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강원 횡성군 공근면 공근남로169번길 92-7 (매곡리)에 있는 '육절려 (六節閭) '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숨진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한 그의 일가족 6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이다. 서예원은 조선 선조 26년(1593) 왜적의 2차 침입 때 적은 군사와 무기를 가지고 진주성을 굳게 지키다 결국 전사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와 큰아들 계성, 며느리 노씨 그리고 어린 딸도 밤낮으로 군사들을 도우며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째 아들 계철은 강에 몸을 던졌으나, 왜적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3년 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숙종 4년(1678)에 서씨 가족의 충절이 밝혀진 후, 숙종 18년(1692) 일가족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 정려각을 세웠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10개의 원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네벽은 붉은색을 칠한 긴 나무막대를 돌려 세웠다. <자료: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17. 4. 4.~4. 9.)에 ‘한국도자의 정중동(靜中動)’을 주제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최봉현)과 함께 한국공예전시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청자·백자·분청사기·옹기 등 전통도자에서부터 현대 도자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영역에서 30년 이상 작품 활동을 이어온 한국도자의 장인 16명이 빚어낸 90여 점의 작품을 출품해 한국도자의 진수를 알릴 예정이다. 이번 한국공예전시의 핵심 주제어는 바로 ‘정중동(靜中動)’이다. 이는 한국도자가 추구해온 외형적, 내면적 특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부단한 내면적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조화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한국도자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이에 이번 전시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전통을 계승하고, 시대정신과 예술성을 담아 새로운 창작을 선보여 온 장인 16명의 작품을 엄선해 각각 ‘정(靜), 중(中), 동(動)’이라는 세 가지 전시 공간에 맞춰 구성했다. ‘정(靜)’에는 전통적인 제작 기법을 계승한 작가들이 만든 청자와 백자 작품들을 배치하고, 이와 대비되는 ‘동(動)’에는 현대적인 감성과 소재, 표현 방식으로
[우리문화신문= 최미현기자] 척화비는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백성들에게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드높이고자 전국 곳곳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이 비는 건축공사 도중 발견되어 선창마을회의 소유지에 세웠 두었다가 1995년 천가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긴 것이다. 비의 모습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형태이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경고 섞인 내용의 글을 적고 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으로,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는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최미현기자] 백자 청화매월십장생문 팔각접시 (白磁 靑畵梅月十長生文 八角楪匙)는 조선 후기에 만든 높이 5.2㎝, 아가리 지름 13.6㎝, 밑지름 4.3㎝인 백자 접시다. 바깥 쪽은은 아가리 부분부터 굽까지 8각으로 만들었다. 문양은 접시 안쪽 바닥에 매월문(梅月文)이 있고, 바깥쪽 전체에 십장생문을 능숙한 필치로 그려 넣었다. 유약색이나 각진 그릇 모양, 청화 문양으로 보아 18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례가 드문 팔각 접시에 매월과 십장생의 청화문양이 있는 희귀한 예이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인천안목은 송나라 승려 지소(智昭)가 당시 불교의 5개 종파의 기본사상과 창시자들의 행적을 요약하여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우리나라 선가(禪家)에서 많이 읽히는 책이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6년(1357)에 원나라에서 활동하던 강금강(姜金剛)이 간행한 책을 원본으로 삼아, 조선 태조 4년(1395)에 무학대사가 회암사에서 다시 새겨 펴낸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권 상, 중, 하를 하나의 책으로 엮었으며, 크기는 세로 27㎝, 가로 16㎝이다.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하지만, 책머리와 끝부분에 일부 파손이 있다. 