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붐비는 도쿄 재래시장 ‘아메요코’ 연말이 다가오면 사람들의 마음은 바쁘다. 특히 외국에서 연말연시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국에 대한 향수가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일본에 있을 때 마음이 착잡할 때마다 찾아가던 곳이 있는데 우에노에 있는 재래시장인 ‘아메요코(アメ橫)’ 시장이다. 우에노 역에서 오카치마치 역까지 기다랗게 형성되어 있는 ‘아메요코’시장은 옷, 구두, 꾸미개(액세서리) 따위의 잡화를 비롯하여 사탕이며 과자는 물론이고 채소와 생선, 과일 따위를 파는 식품 가게 등 가짓수도 헤아릴 수 없는 점포가 들어서서 장사를 하는 것이 꼭 서울의 남대문 시장 같은 분위기다. 특히 아메요코 시장의 유래가 재미있다. 2차 대전 패전 뒤 사탕(일본말로 아메)을 팔던 가게가 200여 곳이 있어 붙여졌다는 이야기와 당시에 일본에 남아 있던 미군들이 본국에서 가져온 꾸미개나 값싸게 들여온 텔레비전, 냉장고 따위를 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부르던 ‘아메리카요코쵸’가 줄어서 ‘아메요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패전 뒤 일본의 경제가 어렵던 시절과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던 수도 도쿄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달콤한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파호(琵琶湖)를 끼고 있는 시가현(滋賀)은 교토와 오사카에 면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곳은 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55건의 국보 그리고 806건의 중요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로 국보보유로 치면 교토부, 도쿄도, 나라현, 오사카부 다음으로 많은 곳이다. 에도시대에는 강남, 강서, 강동 지역으로 나누던 것을 명치시대 이후에는 비파호를 중심으로 호남, 호동, 호북, 호서 4곳으로 생활권역을 구분하고 있다. 예부터 관동지방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인 이곳은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이 좋은데다가 특히 가을철 단풍의 명소로 꼽혀 단풍철에는 숙박을 정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로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은 지역이다. 이에 맞춰 “호동3산 순례”라든가 “호남3산 순례”와 같은 유서 깊은 절 순례코스를 만들어 놓고 임시버스를 운행하는 등 지역 관관협회의 홍보도 매우 적극적이다. “호남3산 순례길”을 나선 것은 지난 11월 21일 월요일이었다. JR고세이 역에서 탑승한 임시버스는 맨 처음 우리를 선수사에 내려 주었다. 국보답게 고색창연한 본
“지금의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은 오오츠시청 서쪽에 있다. 일찍이 북원(北院)에는 신라선신당을 중심으로 많은 가람과 승방이 있었으나 명치유신 때 정부가 신라선신당과 페노로사묘(1853-1908, 미국인으로 일본의 미술을 서구에 소개함)가 있는 법명원(法明院)만 남기고 모두 헐어 버렸다. 전후 미군의 캠프로 쓰이다가 현재는 오오츠시청과 현립오오츠상업고교, 황자공원이 들어 서 있다.” 위는 삼정사(三井寺, 미이데라) 누리집에 있는 신라선신당의 이야기로 당시에는 무척 규모가 컸으나 지금은 본당 건물 하나만 달랑 남아있다. 삼정사는 일본 남부 시가현(滋賀縣) 오오츠 시에 있는 유서 깊은 절로 원래 이름은 원성사(園城寺)이다. ‘三井’이라 하니까 우물이 세 개나 있어 보이는데 실제 이렇게 절 이름이 바뀐 것은 우물과 관련이 있다. 삼정사 안에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천지왕(天智天皇), 천무왕(天武天皇), 지통왕(持統天皇)이 태어났을 때 산탕(産湯, 갓 태어난 아기 목욕물)으로 쓰였다고 해서 붙인 것으로 이 절이 고대 황실과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이 절을 세운 사람은 지증대사 원진으로 원진스님(円珍,814-891)은 도쿄대 이노우에(井上光貞) 교수가 쓴 《왕인의 후
