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글ㆍ사진 이영일 생태과학연구가] 불두화[학명:Viburnum sargentii for. sterile]는 인동과의 ‘낙엽이 지는 넚은 잎 키가 작은 나무’다. 꽃의 모양이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하고 부처가 태어난 4월 초파일을 전후해 꽃이 피므로 ‘불두화(佛頭花)’라고 부르고 절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한방에서는 불두수(佛頭樹), 팔선화(八仙花)란 약재로 활용한다. 불두화는 백당나무를 개량한 것으로 잎의 끝이 3개로 갈라지고 꽃잎은 5장 꽃의 색깔은 처음 필 때는 연초록 활짝 필 때는 순백색 질 때는 누런색이며, 잎은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꽃잎은 4장으로 꽃의 색깔은 땅의 성분에 따라 산성토양이면 청색 알칼리토양이면 붉은색 그리고 하얀색 분홍색으로 다양하다. 불두화(佛頭花)는 번식력이 없다. 백당나무를 개량하면서 꽃의 아름다움을 위해 생식기능을 없앴기 때문이다. 꽃은 탐스러우나 무성화(無性花)여서 암술과 수술이 없다. 그래서 씨를 맺지 못한다. 스스로 번식할 수 없기에 꺾꽂이를 통해서만 번식할 수 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정진하는 스님들과 닮은 꽃이다. 세 갈래로 갈라진 잎은 불(佛)ㆍ법(法)ㆍ승(僧)을 상징한다. 불두화에 꽃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병산이 시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안사리의 책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이슬람을 공부하였다. 여기에서 나의 종교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6.25 전쟁이 나던 1950년 4월에 태어났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일주일도 안 되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주 전동성당에서 ‘갈리스도’라는 본명(세례명)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집안이 3대째 천주교였기 때문에 모태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다. 나는 30년 동안 천주교 신자로서 성당을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가 개신교에 다니는 아내를 만나 혼인한 뒤 31살이 될 무렵부터 아내를 따라 개신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30년 동안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십일조를 빠지지 않고 내었고 성가대에도 열심히 나갔다. 그러다가 61살이 되던 해에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나는 불교에 관심을 두었다. 그 뒤 재혼한 각시와는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에 있는 금산정사에 둘이 가서 불교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금산정사를 통하여 받은 조계종 신도증에는 법명이 무심(無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우리나라 3대 종교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이슬람은 생소했는데, 이번 순례 여행에서 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현재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코로나19’와 연관해 지난번에는 대응전략에서 전문가가 앞에 서서 적극적이냐 그리고 뉴스 처리에 있어 공개적이고 투명한가, 그리고 사회적 거리를 잘 지켜내느냐를 보았다. 생활방역 정부는 5월 6일부터 그간의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방역으로 전환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거리는 50센티 안팎인데 코로나 시대에는 1미터에서 2미터는 떨어져 있으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중규모 집단 사회규칙이고 생활방역은 소집단 곧 가족 단위의 규칙을 일컬음이다. 집단 소통은 수십 명 안팎의 집단 모임으로 교회, 세미나, 교실 등이 대상이 되었다. 이를 이제 가족 단위의 모임 곧 식당이나 산책 등은 마스크 착용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4월 15일 국회의원 투표 때 부부인데도 투표장에는 1미터씩 떨어져 걸어 들어가야 했다. 왜 그럴까? 투표장은 집 안이 아니기에 가족 기준이 아니라 남 곧 사회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생활방역은 가족, 연인이면 두 손 잡고 다녀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5월 1일에서 5일 어린이날까지 이어지는 연휴기간 서울 이태원 술집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집단으로 나타나고 이후 전국으로 확장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하긴 남는다고 영원하랴. 