 차서 엘스펫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도, 키스는 혼자 남아 그해 가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국의 이곳저곳을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키스가 한국을 ‘My Beloved Korea’라고 표현한 데서, 그녀가 한국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이런 키스는 1921년 9월에, 또 1934년 2월에 국내에서 전시회도 갖는데, 키스의 전시회 소식은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조선일보 보도 제목은 ‘영국 여류화가의 손으로 재현되는 조선의 향토색’이네요. 이렇게 한국을 사랑한 키스는 6.25 전쟁으로 한국을 다시 찾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1956년 세상을 떴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한국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1958. 8. 17.자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키스의 또 다른 언니인 카이스가 키스의 뜻이라며 키스가 남긴 30파운드를 주한 영국대사관을 통하여 우리 외무부로 보내왔습니다. 한국 아동들의 구호사업에 써달라고요. 정말 죽어서도 코리아를 사랑한 푸른 눈의 여인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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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나 오늘 토박이말]떼구름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오늘도 해가 나긴 했지만 하늘엔 구름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비가 오기도 할 거라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날마다 다른 그림을 그려내는 하늘을 보며 마음에 쉼을 얻곤 합니다. 구름이 한두 조각 떠다니지만, 또 어떤 날은 크고 작은 구름이 한데 뭉쳐 큰 무리를 이루며 하늘을 덮을 듯 밀려올 때가 있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토박이말은 바로 이처럼 커다란 구름 모습을 나타내는 '떼구름'입니다. '떼구름'은 '떼'와 '구름'이 만난 말입니다. '떼'는 '무리'를 뜻하는 아주 살가운 우리말이지요. '양 떼', '오리 떼', '개미 떼'처럼 여럿이 모여 무리를 이룬 모습을 가리킬 때 씁니다. 말집(사전)에서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떼를 이룬 구름 《표준국어대사전》 커다랗게 무리 지어 있는 구름. 또는 무리 지어 모여드는 구름 .《고려대한국어대사전》 두 가지 풀이를 아울러 보면, '떼구름'은 낱낱이 흩어져 있지 않고 여럿이 한데 뭉쳐 있거나, 마치 큰 물결처럼 한꺼번에 몰려드는 구름 무리를 일컫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먹구름'이나 '비구름'이라고 부르는 구름들이 하늘을 뒤덮을 때, 그 모양새가 바로 '떼구름'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떼구름'은 구름의 빛깔(검은지 흰지)이나 구실(비를 내릴지 말지)보다는, '여럿이 똘똘 뭉쳐 있는 모양새' 에 마음을 둔 말이랍니다. 이 멋진 말은 우리 옛글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큰 문장가였던 송강 정철 선생이 지은 가사 '성산별곡'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공산(空山)에 쌓인 잎을 삭풍(朔風)이 거두 불어 떼구름 거느리고 눈조차 몰아오니 겨울바람이 구름을 하나씩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떼구름'을 '거느리고' 몰려온다는 대목에서 엄청나게 큰 겨울 하늘의 힘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흩어진 구름이 아닌, 하늘 한쪽을 가득 메운 구름의 무리가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나날살이에서는 이렇게 써보세요. '떼구름'은 우리 눈앞의 하늘을 나타낼 때 아주 알맞게 쓸 수 있습니다. 갑자기 떼구름이 몰려와요. 비가 오려나 봐요! 하늘 좀 봐. 꼭 양 떼가 몰려가는 것처럼 하얀 떼구름이 정말 멋지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드는데, 그 위로 시커먼 떼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어찌나 무섭고도 아름답던지 몰라. 그저 '구름 많다'고 하기에는 아쉬운 날이 있습니다. 커다란 구름이 무리 지어 하늘을 채우거나, 큰 힘으로 밀려오는 듯한 모습을 보거든 반갑게 그 이름을 불러주세요. "와, 떼구름이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 줄 때, 하늘은 우리에게 더욱 크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만난 '떼구름'이라는 말, 잊지 마시고 곁에 있는 분들에게도 꼭 나누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