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언젠가 박 과장이 이렇게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김 과장은 여자에 너무 약한 것 같아. 술집 아가씨는 술집에서 술을 따르면 되는 것이요. 괜히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격에 안 맞는 일이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어리석은 짓이요. 술집에서 만난 아가씨에게 절대로 정(情)이나 명함을 주어서는 안 돼요. 나중에 괜히 귀찮아지지요.” 그러나 이 아가씨는 예외일지도 모른다. 박 과장의 경험에서 나온 조언은 존중하지만, 세상에 예외 없는 법칙은 또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 아가씨는 비록 뿌리는 진흙 속에 내리고 있지만 심성은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한 송이 연꽃일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술을 한 잔 더 마신 뒤 김 과장이 말했다. “수련이, 술집 아가씨에게는 정을 주지 말라는 말을 알고 있지만 나는 수련이를 그저 술 따르며 웃음을 파는 보통 여자로는 보고 싶지 않아.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저도 선생님을 보통 손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대개 손님들은 저희들을 뭐라고 할까요. 노리갯감이나 감정이 없는 물건처럼 대하거든요. 그러나 선생님은 달랐죠.” 말없이 듣고 있던 김 과장이 말을 이었다. “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자유는 사람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몸과 마음에 얽힌 굴레와 멍에 때문에 자유를 누리기가 몹시 어렵다. 가끔 굴레를 벗고 멍에를 풀었을 적에 잠깐씩 맛이나 보며 살아갈 수가 있지만, 온전한 자유에 길이 머물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몸과 마음에 얽힌다는 굴레나 멍에는 빗대어 말하는 것일 뿐이고, 참된 굴레나 멍에는 소나 말 같은 집짐승을 얽어매는 연모다. ‘굴레’는 소나 말의 머리에 씌워 목에다 매어 놓는 얼개다. 소가 자라면 코뚜레를 꿰어서 고삐를 코뚜레에 맨다. 그리고 고삐를 굴레 밑으로 넣어서 목뒤로 빼내어 뒤에서 사람이 잡고 부린다. 이때 굴레는 고삐를 단단히 붙들어 주어서, 소가 부리는 사람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말은 귀 아래로 내려와 콧등까지 이른 굴레의 양쪽 끝에 고삐를 매어서 굴레 밑으로 넣고 목뒤로 빼내어 뒤에서 사람이 잡고 부린다. 굴레가 고삐를 맬 수 있게 하고 움직이지 않게 하여, 말이 부리는 사람의 뜻을 거스를 수 없도록 한다. ‘멍에’는 소나 말에게 수레나 쟁기 같은 도구를 끌게 하려고 목덜미에 얹어 메우는 ‘ㅅ’ 꼴의 막대다. 멍에 양쪽 끝에 멍에 줄을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사랑하다’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은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벌레나 푸나무까지도 힘이 솟아나고 삶이 바로잡힌다는 사실을 여러 과학자가 밝혀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그만큼 목숨의 바탕이기에, 참으로 사랑하면 죽어도 죽음을 뛰어넘어 길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여러 사람이 삶으로 보여 주었다. 세상 모든 사람의 말꽃(문학)이나 삶꽃(예술)이 예나 이제나 사랑에서 맴돌고, 뛰어난 스승들의 가르침이 하나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부채질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랑하다’와 비슷한 토박이말에 ‘괴다’와 ‘귀여워하다’와 ‘좋아하다’가 있다. 이들 넷을 비슷한 토박이말이라 했지만, 저마다 저만의 빛깔을 지니고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서로 다르다. 우선 이들 네 낱말은 ‘괴다’와 ‘귀여워하다’가 한 갈래로 묶이고, ‘사랑하다’와 ‘좋아하다’가 다른 한 갈래로 묶여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앞쪽 갈래는 높낮이가 서로 다른 사람 사이에서 쓰는 것이고, 뒤쪽 갈래는 높낮이가 서로 비슷한 사람 사이에서 쓰는 것이다. ‘괴다’와 ‘귀여워하다’는 아이와 어른 사이, 제자와 스승 사이, 아들딸과 어버이 사이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김 과장이 아가씨에게 물었다. “사람이 살아가며 크건 작건 희망이 있을 텐데 수련이의 희망은 뭔가?” “카페를 하나 차리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계를 들고 있죠. 