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충남 공주 만세운동 주동자 혹부리집 딸 김현경 이윤옥 기마 왜병 말발굽 양반 고을 공주 땅에 휘몰아치매 열아홉 처녀 선생 목숨 걸고 나선 몸 총칼도 두렵지 않네 관순 오라버니 동무해서 부른 만세 휘두른 총칼에 몇 번이고 혼절해도 꺾이지 않는 조선 처녀의 기개 헛되지 않아 되찾은 광복의 기쁨도 잠시 화려한 애국지사 훈장도 없이 홍성의 구멍가게 쓸쓸한 주인 되어 외로이 숨져간 공주의 독립투사 뒤늦은 이승의 빛난 훈장 저승에서 알고 계실까? ▲ 1919.8.29.공주지방법원 김현경 판결문 김현경(金賢敬,1897. 6.20 ~ 1986.8.15)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달리다가 기마왜경이 휘두르는 칼에 유관순의 오빠와 함께 맞았어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옥양목에 뚝뚝 떨어진다고 느끼는 순간 기절을 한 거예요. 얼마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본 순사가 어디 한 번 더 불러보라고 하기에 힘차게 대한독립만세를 한 번 더 불렀지요. 1974년 동아일보 3월 1일치에는 구국의 별 지금은 구멍가게 노파라는 기사로 김현경 애국지사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당시 김 애국지사는 78살이었다. 구한말 무관이던 아버지는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 댕기머리 소녀 이광춘 이윤옥 애비 놈들 남의 나라 삼키더니 그 자식들 통학하며 싸가지 없이 조선인 여학생 댕기를 잡아 당겼것다 아야야야 아야야야 그 광경보다 못해 조선 남학생들 왜놈 학생 멱살 잡고 한 대 날렸것다 아무렴 가만있을 수 없지 땅 뺏기고 말 뺏기고 자유 뺏기길 십수년 나주 광주 목포 서울 평양 학생들 분노 소리 땅을 가를 때 어린 학생 잡아다가 고문하던 왜놈 순사들 머리채 잡아끈 후쿠다(福田修三)는 놔두고 힘없는 나주의 딸 이광춘만 머리끄댕이 잡히고도 퇴학당했다지 제 자식 혼 안내고 남의 자식만 혼내는 것 조선에선 후레자식이라 하지 후레자식들! 후레자식들! ▲ 그림 한국화가 이무성 이광춘 (李光春, 1914.9.8~2010. 4.12) 통학길의 조선 여학생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긴 사건 그때는 개찰구 쪽으로 먼저 나가는 쪽이 힘이 세다고 생각하여 한일 간에 서로 먼저 나가려고 했어요. 우리 한국학생들 수는 적었지만 더 야물었지요. 기차 속에서 즈그들 수가 더 많은 게 까불까불해도 한국학생들이 눈을 크게 뜨면 야코가 팩 죽어 말도 못하지라우. 이광춘 여사는 잡지 예향, 1984년
[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 빗창으로 다구찌 도지사 혼쭐낸 제주 해녀 부춘화 이윤옥 ▲ 부춘화 시화 (그림 이무성 화백) 물질하던 옷 벗어 말리며 가슴 저 밑바닥 속 한 줌 한을 꺼내 말리던 불턱에 겨울바람이 일고 있오 비바람 눈보라 치는 날 무자맥질 숨비소리 내뱉으며 거친 바닷속 헤매며 따 올린 처녀의 꿈 짓밟고 착취하며 검은 마수의 손 뻗치려던 도지사 다구찌 놈 보란 듯이 빗창으로 혼쭐내던 세화리 장터의 억척 여인이여! 그대의 분노로 저들의 야수는 꺾이었고 그대의 피흘림으로 조국 광복은 한발 앞서 이뤄졌나니 평화의 섬 제주를 찾는 이들이여! 세화민속오일장 한 접시 회 마주하고 부디 말해주소 해녀 부춘화의 간담 서늘한 애국 이야기를! *불턱: 해녀들이 물 밖으로 나와서 모닥불을 지피고 젖은 옷을 말리는 곳 *숨비소리: 해녀들이 작업하다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호오이하며 길게 내쉬는 숨소리 *빗창: 전복채취 때 쓰는 쇠갈고리(아래 사진) 부춘화(夫春花, 1908.4.6-1995. 2.24)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항일운동 가운데 여성운동과 어민투쟁의 측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해녀 항일운동사건의 주동자인 부춘화 여사는 19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총칼이 두렵지 않던 전주 기전의 딸 김공순 이윤옥 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을 독살한 검은 마수 더 이상 참지 못해 남문 밖서 성난 파도처럼 흰 소복에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뛰쳐나온 기전의 어린 처녀들 총칼의 무단 조치 굴하지 않고 피로써 만든 태극기 목숨 걸고 흔들며 저항할 때 비수에 맞은 심장 솟구치는 붉은 피에 널뛰던 가슴 가슴 최후의 1인까지 광복의 그날 위해 뭉치리라 외치던 기전 어린 처녀의 절규 비사벌 너른 들에 울려 퍼졌네. ▲ 전주 기전여학교 후배들의 3.1절 독립만세재현 모습 김공순(金恭順, 1901. 8. 