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정경옥의 어머니가 장월중선이고, 그 할아버지가 장판개였기에 그 유전자가 정순임, 정경호, 정경옥 등 그들 형제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장월중선은 판소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장월중선은 이미 10세 이전에 큰 아버지인 장판개 명창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3세 때부터는 고모인 장수향에게 풍류 가야금, 오태석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특히 오태석에게 배운 가야금 병창 가락을 그의 막내딸 정경옥에게 전해 주었는데, 고제(古制)의 그 가락은 연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들어보면 은은하면서도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이야기, 가야금 병창에서 가야금의 역할이란 단순하게 노래의 선율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노래의 골격 선율에 다양한 시김새를 넣거나 일음(一音)을 길게 뻗어 나갈 경우에는 잔가락이나 사이가락을 넣기도 하고, 소리 뒷부분에서는 장고 장단의 역할을 하며 노래의 악구 사이를 간주(間奏)처럼 처리하기도 한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또 하나 박동실로부터 배운 판소리 심청가와 창작 판소리<유관순 열사가>와 <안중근 열사가>는 현재 그의 장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국립국악원에서 오랫동안 가야금 병창을 불러온 소리꾼, 정경옥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오빠는 아쟁산조의 정경호, 언니가 경상북도 판소리 예능보유자 정순임 명창이다. 이들은 어머니 장월중선(張月中仙)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가야금 병창(竝唱)이란 창자 스스로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장르인데,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로는 꽹과리를 치면서 부르는 불교의 화청이나 회심곡, 또는 비나리등이 있고, 장고를 치면서 부르는 민요 등도 있으나 이러한 연주형태는 병창이라 부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가야금병창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소리와 가야금 양 쪽이 능숙해야 되기 때문이며, 특히 가야금의 반주는 노래의 골격선율에 잔가락을 삽입하여 화려함과 탄력을 준다는 이야기, 정경옥의 가야금 병창은 발음이 분명하고 힘이 실려 있으며 상하청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면서 깊은 맛을 낸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지난 달, 무계원에서의 공연 역시, 작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강렬함과 부드러움의 조화, 그리고 꺽고 흔들고, 밀고 흘리는 다양한 창법, 무엇보다도 버티고 앉아있는 당당함이 청중을 압도하고도 남는다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지난주에는 무계원을 감동시킨 알심의 소리꾼, 김미나의 판소리를 소개하였다. 그는 현재 국립창극단 소속으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대내외 공연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는 점, 그의 소리는 오래전에 임방울 국악경연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점, 그 위에 판소리이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구파 명창인 점, 남원태생으로 초등학교 3학년부터 강도근 명창에게 흥보가를 배웠고, 그 후에는 전주의 이일주 명창에게 심청가와 춘향가, 서울에 와서는 안숙선 명창에게 적벽가와 춘향가, 김수연 명창에게 수궁가를 익혀 현전 판소리 5바탕을 모두 부를 수 있는 저력의 명창이란 점을 얘기했다. 또 그의 소리는 정감이 넘쳐흐르고, 진솔함이 가슴에 와 닿는 흔치 않은 소리란 점, 알심이란 곧남을 배려하는 마음인데 김미나는 상대를 진정으로 위하고 주위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따뜻한 속마음을 지닌, 알심 있는 소리꾼이란 점, 무계원에서는 단가 한 대목과 춘향의 이별 대목을 불러 주어 좌중을 숙연하게 만들고 애잔하게 만들기도 하면서 감동을 주었고, 역시 마이크를 쓰지 않아 발음이 깨끗하며 공감이 컸다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 이어 무계원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 이야기이다.