아무리 기원이 간절한들 어찌 세월을 이길 것인가. 우리 사랑했던 한 사람을 보내고 사라진 절을 찾아 먼 길 떠난다. 강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고, 마을 있는 곳에 절이 있었다. 남한강 유역 폐사지를 오롯이 지키는 거돈사터 삼층석탑. 곳곳에 층층이 쌓여있는 석축 흔적만으로도 당시 웅장한 절의 크기와 공력을 짐작케 한다. 석탑 뒤 대웅전 터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공터엔 커다란 불상의 대좌가 놓여있다. 석탑 앞에 부서진 채 놓인 배례석엔 연꽃 모양이 선명하다. 다 사라진 가람에 견주어 쁫밖에 탑은 의연하다. 이 탑은 흔히 보던 것들과 달리, 흙을 둔덕지게 쌓아 단을 만들어 세웠으니 폐허 속에서도 자태가 늠름히 드러난다. 탑신 자체에 별다른 장식이 없어 밋밋해 보이나 오히려 그런 고졸함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연지 곤지를 찍지 않았다고 미인을 알아보지 못할 것인가. 사람을 잃고 탑을 얻었으니 크게 슬퍼할 일은 아니다. 버려진 이를 버려두고 담담히 돌아올 수 있어 좋았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실크로드 순례길에 동참하러 와서 세 번째 맞는 일요일이다. 에너지가 충만하고 씩씩한 병산은 오늘도 앙카라 시내를 구경하겠다고 나갔고, 나는 하루 쉬기로 했다. 로자 씨와 따님도 밀린 빨래를 하면서 오늘 하루는 쉰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혼자 앙카라역으로 가서 기차표를 사와야 한다. 지금까지는 모든 결정을 병산이 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졸졸 따라다니면 되었다. 막상 혼자 지하철을 타고 앙카라역까지 갔다 오려고 하니 길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까 약간은 걱정이 앞선다. 터키에서는 영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구글 지도를 검색하여 숙소에서 가까운 역에서부터 앙카라역까지 표시된 지도를 사진 찍었다. 그리고 출발역과 도착역을 외우고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숙소를 나섰다. 가까운 지하철역에 도착했는데, 우선 표를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 헷갈린다. 매표창구 앞에서 서성이는데, 갑자기 “May I help you?”라고 말하면서 터키 여인 두 명이 나에게 다가와 도와준다. 영어로 대화가 되니 수월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여인이 자기가 가진 신용카드로 내게 일회용 표까지 사주는 것이 아닌가? 터키 사람의 친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음식은 ‘음(飮)’과 ‘식(食)’의 합성어이다. 음(飮)이란 음료 곧 마시는 것을 뜻하며 식(食)이란 ‘갉다, 깨물다, 새김질하다’ 곧 치아를 사용해야 하는 고형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씹고 마시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체 액체를 통틀어 음식이라 한다. 이러한 음식의 문자적 구분이 일반 성인의 경우는 굳이 필요치 않으나 어린아이들과 치아의 결손이 있는 성인이나 노인분들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외부로부터 음식물을 섭취하여야 생존할 수 있으며 자신의 몸체와 다른 성분을 섭취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성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화과정과 동화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바탕 속에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것을 섭취하면서 생존과 적응, 진화의 과정을 거쳐왔으며 그 흔적이 치아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포유동물은 4종류 치아의 자격증이 있다 인류학자들과 고생물 학자들에게 치아의 숫자와 배열은 동물의 먹이와 먹이 섭취방법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서식지와 생활방식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또한, 장의 길이와 소화관의 특성화는 음식물의 섭취 형태에 따라 발달한다. 곧 치아의 발달과 소화기관의 발달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1. 성황 및 서낭 유래에 대하여 ‘성황’을 ‘서낭’이라고도 한다. 한자로 표기하면 ‘城隍’이며, 한글 표기는 ‘서낭’이다. 20세기 초, 성황(서낭)신앙이 조사되고 연구되었을 때부터 두 용어는 같은 의미로 사용됐지만, 현장에서는 후자에 보다 치중되어 불리는 경향이 있다. 터와 마을을 지켜주는 신(神)격의 존재로 믿어져 온 성황 또는 서낭에 대한 유래는 외래설과 전래설이 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져 온 외래설은 다음과 같다. 6세기 무렵, 위진남북조시대에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지방 세력들이 성황(城隍) 신앙을 발달시켰는데, 당송대에 들어서면서 전역으로 퍼졌다. 송대(618-907) 초기에 이르러 지역의 수호신으로서 제사하는 신앙형태가 발달하였고, 이것이 고려왕조(918-1392)에 전해졌다. 지방분권적이었던 고려 초기, 큰 세력을 갖게 된 지방 토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보호해 줄 종교적 제도로 성황 신앙을 선호하면서 제례 주제권을 장악한 후 향촌 사회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면서 호족들은 성황제를 열어 가문과 문벌 지족(支族)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또 한편으로 무격 집단의 기풍제, 기우제의 성황제를 열어 지역주민을
