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춘곡 임치정(林蚩正, 1880. 9. 26 ~ 1932. 1. 9 )선생은 1880년 평안남도 용강군 산남면 홍문동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던 1900년까지 약 7~8년간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자원하여 아내를 고국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도미하였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선생은 사탕농장에 배속되어 노동자로서 미주생활을 시작하였다. 1903년 8월 7일 선생은 홍승하, 윤병구, 안정수, 이교담, 박윤섭, 문홍석, 임형주, 김정국 등 주로 기독교 감리교 출신 인사와 유학생들과 함께 구국정신 고취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정치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신민회 창립 후 선생 등은 동족단결, 민지계발(民智啓發), 국정쇄신을 강령으로 설정하고 홍승하를 회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같은 해 12월 2일에는 하와이 카우아이(kauai)와 카파(kapaa)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27일 이강이 국내로 파견된 것을 기점으로 이재명, 오대영이 파견되었고, 10월 24일에는 이재명의 매국적 처단 협조와 국내와의 통신연락을 위해 선생이 국내로 파견되었다. 선생은 1907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안공근 [1889~1940] 선생은 1889년 7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안태훈 진사와 조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1906년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 등에서 영어 및 일본어를 배우고 1907년 3월 경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후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거 직후 중국 대련에서 안중근 의사를 면회하고, 사형이 집행된 후 여순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망명을 선택하게 된다. 형 안정근과 함께 1910년 5월경 평양에서 북간도를 거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갔고, 안중근의사의 주요 활동지이자 단지동맹의 근거지인 연추로 옮겨가 안창호선생의 도움으로 정착하였으며, 1912년 6월부터 상트페테르브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으나 경비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4년 4월경에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형이 개설한 상점에서 일하던 중 1914년 9월에 김정국처단사건을 주도하였고 형 안정근과 함께 대규모 농장 경영을 통한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힘쓰기도 하였다. 1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김원식선생은 1907년 7월 이후에 강원도 북부에서 군사를 모아 활동을 전개한 항일의병장이다. 그는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친일파들을 척결하고 한국의 자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반일활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이어 일제는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과 1907년 7월의 정미조약-군대해산을 통해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내정과 외교상의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전국 각지에서 애국지사들이 분연히 일어나 치열하게 항일활동을 펼쳤다. 정미조약-군대해산 이후에 일어나 강원도 북부에서 활동한 김원식도 그러한 의병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미조약-군대해산 이후에 강원도 북부의 산악지대에서도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이들 항일의병들은 1907년 9~10월 2달간 춘천관찰부를 포위하고 거센 공격을 펼쳤을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당시 평민과 향리의 후손인 박선명, 최천유, 지홍민, 최영석, 길희정 등은 분연히 일어나 춘천 인근에서 항일활약을 펼쳤다. 이로써 강원도의 의병피해자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재혁 (1895~1921) 선생은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아버지 박광선과 어머니 이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사립육영학교(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들어가 근대적 교육을 받았고,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최천택(崔天澤)오택(吳澤)과 의형제를 맺고 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1913년 선생과 최천택 등은 구세단을 조직, 활동하다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어 1917년 6월 거금 700원을 조달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중국, 싱가포르 등지에서 무역상으로 일하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고, 1920년 4월경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참여하게 된다. ▲ 박재혁 선생 의열단은 1920년대 전반기 암살과 파괴 방식으로 강도 높은 의열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주요 일제기관들에 대한 동시 투탄거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관련자 20명이 체포되어 거사가 좌절되자 이에 대하여 복수를 결의하게 되었다.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동래 부산에서 거사를 계획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인 총독부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일제경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에서 김문환과 임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숙(1898.3.10~1969.4.12,호:雲巖) 선생은밭일을 도우며, 한문과 소학교 공부를 하였다. 1916년 서간도로 망명하려다가,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서 불교에 입문하고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월초(月初)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근대사회과학에 눈떴다. 3.1운동 때에는 양주, 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김사국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듯하다. 1921년 봄 출옥 후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무산자동맹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김한, 조봉암 등과 교류하였다. 