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옛 전통가옥, 무계원이 현재는 해설이 있는 국악공연 풍류산방을 열고 있다는 이야기, 무계원의 전통 가옥은 1910년대 초에 지어진 대표적인 상업용 도시한옥, 오진암의 건축자재를 활용하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현재는 전통문화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이야기, 중인그룹에서 즐겨 부르던 점잖은 긴소리를 아직도잡가라고 부르는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 까닭은 1910년~1920년대에 나온 여러 잡가집들을 보면 전 장르를 망라한 노래들이 잡거하고 있어서 책의 이름도 잡가로 명명한 것인데, 긴 호흡으로 느짓하게 불러나가는 서울 경기지방의 긴소리를 잡가로 호칭하고 있는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잡가란 뭔가 섞여 있어서 순수하지 않은, 또는 잡스런 의미를 담고 있기에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장기타령에서는 적벽가 끝 부분에 나오는 적벽대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아 재미를 더했으며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도 들려주었는데, 특히 감동적인 선물은 정선 아리랑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최영숙의 공력이 그대로 녹아있는 멋진 표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성남에서 전통문화 살리기에 앞장서 온 방영기 명창의 소리인생 45주년 기념 발표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산타령은 여러 명이 소고(小鼓)를 들고, 대형을 갖추면서 불러온 합창곡이란 점, 다양하게 모양을 만들고 동작을 통일시켜 가면서 활달하고 씩씩하게 부르는 노래이기는 하나 선타령이 많고 장단이 들쑥날쑥하며, 고음역의 선율을 통성으로 질러대는 부분이 길어서 호흡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박자에 따라 4개의 악장, 곧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 등 악장의 구분 개념이 분명하다는 점과 떠는 기교와 흘러내리는 퇴성 등 경기지방의 섬세한 표현법이 녹아 있으며 가사의 내용이 건전하여 청소년 교육에 적합하다는 특징을 이야기 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그가 부르는 산타령은 일제시대 왕십리패의 모갑이었던 이명길의 소리제로 벽파 이창배 사범을 통하여 황용주와 최창남 등이 이어받았고 이들로부터 방영기에게 이어진 소리제라는 이야기, 귀한 소리이기는 하나 자생력이 약하므로 근본적인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 확산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서의 전공자 양성이나 교육현장의 관심이 중요하다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지난주 속풀이에서는 인천이 낳은 국악계의 풍물 명인, 지운하의 풍물인생 60주년을 기념하여 공연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나와 지운하 명인이 가깝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중 학술 및 실연교류회장에서의 만남이었다는 이야기, 동포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과 함께 우리의 소리나 장고, 꽹과리 가락이 절대적인 힘이 된다는 사실을 나와 지운하는 공감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고향땅 인천에서 동네 어른들이 치는 풍물굿을 자주 들으며 자랐고, 숭의초등학교 시절부터 풍물굿을 배웠으며, 당시의 숭의풍물단이 전국대회에서 수상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는 이야기, 그 뒤 남사당의 각종 예능을 두루 익히면서 이 분야의 정상급 명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는 조직의 하위그룹인 삐리생활을 하면서 스승을 봉양하였고, 구성원들의 기본질서가 무너지면 그 조직은 경쟁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철학을 배웠다는 이야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고향땅에서 주민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성남의 문화예술인으로 전통문화 살리기에 앞장서 온 방영기씨가 올해에도 어김없이 그의 소리인생 45주년을 기념하는 발표회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서울의 권번으로 한성권번, 조선권번, 종로권번이 당국에 의해 합병되면서 삼화권번으로 존재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 질 무렵,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가무연구회 회원들은 사설교습소를 차려 일반인들을 지도했는데, 관청의 허가가 있는 권번 이외에는 예기(藝妓)의 허가장을 받을 수 없었기에 모두 권번 문을 두드려 왔다는 이야기, 당시 이름난 사설학원이나 교습소의 운영자로는 마포의 박춘재와 김경호, 신촌의 김창연, 현저동의 박윤병 등이 있었다는 이야기, 특히 지금의 성동구 신당동이나 왕십리 부근이 그 중심지로, 이명길은 신당동에서 100여명의 제자를 가르쳤고, 엄태영이나 오성렬, 예능보유자였던 김태봉 등은 상왕십리에서, 탁복만은 하왕십리에서 사설 교습소를 운영해 왔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밖에도 김태운, 이명산, 고전무용의 이칠성, 효창동의 최석조, 이태원의 성수근, 내수동의 이만흥, 사직동의 김종수, 돈암동의 김두식, 예지동의 오봉식, 광희동의 이현재, 와룡동의 강흥태와 강흥식 형제, 익선동의 홍병호, 그리고 당시 제일 젊은 나이로 입회한 정득만과 이창배 등도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동 가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일제강점기 가무연구회에서 활동했던 회원들의 이야기로 한성권번에서 잡가 선생을 지낸 유개동을 소개하였다. 