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문예출판사가 프랑스 철학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독창적 사유를 집약한 대표작 '시간과 타자'의 전면 개정판을 펴냈다.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이 타자를 축소, 삭제하는 방식으로 주체의 근거를 확립해왔음을 비판한다. 나아가 타인을 수용하고 환대하는 주체성,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주체성을 새롭게 모색한다. 레비나스의 저서는 대부분 독해 난이도가 높은 편이나 '시간과 타자'는 강연록의 형태라 그의 다른 저작에 비해 읽기 수월하다는 평을 듣는다.
문예출판사 '시간과 타자' 전면 개정판은 청중과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는 강연 현장의 생동감을 전하기 위해 모든 문장을 구어체로 바꿨으며, 레비나스를 비롯한 여러 철학 연구의 경향을 반영해 일부 단어와 문장을 다듬었다. 또한 이 책이 갖는 의미를 더욱 깊게 음미할 수 있도록 레비나스 사유 전반을 다룬 초판 옮긴이 해제를 '시간과 타자'가 집필된 시기의 레비나스 초기 철학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대체했다.
'시간과 타자'는 문예출판사가 1996년 국내 처음으로 번역 출간한 레비나스 저서다. 첫 출간 당시 레비나스 철학 사상에 대한 국내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으나 '시간과 타자' 출간을 계기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레비나스 연구로 학위를 받은 학자가 크게 늘었다. 이 책이 30년 가까이 독자에게 사랑받아온 이유는 서양철학에서의 시간과 타자 정의를 뒤집어 완전히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파르메니데스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서양철학이 타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축소한 후 흡수해 주체의 근거를 확립해왔다고 비판한다.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흡수'는 곧 타자성의 삭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이 주체를 개념화해온 방식을 비판하면서도 주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레비나스 사유의 독창성이 강조되는 부분이다.
레비나스는 자아나 주체성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강력히 반대하면서 타인을 수용하고 환대하는 주체성을 모색하는 '존재론적 모험'을 시도한다. 출발은 '홀로서기'다. 자신의 존재를 짊어지는 홀로서기가 전제된 후에야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를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로서기'만으로 진정한 타자와 미래를 마주할 수는 없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과 죽음, 에로스의 경험은 홀로 선 주체가 마주한 장벽을 넘어서게 한다. 지배할 수 없는 미래, 손에 쥘 수 없는 타자의 표상을 마주해 절대적 타자성을 상실하지 않은 타인을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미래를 마주한다.
'시간과 타자'는 레비나스가 2차세계대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인간의 존재 의미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인간, 윤리, 연대, 고통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진 지금,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 '평화의 철학'은 여전히 첨예한 주제와 사유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