1923년 초 승려 5명과 함께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民國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선생은 사회주의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한인 유학생사회에서 이름을 떨쳤다. 선생의 숙소가 한인아나키스트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사실에서 시사되듯이, 선생은 의열단(義烈團) 단원 및 한인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진보적인 근대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30분경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정거장 앞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한국민족운동사상 첫 의열투쟁이 만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장인환(張仁煥,1876.3.10~1930.5.22)과 전명운(田明雲), 두 의사가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제 한국침략의 앞잡이로 광분하던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 steve ns)를 총살 응징한 것이다. 스티븐스가 일본 정부와 한국 통감부의 특별 밀명을 띠고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 정거장에 도착, 승용차에서 내려 페리빌딩에 들어서려는 순간 역사적인 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육혈포라 불리던 권총을 들고 대기 중이던 전명운 선생이 먼저 앞으로 다가서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실탄이 총열과 맞지 않아 불발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총대를 잡고 총두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맹타하고 돌아서 달아나려 하였고, 스티븐스는 그를 뒤쫓아 잡으려 하였다. 이 순간 스티븐스의 뒤에서 역시 권총을 품고 기다리던 장인환이 세 번 방아쇠를 당겼다. 첫발은 스티븐스와 전명운이 뒤엉켜 움직이는 바람에 빗나가 도리어 전명운의 어깨에 관통상을 입혔고, 제2발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원수 왜적은 우리 민족을 없애려고 배로 나르고 차로 날라 바다 속에 넣으려 하니, 우리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호라! 저들이 있고 우리가 없어지든 우리가 살고 저들이 없어지든 사생을 결단해야 하니, 이 형세를 장차 어찌 하리오? 전국의 신민이 모두 창의(倡義)하는 마음으로 뭉쳐 있으니, 4천년 역사와 5백년 종사, 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이는 구한말에 덕유산을 무대로 삼았던 의병장 문태수 [1880-1913] 선생이 1908년 2월에 발표한 격문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전력이 투입되어 구국의 성전(聖戰)으로 승화된 의병전쟁이 한창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결사항전을 각오한 선생의 굳은 신념이 생생하게 배여 있다. ▲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문태수 선생은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신기(장구지)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평이고, 본명은 태진(泰珍)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가 태수(泰洙) 혹은 태서(泰瑞)였다고 한다. 어려서 선생은 마을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 한학을 공부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17세 되던 무렵 태어난 동네에서 육십령 너머의 장수군 계북면으로 이사하였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순국열사 김마리아에게 고함 -황인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이제야 김마리아, 당신에게 고합니다. 당신은 잠자는 조선여자 깨워 횃불 들게 하시고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셨습니다. 역사학자인 박용옥 교수는 당신을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이며 여성운동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한국민 이윤옥 시인은 당신을 이렇게 찬미합니다. 세상을 구원한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처럼/ 닭 우는 소리 멈춘 동방의 조선 땅에/ 인자한 마리아로 나투시어/ 미혹의 나라를 밝히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08년 9월 20일 밤, 장흥 신풍에서 전투를 마친 강무경 의병장은 온 몸에 신열이 나고 피로가 엄습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평소 인연이 있던 영암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梁德寬) 집을 찾는다. 양 선비집에 도착한 강 의병장은 신음 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는데 이를 간호 해준 사람이 양 선비의 둘째딸 양방매(梁芳梅, 1890. 8.18~1986.11.15) 처녀다. 아버지 양 선비는 이들이 좋은 배필이라 여기고 이들의 혼례를 치러주었다. 강 의병장이 양 선비 집을 찾은 지 이틀만의 일이다. 강 의병장이 몸을 회복하기 무섭게 일본군의 대토벌작전 소식이 들려왔다. 강 의병장은 채비를 차리고 집을 나서야했으나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아내인 양방매가 따라나서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말을 하며 갈 길을 재촉했다. 여자가 나설 데가 아니라며 극구 말렸으나 양방매는 막무가내였다.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강무경의 부인 양방매는 남편을 따라 이렇게 항일전에 투신하였다. ▲ 94살 때 남편의 무덤을 찾은 양방매 애국지사(1984) 전북 무주 출신의 강무경이 심남일 함께 전남 함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시냇물이 모여 큰 강물을이루고, 티끌 모아 태산도 이룩한다하거든, 우리 민족이 저마다 죽기 한(恨)하고 마음에 소원하는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우리 조선은 세계 강대국들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문제가 해결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1919년 4월 5일 해주 만세 운동 때 쓰기위해 옥운경을 비롯한 해주 기생들이 직접 한글로 쓴 독립선언서 내용이다. "오늘 해주 기생(海州 妓生) 일동이 해주 종로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남문에서 동문을 경유하여 서문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해중월, 벽도, 월희, 향희, 월선, 화용, 금희, 채주 등이 다른 남자들과 함께 체포되다." 이는 <매일신보,每日申報> 1919년 4월 5일치 기록이다. 이에 앞서 1919년 2월 말, 문응순(예명 月仙), 김성일(예명 月姬)은 고종의 인산(因山, 태상황, 황제, 황태자, 황태손과 그 비 들의 장례)을 보기 위해 상경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고종의 인산을 보고 해주로 돌아왔다. 해주의 만세운동은 3월 1일과 3월 9일에 이어 4월 5일에 크게 일어났는데 이날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기생들은 옥운경,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