그는 1960년대 말, 산타령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김태봉, 이창배, 정득만, 김순태와 함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던 5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 12잡가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할 정도로 가사의 암기며 사설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였다는 점을 얘기했다. 특히 서도창으로 수심가를 두드러지게 잘 불렀으며 그 지역 명창 못지않게 독특한 서도의 목을 잘 묘사하였다는 점, 서울 경기의 12잡가 중에는 방물가(房物歌)를 잘 불렀던 명창이었다는 점, 방물이란 여자들의 소용인 패물이라든가 잡화를 말하며 노래 가사에는 방물을 열거하나 속뜻은 남녀의 사랑이 주제가 되고 있다는 점, 이 노래는 과거 8잡가에 포함되지 못하고 잡잡가에 속해 있던 노래였다는 점도 거론했다. 또 과거에는 기생의 양성은 주로 권번(券番)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일제 말기에는 기생조합이었고, 한성권번에서는 가곡, 가사, 시조에 경기잡가, 서도잡가, 민요, 정재무, 묵화 등 다채로운 과목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가곡의 장계춘, 가사와 시조에 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최정식이 작사 작곡한 금강산 타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노래는 처음에는 낮게 조용히 시작해서 점차 상행선율을 그려 나가다가 일만이천 대모에서는 최고조에 달하고 다시 하행하는 형식의 노래라는 점, 장단은 도드리장단의 6박+6박, 도합 12박이 짝을 이루는데, 12박 중에는 가사를 반드시 붙이는 박과 붙이지 않는 박이 거의 규칙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금강산에는 무려 40여 개의 절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장안사(長安寺)와 표훈사(表訓寺), 유점사(楡岾寺), 신계사(神溪寺) 등이 유명하며 유점사를 금강 제일의 사찰로 꼽고 있다는 점, 그 이유는 53불(佛)과 인목대비의 친필,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높은 제자 사명당(四溟堂)이 머물며 가르침을 주던 곳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한편, 풍등가(登歌)는 농사 열심히 지어 나라를 일으키자는 취지로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노래인데, 노래말에 논농사에 뿌리는 벼 종류의 이름, 밭농사의 곡식이름이 나오며, 열심히 농사를 지어 부국을 노래하고 있어 놀자판 가사와는 달리, 건실한 내용이라는 점, 처음 시작부분은 국태민안 시화연풍 연년이 돌아든다. 황무지 빈터를 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1930년대 일제의 찬탈이 극도에 달해 있을 때,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였던 조선가무연구회(朝鮮歌舞硏究會)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연구회는 1930년대 중반, 최경식이나 박춘재 등 경-서도 음악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로 이름 그대로 경서도 지방의 가무(歌舞)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는 점, 당시 활동했던 회원들은 재담의 이순일, 양주 산대놀이의 정한규와 이건식, 12잡가의 대 명창이었던 원범산, 선소리 산타령의 명창들로 과천 모갑이 소완준, 왕십리패의 이명길이나 탁복만, 이명산, 김태봉, 고전무용의 이칠성, 잡가와 민요의 김태운이나 엄태영, 유태환 등의 이름이 보인다는 점을 얘기했다. 특히 조선권번의 잡가선생으로 금강산타령이나 풍등가를 작사 작곡한 최정식도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금강산타령은 지금도 널리 불리고 있는 노래로 경기민요를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익혀야 하는 필수 노래라는 점도 강조하였다. 이 노래는 모두 7절로 이루어진 것인데, 1~6절 까지는 6박의 도드리 장단으로 부르고, 마지막 7절은 노랫가락으로 맺는 형식이며 그 시작은 천하명산 어드메뇨, 천하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