현재 계획으로는 1년 정도 기다려야 될 것 같아요.” “카페를 차라기도 전에 몸이 망가지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죠. 처음보다 몸이 많이 나빠진 것 같아요. 요즘은 날마다 간장약을 먹고 또 가끔 집에서 엄마가 보내 주는 보약을 먹기도 해요.” “어머니도 수련이가 여기 있는 줄 아나?” “아니요. 회사 다니는 줄로만 알고 있죠.” 태어날 때의 인간은 다 같이 평등하고 인간의 소망은 다 같이 소중할 텐데, 어쩌다가 자기 몸을 축내며 매일매일 억지로 술을 마셔야 하는 직업을 가지게 된 이 아가씨의 삶이 안타까웠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서울에서 직업을 가진 여성의 50%가 호텔, 여관, 사우나, 안마시술소, 이발소, 룸살롱, 다방, 텍사스촌 등 유흥업소 종업원이라던데 과연 이들의 삶에 누가 관심을 가져주는가? 유명한 정치인이나, 훌륭한 종교 지도자 가운데서 이들의 고달픈 삶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다 집어치우고 시집이나 가지 그래.” “사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은 왜 사나요?" 하고 묻는다면, 뜬금없는 질문에 누구나 질색하거나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것도 각본에 짜인 문답이라면 몰라도 갑작스럽게 던진 말 한마디, 각자의 삶에 중요한 핵심이긴 하지만 실로 깊고도 난해해서 쉽게 답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온갖 답이 나올 법도 하다. 예를 들면,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 “잘 살고 잘 먹기 위해 산다.” “죽지 못해 산다. “소풍 가듯 산다.” “애(자식)들 때문에 산다.” “한 편의 연극처럼 즐기며 산다.” “그저 물 흐르듯 바람같이 산다.” “산다는 것이 대수냐, 되는대로 살면 되지” “숨 쉬고 있으니까 산다, 숨 끊어지면 죽는 것이고.” 등등 무성한 답이 예상된다. 생각해 보면 “왜 사느냐?”에 대한 이렇다 할 정답이 없을 것 같고, “숨 쉬고 있으니까 산다.”라는 말에 제일 마음이 간다. 호홀지간(毫忽之間)이라고 했다. 누구나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모호한 상태에서 숨이 끊어지면 그날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다. 늙어 자연사(自然死)하는 죽음이나 병들어 죽는 상황을 빼고, 요즘 텔레비전에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세상 목숨이란 푸나무(풀과 나무)건 벌레건 짐승이건 모두 그런 것이지만, 사람은 혼자 살지 않고 여럿이 함께 어우러져 산다. 핏줄에 얽혀서 어우러지고, 삶터에 얽혀서 어우러지고, 일터에 얽혀서 어우러져 사는 것이 사람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살자니까 서로 아끼고 돌보고 돕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겨루고 다투고 싸우기가 십상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많아지니까, 겨루고 다투고 싸우는 노릇이 갈수록 뜨거워진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지난 일백 년에 걸쳐, 침략해 온 일제와 싸우고, 남과 북이 갈라져 싸우고, 독재 정권과 싸우며 가시밭길을 헤쳐 와서 그런지 삶이 온통 겨룸과 다툼과 싸움으로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 삶이 온통 싸움의 난장판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는데, 겨룸과 다툼과 싸움을 제대로 가려 놓고 보면 그래도 세상이 한결 아늑하게 느껴진다. 정작 싸움은 그렇게 많지 않고 다툼과 겨룸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겨룸은 무엇이고, 다툼은 무엇이며, 싸움은 무엇인가? · 겨루다 : 서로 버티어 승부를 다투다. · 다투다 : ①의견이나 이해의 대립으로 서로 따지며 싸우다. ②승부나 우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룸 안에 둘만이 남게 되자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김 과장은 ‘그냥 갈 걸 그랬나?’ 하는 약간의 후회감마저도 들었다. 썰렁한 침묵이 잠시 흐르자 김 과장이 입을 열었다. “우리 마주앙 한 병 더 할까?” “네, 좋아요.” “안주는 미스 나가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아무거나 시켜.” “과일 괜찮으세요?” “그래 좋아.” 조금 후 두 개의 술잔이 부딪쳤다. 술이란 이상한 액체라서 남자는 여자와 같이 술을 먹으면 기분 좋게 술술 잘 넘어간다. 반대로 여자 역시 남자와 같이 술을 마시면 잘 넘어갈 것이다. 이성(異性)과 함께 마시는 술은 그래서 사랑의 묘약이라고 말하나 보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저희들 생활이야 뻔하지요. 