[우리문화신문=이영일 생태과학연구가] 골담초[학명: Caragana sinica (Buchoz) Rehder]는 콩과의 ‘잎 지는 키가 작은 넓은잎 떨기나무’다. 뿌리는 생약으로 뼈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골담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풀초(草) 자’가 들어 있어서 풀로 생각하기 쉬우나 나무다. 불가에서는 선비화(仙扉花), 노란 비단색의 닭이란 뜻으로 금계인(錦雞人), 노란 참새가 무리지어 있는 듯 보인다고 해서 금작화(金雀花), 금작근(金雀根), 야황기(野黃芪) 금작목(金雀木), 토황기(土黃芪), ‘Chinese-pea-tree’라고도 한다. 노오란 꽃의 색깔 때문에 '금(金)'자가 들어간 여러 별명을 갖는다. 일부 지방에서는 곤단추나무라고 부르다. 이름이 많은 것은 쓰임새가 많다는 의미이다. 비슷한 종으로 작은잎의 길이가 8∼17mm인 것을 반용골담초(var. megalantha), 작은잎이 12∼18개인 것을 좀골담초(C. microphylla)라고 한다. 한방에서는 골담초(骨擔草)라 하여 약용으로 쓰고, 관상용, 울타리용, 식용, 밀원(蜜源, 벌이 꿀을 빨아 오는 근원)식물이다. 꽃말은 겸손, 청초, 관심이다. 영주 부석사(고려 우왕 3년(1377)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괴메레에서 터키의 수도 앙카라까지 300km를 이동하는 날이다. 나는 오늘도 새벽기도를 알리는 아잔이 들리기 이전에 잠이 깨었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울 때에 이슬람은 ‘한 손에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호전적인 종교라고 배웠다. 정말로 이슬람은 코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칼로 죽였는가?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진실을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내가 배운 세계사에도 가짜 뉴스가 섞여 있었다. ‘한 손에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은 13세기에 기독교가 십자군 원정에서 패배할 무렵에 이탈리아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가 이슬람을 깎아내리기 위하여 지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슬람은 결코 정복지 주민들에게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이슬람은 600년 동안이나 그리스를 포함하는 발칸 반도를 지배하였지만 그리스는 지금껏 정교회를 믿고 있다. 무력으로 종교를 전파한 쪽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였다.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는 아랍 세계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동방교회까지도 공격했는데, 정교회를 믿는 이스탄불 공격을 계기로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갈라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양 진전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석탑도 요염한 맵시 뽐낼 때가 있다 밤이면 비단자락 날리며 하늘 오르다 낮이면 짐짓 모른 척 침묵으로 서 있다. 팔부신중 구름에 앉아 세상 굽어보고 천인상(天人像) 기단(基壇)을 나와 은하에 닿아라 서라벌 천년의 노래가 이곳까지 들려온다. 진전사터(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37번지)는 수평선 멀리 동해바다를 향한 곳에 있다. 낙산사 들러 이곳으로 향하는 길은 자연이 좋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설악이 뻗어오다 끝나는 지점에 이 진전사터가 있다. 1960년대 이전까지 절 이름이 둔전사로 알려져 왔는데 도의선사가 이 절에 주석했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이 절터는 자연 지세를 최대한 활용한 대규모 산지가람으로서 창건 때부터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축조된 가람이라 생각된다. 삼층석탑은 요염을 뽐낸다. 자세히 보면 여러 부조 형상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가히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까닭을 알겠다. 천의 휘날리며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비천들은 여러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