고려시대의 판본을 기초로 조선시대에 간행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조선 전기의 불교학은 물론 서지학의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조선 성종 20년(1489)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항아리로 소나무와 대나무를 그렸다. 크기는 높이 48.7㎝, 입지름 13.1㎝, 밑지름 17.8㎝이다. 아가리가 작고 풍만한 어깨의 선은 고려시대 매병(梅甁)을 연상케 한다. 어깨로부터 점차 좁아져 잘록해진 허리는 굽부분에서 급히 벌어져 내려오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로는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 제644호)와 순백자 항아리를 비롯한 몇 예가 있다. 조선시대 궁중의 연례를 비롯한 여러 의식에서 꽃을 꽂아둔 항아리로 사용된 듯하다. 문양은 아가리 부분에 연꽃 덩굴무늬를 두르고 몸통 전체에 걸쳐 소나무와 대나무를 대담하게 구성하였다.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청색의 농담으로 회화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이 항아리는 오랫동안 지리산 화엄사에 전해져 왔던 유물인데 2번이나 도난당했던 것을 찾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옮겨놓았다. 주둥이 안쪽에 ‘홍치’라는 명문이 있어 만든 시기가 분명한 자료이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방짜수저는 전통적인 금속공예품인 유기(鍮器)제품의 하나로서 우리 생활공간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던 실용성이 높은 공예품이었으나, 현대화의 과정에서 대체용기의 사용으로 점차 인멸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유기는 일반적으로 놋쇠라고 부르며 구리에다 주석이나 아연 또는 니켈을 혼합하여 만든 합금물체로 제작 성분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유기의 제작방법은 크게 주물(鑄物), 방자(方字), 반방자(半方字)로 나누어진다. 방짜는 양대(良大)라고도 하는데 동과 주석의 합금을 도가니에 녹여 바둑형태와 같은 놋덩어리를 만든 후 이것을 불에 달구어 두들겨서 늘리고 다듬어서 기형을 이루는 방법이다. 기능보유자 김영락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방짜수저 제작에 관한 일을 배웠으며 현재 선교장의 공방에서 방짜수저를 제작하고 있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이란 초기철기시대에 나타난 청동으로 된 거울로 잔무늬거울이라고 한다. 잔무늬거울의 뒷면에는 거울을 멜 때 사용하는 고리인 뉴가 우리나라의 경우 2개가 돌출되었다. 또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보이는 거칠게 무늬를 새긴 거울(거친무늬거울)에 비해, 작은 삼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기하학적 무늬를 세밀하게 새긴 것이 특징이다. 이 다뉴세문경은 지름 21.2㎝로 뉴가 2개이며 내구(內區), 중구(中區), 외구(外區)로 3등분 되어있다. 각 구마다 작은 삼각형 무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세밀하게 장식하였다. 외구에는 동심원 무늬가 2개씩 짝을 지어 균형있게 8개를 배치하였으며, 주석이 많이 들어가 빛이 잘 반사되게 만들었다. 현존하는 잔무늬거울 가운데 크기면에서 가장 크고 문양도 가장 정교한 우리나라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자료: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조선시대 무신인 오자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로 가로 105㎝, 세로 160㎝이다. 오자치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물리친 공을 인정받아 일등공신에 올랐다고 한다. 이 초상화는 오른쪽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머리에는 검은색의 사모를 쓰고 짙푸른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두 손은 옷 속으로 마주 잡고 있다. 가슴에는 호랑이무늬를 수놓은 흉배가 있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의 직위가 무관1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얼굴은 살색을 칠한 후 갈색으로 윤곽을 그렸고 입술은 살빛보다 약간 짙은 황토색을 사용하여 차분한 느낌을 준다. 옷의 외곽선을 각이 지게 표현했고 옷자락의 옆트임 안쪽으로 보이는 안감도 풀을 먹인 것처럼 세차게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그린 대상만 다를 뿐 장말손의 초상화나 손소의 초상화와 같은 형식과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성종 7년(1476) 모든 공신의 영정을 그리도록 했을 때 함께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 몇점 남지않은 귀중한 작품으로 공신그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연곽(蓮廓)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연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연뢰(蓮蕾)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항아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갖춘 모본이 되는 종이다. <자료: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