매일 억지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참, 저번에 약속했던 금연 껌을 사왔지. 보통 껌처럼 씹어 먹으면 화학물질이 입에 남아 담배를 피우면 역겨운 냄새가 나서 담배가 싫어진다고 하더군. 여기 있어. 단번에 담배를 끊기는 힘들 거도 조금씩 줄여가 보도록 노력해 봐.” 아가씨는 김 과장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감사합니다’ 말하며 금연껌을 받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물은 햇빛, 공기와 함께 모든 목숨에게 가장 뺄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나 물을 찾아 삶의 터전을 잡았다. 그러면서 그런 물에다 갖가지 이름을 붙였는데, 여기서는 먹거나 쓰려고 모아 두는 물이 아니라 흘러서 제 나름으로 돌고 돌아 갈 길을 가는 물에 붙인 이름을 살펴보자. 물은 바다에 모여서 땅덩이를 지키며 온갖 목숨을 키워 뭍으로 보내 준다. 이런 물은 김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땅 위로 내려와서는 다시 돌고 돌아서 바다로 모인다. 그렇게 쉬지 않고 모습을 바꾸고 자리를 옮기며 갖가지 목숨을 살리느라 돌고 돌아 움직이는 사이, 날씨가 추워지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얼음이 되기도 한다. 그처럼 김에서 물로, 물에서 얼음으로 탈바꿈하며 돌고 도는 길에다 우리는 여러 이름을 붙여 나누어 놓았다. 김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던 물이 방울이 되어 땅 위로 내려오는 것을 ‘비’라 한다. 그리고 가파른 뫼에 내린 비가 골짜기로 모여 내려오면 그것을 ‘도랑’이라 한다. 도랑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사람의 집 곁으로 흐르기 십상이기에, 사람들은 힘을 기울여 도랑을 손질하고 가다듬는다. 그래서 그것이 물 스스로 만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나도 사장 한번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첫아들을 낳은 뒤 둘째는 생략하려고 했지. 양육비가 많이 들 것 같아서. 그런데 마누라는 애가 하나면 외롭다고 하나 더 낳자고 박박 우기더라고. 그래서 미스 나처럼 예쁜 딸을 기대하면서 둘째 애를 낳았는데 그만 아들 쌍둥이가 나왔지 뭐야. 결국 사장될 꿈은 사라지고 세 녀석 키우기에도 바빠서 허덕이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래도 아들 부자니까 부자는 부자네요.” 미스 나가 웃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요점이 바로 거기에 있소. 요즘같이 집값이 비싸서야 20대 신혼부부가 봉급 모아서 언제 집 한 칸 마련하겠소? 요즘 신문에 부동산투기 억제다, 토지 공개념이다, 뭐다 하면서 요란하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은 그저 꿈일 뿐이요. 결혼해서 인생의 황금시기에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옷 못 입고, 가고 싶은 구경 한번 못 가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오로지 집을 사기 위해 근검절약하는 그들을 보면 가련하기도 하오.” “그래 박 과장님의 연구 결과 묘안이 있습니까?” “남자와 여자의 결혼 연령에 20년 시차를 두면 됩니다. 자, 들어봐요. 우선 20대 여자는 40대 남자와 결혼하는 겁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값’은 남이 가진 무엇을 내 것으로 만들 적에 내가 내놓는 값어치를 뜻한다. 그것은 곧 내가 가진 무엇을 남에게 건네주고 대신 받는 값어치를 뜻하기도 한다. 이때 건네주는 쪽은 값어치를 ‘내놓아야’ 하지만, 값어치를 건네받는 쪽은 값을 ‘치러야’ 한다. 값어치를 내놓고 값을 받는 노릇을 ‘판다’ 하고, 값을 치르고 값어치를 갖는 노릇을 ‘산다’ 한다. 팔고 사는 노릇이 잦아지면서 때와 곳을 마련해 놓고 많은 사람이 모여 종일토록 서로 팔고 샀다. 그때를 ‘장날’이라 하고, 그곳을 ‘장터’라 한다. 본디는 파는 쪽에서 내놓는 것도 ‘무엇’이었고, 사는 쪽에서 값으로 치르는 것도 ‘무엇’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슬기가 깨어나면서 ‘돈’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는 쪽에서는 돈으로 값을 치르는 세상이 열렸다. 그러자 돈을 받고 무엇을 파는 노릇을 일로 삼는 사람도 생겼는데, 그런 일을 ‘장사’라 하고, 장사를 일로 삼은 사람을 ‘장수’라 부른다. 장사에는 언제나 ‘값’으로 골치를 앓는다. 값을 올리고 싶은 장수와 값을 낮추고 싶은 손님 사이에 밀고 당기는 ‘흥정’이 불꽃을 튀기지만, 언제나 가닥이 쉽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