5 ~ 1988. 2. 4)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재학 중 1919년 3월 13일 전주면(全州面) 남문 밖 시장부근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주에 전해진 것은 3월 1일 오전 천도교 교구실에 독립선언서 1천여 장이 전달되면서였다. 그리하여 천도교 전주교구에서는 기독교 쪽과 연락하여 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해 가던 중 선언서의 배포가 일경에 사전 탐지되는 일이 있었으나, 이러한 상황임에도 만세운동의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장강에 도도히 흐르는 물결 거스름 없이 기강 토교 중경 발길 닿아 머무르는 곳 따스한 봄바람 되어 이웃을 감싸주던 님 조국을 되찾는 일에 쟁쟁한 독립투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단상에 서서 독립을 염원하던 그 자태 그 씩씩함 겨레의 든든한 맏누님 되신 이여! 어루만진 동포의 쓰라린 가슴이 몇몇이며 따뜻하게 감싸주던 고독한 독립투사 또 몇몇이랴 사나이 태어나 이루지 못할 대업 여장부 몸으로 당당히 살아낸 세월 그 늠름하고 당찬 모습 조국이여 오래도록 잊지 마소서. ▲ 한국혁명여성동맹창립총회 회장 방순희 애국지사 (1940.6.17), 앞줄 가운데 (○)한 이 (사진제공 오희옥 여사) 방순희(方順熙, 方順伊, 1904.1.30-1979.5.4)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이라면 오늘날의 국회의원이다. 하지만 나라 잃은 임시정부 하에서의 의정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40년 9월 중경 이전 당시 임시의정원의 전열을 가다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래 표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임 시 의 정 원 의장 김붕준 부의장 최동오 의원 이시영김구조성환조소앙조완구차이석송병조엄항섭양묵신공제 문일민민병길홍진이청천조경한신환방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라 이신애 이윤옥 천마산 산마루에 높이 뜬달 만월대에 아름답게 비추고 선죽교 임 향한 일편단심 드높은 곳 개성 호수돈여학교 아리따운 소녀 빼앗긴 나라의 운명에 목숨 걸었다 사이토마코토 처단하자는 피맺힌 강우규 동지의절규 도와 죽음도 불사하고 뛰는 심장 멈출 때까지 목 놓아 불렀을 광복의 노래 그 노래 그쳤으나 가신 곳 가신 날 모르는 님의 소식 안타까워라 ▲ 이신애 애국지사가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 이신애(李信愛, 1891.1.20 ~ 미상) 31독립운동 때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19년 9월 강우규가 조선 총독 사이토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에는 한기동과 함께 강우규를 수차에 걸쳐 방문하여 거사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초순에는 한기동의 권유에 의해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이 단체가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신애 애국지사는 1919년 10월 6일 '총독에 관한 흉행범인 체포의 건'을 시작으로 부터 1926년 6월 16일 일본외무성 문서의 '간도 및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임시정부의 한 떨기 꽃 조계림 이윤옥 쫓기는 남의 땅 산하에 차린 정부 어느 한날 편했을까 내동포 내조국 지켜달라 각국에 호소하며 밤새 뜬눈으로 쓴 편지 태산이요 남몰래 흘린 눈물 장강을 채웠으리 할아버지 아버지 뒤를 이은 독립의 가시밭길 곡예사의 아찔한 순간 어찌 없었으랴 사사로운 욕심 걷고 섬광으로 만난 한줄기 빛 찾아 지친 영혼 가슴 가슴마다 가득 채운이여 그대 임정(臨政)의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여! ▲ 복원된 충징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조계림 애국지사가 저곳에서 일했을 것이다. ▲ 추헌수편 자료 한국독립운동 제 1권 458면(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 第1券 458面) 조계림(趙桂林 1925.10.10 ~ 1965. 7.14)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7월 5일 중국 중경(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부교(부장 조소앙) 앞으로 중경주재(重慶駐在)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가 다음과 같은 한 통의 편지를 보내온다. 