우리 애들 어렸을 때만 해도 돌잔치는 집에서 치르는 줄 알았다. 지금은 이십대 중반이 된 아이들이 첫돌을 맞았을 때 친정어머니의 일손은 바빴다. 수수팥단지를 만들고 삼신할머니에게 올릴 시루떡도 손수 쪄내느라 좁은 집은 수선스러웠다. 어디 그뿐인가! 금반지 반 돈이라도 해 들고 찾아오는 일가친지를 맞아들일 준비도 하고 돌날 아침 돌잡이 상도 따로 봐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일을 집에서 하는 아이 엄마는 없다. 아이가 태어나서 맞이하는 백일과 돌잔치는 어느새 거대한 이벤트화 되어 호텔마다 젊은 부부들의 아기 돌잔치 예약이 넘쳐난다. 손님들도 금값이 비싼 지금은 현금 봉투를 들고 돌잔치가 열리는 뷔페식당이나 값비싼 호텔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일본의 돌잔치는 어떠한가 보자. 일본은 돌잔치가 없다. 엑? 하고 놀랄 분들이 계시겠지만 태어나서 치르는 첫 생일인 ‘돌’이라 부르는 특별한 잔치는 없다. 그 대신 ‘오미야마이리(お宮參り)’라고 해서 핏덩이를 막 벗어난 한 달 정도 되는 아기를 강보에 싸서 신사 참배를 한다. 그 이후에 남자아이는 3살과 5살 때 여자아이는 3살과 7살이 되는 해에 일본 전통옷을 곱게 입혀 신사 참배를 시
“소나무 숲 사이에 핀 잔잔한 들국화 한 송이 꺾어 내려오는 쓸쓸한 저녁”-牟田口龜代- “북한산 산마루에 흰 구름 비추니 오늘은 맑겠구나” -久保靜湖- 위 노래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이치야마(市山盛雄) 씨가 펴낸 조선풍토가집에 나오는 일본의 단가(短歌)이다. 이 노래집에는 816명이 조선을 다녀가면서 읊은 노래들이 실려 있는데 온돌, 한약방, 주막, 고려자기, 무녀, 기생, 양반, 조선요리와 같은 조선의 풍속에 관련된 노래가 있는가 하면 쑥, 무궁화, 소나무, 작약, 조선인삼 같은 식물류와 까치, 학, 매, 뻐꾸기, 호랑이 같은 동물류도 노래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땅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바를 노래로 기록해두고 있다. “내가 조선을 회고하건대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맑고 투명한 하늘의 아름다움이다. 그 중에서도 남선(조선을 남북으로 볼 때 남쪽)의 하늘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빛이다.”라고 와카야마(若山喜志子) 씨는 서문에서 조선에 대한 인상을 쓰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매력에 빠져 여러 번 조선 땅을 밟았다는 사람도 있다. 1936년이라면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 된 지 26년째로 조
이이오겐시 씨가 쓴 “최을순 상신서” “재판관님. 저는 본국(한국)으로의 송환을 기다리며 오무라(大村) 입국자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주부입니다. 본적은 조선 경상남도 함안군이고, 이름은 최을순(30세)이라 합니다. 제가 귀국(일본)에 불법 입국하게 된 것은 쇼와(昭和 32년, 1957년) 5월 열여섯의 나이였을 때입니다. 일본에서 살아온 남편이나 저, 그리고 제 부모님이나 형제가 귀국과 연관된 것들에 대해 재판장님께서 제 이야기를 직접 들어주셨으면 하여, 반년 이상 살아온 수용소의 다다미방에서 썩 능숙하지는 않지만 일본어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서른 살의 최을순은 세 살과 한 살짜리 아기엄마였다. 180여 일을 눅진 다다미방에서 강제 송환이라는 절차를 기다리며 오죽 답답했으면 재판관에게 자신의 심경을 써 내려갔을까? 최을순의 변론을 맡은 시미즈 변호사는 이런 사건을 전적으로 도맡다시피 한 변호사이다. 그의 책상에는 언제나 수북하게 이러한 사연이 쌓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찡그리는 적이 없다. “독(毒)도 약(藥)도 되지 않는 외국인은 모두 돌려보낼 생각이다. 그게 우리나라의 정책이니까. ‘외국인은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자유’”라고 당당히 말하는
10월 22일 교토의 시대마츠리와 백제왕비 고야신립 10월 22일은 교토 3대 마츠리의 하나인 지다이마츠리(時代祭) 날이다. 화려한 고대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교토 시내를 두어 시간 행진하는 이날은 일본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느라 부산하다. 일본을 알려면 마츠리를 알아야 하고 마츠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일본 교토의 3대 마츠리 중 하나쯤은 보아야 마츠리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라도 잡을 것이다.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에 당할 것이 없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다만,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가장 그 역사가 짧은 것은 지다이마츠리로 1895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116년 째를 맞이한다. 지다이마츠리 행렬은 교토 어소(御所)를 낮 12시에 출발하여 가라스마도오리 등 시내 4∼5킬로 구간을 행진한 뒤 헤이안신궁(平安神宮)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헤이안-가마쿠라-무로마치-안도모모야마-에도-메이지시대의 옷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의 행렬이 볼만하다. 헤이안신궁은 백제여인 고야신립이 낳은 제50대 간무왕(桓武天皇)을 모시는 사당으