부장 각하! 저는 1944년 6월 26일자의 각하의 서한을 감사히 받았음을 알려드리는 영광을 먼저 전합니다. 동시에 각하의 요구를 받아들여 각하가 보내온 성명서와 각서 모두를 외무부를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총칼이 두렵지 않던 전주 기전의 딸 김공순 이윤옥 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을 독살한 검은 마수 더 이상 참지 못해 남문 밖서 성난 파도처럼 흰 소복에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뛰쳐나온 기전의 어린 처녀들 총칼의 무단 조치 굴하지 않고 피로써 만든 태극기 목숨 걸고 흔들며 저항할 때 비수에 맞은 심장 솟구치는 붉은 피에 널뛰던 가슴 최후의 1인까지 광복의 그날 위해 뭉치리라 외치던 기전 어린 처녀의 절규 비사벌 너른 들에 울려 퍼졌네. ▲ 전주 기전여고 학생들은 해마다 선배들의 독립정신을 이어 만세운동을 벌인다. 김공순(金恭順, 1901. 8. 5 ~ 1988. 2. 4)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재학 중 1919년 3월 13일 전주면(全州面) 남문 밖 시장부근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주에 전해진 것은 3월 1일 오전 천도교 교구실에 독립선언서 1천여 장이 전달되면서였다. 그리하여 천도교 전주교구에서는 기독교 쪽과 연락하여 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해 가던 중 선언서의 배포가 일경에 사전 탐지되는 일이 있었으나, 이러한 상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여성의식 향상과 민중계몽에 앞장 선 박원희 이윤옥 혹한 눈보라 속 펄럭이는 만장으로 슬픔을 감추고 떠난 임 세 살배기 어린 딸 어이 남기고 서둘러 가셨는가! 많이 배우고 잘난 여자들 일제에 빌붙어 동포를 팔아먹고 더러운 입 놀려 호화 호식할 때 배운 여자 일수록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라 외치던 서른 해 짧은 생 마감하며 던진 화두 죽어서도 차마 놓지 못할 광복의 그 찬란한 꿈 고이 간직하고 떠나시라고 가시는 걸음걸음 흩뿌리던 하얀 눈송이 희고 순결하여라. ▲ 여성의 정치적의식을 일깨우는 기사(동아일보.1927.6.1) 박원희(朴元熙 1898.3.10 ~ 1928.1.5) 1928년 1월 11일 동아일보에는 한 여성의 장례행렬 사진이 크게 실렸다. 한겨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많은 만장과 추도객이 뒤따르는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보기 드문 장례행렬 사진이다. 이날 장례를 치른 주인공은 서른 살로 요절한 박원희 애국지사였다. 박원희 애국지사는 서울 사람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철원보통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에 유학하였다. 귀국 뒤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인 김사국(金思國)이 주도한 서울청년회계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벽장 속에서 태극기 만든 통영의 김응수 이윤옥 벽장 문 걸어 닫고 호롱불 밝혀 만든 태극기 이로써 빼앗긴 조국을 찾을 수만 있다면 밤샌들 못 새우며 목숨인들 아까우랴 열여덟 꽃다운 처녀 숨죽여 만든 국기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목청껏 부른 대한독립만세 함성 죄목은 보안법 위반이요 죄질은 악질이라 차디찬 감옥소 시멘트 날바닥에 옷 벗기고 콩밥으로 주린 배 쥐게 해도 단한 번 꺾이지 않던 그 당당함 그대는 정녕 일신의 딸, 조선 독립의 화신이었소. ▲ 김응수 애국지사(왼쪽)와 1919년 무렵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수놓은 밥상보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1,2,3권에 있습니다. 김응수(金應守, 1901. 1.21 ~ 1979. 8.18)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김응수 애국지사는 1919년 3월 11일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이들의 만세운동을 기록한 일본 쪽 자료의 따르면 부산진 소재 기독교 경영 일신여학교 한국인 여교사 임말이 외 학생 1명을 취조한바 이 학교 교장인 캐나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