엊그제 10월 9일은 565돌 한글날이었다. 한글을 만든 지 이만한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본문자인 ‘가나문자’는 언제 생겼을까? 나는 종종 일본어 첫 걸음마 교실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일본문자가 언제 만들어졌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더러는 제대로 알고 답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개는 묵묵부답이다. 그럴 때 나는 객관식으로 고르라고 다음과 같은 문항을 만든다. ①에도시대 ②메이지시대 ③가마쿠라시대 ④헤이안시대 4지 선다형이라고 답이 쉬운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들은 일본문자가 메이지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답을 하는 학생도 있다. 메이지시대라면 1868년이다. 물론 정답은 헤이안시대(794-1192)이다. 한글처럼 만든 사람과 만든 날짜, 만든 목적이 뚜렷한 글자는 지구상에 없다. 영어도 그렇고 중국어, 일본어 또한 누가, 왜, 언제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한글날처럼 ‘가나의 날’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보통 가나의 출현을 10세기로 잡는다. 배우기도 어렵고 쓰기도 복잡한 한자는 일본인들에게 불편한 문자였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복잡한 한자의 획을 떼어버리고 편리한 부분만을 취해 둥글게 굴리기도 하고 눕히기도 하고 흘려 쓰기도 하여 만든 것이
흔히 오키나와는 춤과 노래의 섬이라고 한다. 일본 본토와 바다로 막혀 있는 지리적 조건, 아열대에 속한 자연환경, 또한 거듭 되는 외세의 풍랑을 겪어온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의 춤과 노래는 자연스레 무르익어 온 것이라고도 한다. 1609년 일본 사츠마번(薩摩藩)의 침공을 받은 이래 현재의 일본 행정구역 단위인 43개현(縣) 가운데 마지막 43번째 현이 되기까지 오키나와는 동남아시아를 대상으로 중계 무역을 담당하던 해상국가 류큐왕국(琉球王國)으로 번영하던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오키나와전(戰)이 벌어져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은 큰 희생을 치러야 했으며 1972년까지 미군정하에 놓이기도 했다. 그 뒤 일본에 복속된 지금에도 오키나와는 대규모 미군기지 시설이 들어서 있어 춤과 노래보다는 미군기지 땅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많다. 오키나와의 노래와 춤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섬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전통적인 춤과 노래의 출발은 마을신(神)에 대한 기원에서 비롯된다. 마을의 안녕과 재난을 막고 풍작을 기원하며 감사하는 노래로 출발한 민속 예술은 사자춤, 봉오도리 따위가 있다. 이들 춤에 빼놓을 수 없는 악기로는 샤미센(三味
"148살 짜리 왕이 있다" 는 일본왕실 스케치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꿈이다. 그래서 장수를 위해 별의별 것을 다 구해 먹는가 하면 제약회사들은 장수를 위한 약을 개발하려고 안간힘이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 장수라고 해도 100살을 넘기는 일은 쉽지 않다. 기록상의 장수 인물을 보면 로버트 테일러(1764-1898) 라는 영국사람으로 무려 134살을 살다 갔다고 한다. 그의 장수에 빅토리아 여왕은 "희유(希有)의 장수를 축하하여,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로버트 테일러에게"라는 서명이 담긴 여왕의 초상화를 선물했는데 일설에는 이 선물을 받고 감격한 나머지 세상을 뜨고 말았다니 웃어야 할 일인지 안타까워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금세기도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이웃나라에 100살을 훨씬 넘긴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니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다름 아닌 일본 왕(천황)들의 수명이다. 1대 왕인 진무왕은 127살, 5대 효소왕은 114살, 6대 효안왕은137살, 7대 효령왕은 128살이고 12대 경행왕은 무려 148살을 기록하고 있다. 또 16대 왕인 인덕왕도 143살까지 살다갔다니 대단한 장수 왕실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