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동하 선생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소식이 보도되자 국민회 원동위원들과 대동공보사 관련 인물들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논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선생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안중근과 우덕순을 하얼빈역까지 무사히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여 의거를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 일로 투옥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이후 러시아로 복귀하여 러시아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거로 체포된 유동하와 우덕순, 조도선 등은 심문과 재판과정 내내 관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과 위증으로 일관하였으며 안중근 의사는 시종일관 자신의 단독 결행임을 주장하였고 그 외의 관련자들도 사전에 약속한 내용만을 진술하였다. 1909년 10월에 들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할 것을 논의한 결과 명사수인 안중근 의사가 추천되었으며, 유동하의 부친인 유경집과 우덕순,조도선,김성화,탁공규 등이 구국혁신을 맹서하고 연서한 뒤7인 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동맹은 의거를 구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이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의 식솔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었다.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이주는 증조부 되는 윤재옥(尹在玉)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재옥이 43세 때인 1886년 부인과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본래 살던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를 떠나 두만강 건너편 자동(紫洞. 현재의 자동(子洞))에 처음 자리잡으면서,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생활은 시작되었다. 북간도 이민 초창기에 자동으로 이주한 윤재옥은 부지런히 농토를 일구어 주변에서 부자 소리를 들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동열 [1879~1950] 선생은 1879년 3월,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아버지 유종식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나 19살 때 사촌형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성성학교(成城學校)에 입학, 이를 계기로 군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선생은 대한제국 장교로서 노백린이동휘 등과 함께 비밀결사 효충회를 결성하여 친일파 대신의 암살을 계획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09년 대한제국 참령(소령)으로 군대를 떠났으며, 이후 서우학회와 신민회, 서북학회에 관여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북경으로의 망명했다. 이후 선생은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북경은 물론 국내각지에서 활동하다 1911년 8월 일제가 조작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신한혁명당,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후 선생은 중국관내에서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0년 광복군 창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수흥[1905~1929]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기 이천 출신의 대학자 이식의 후손으로 이천 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한때 입산하여 승려생활을 하였다. 1923년 19세 때 만주로 망명해 통의부와 참의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참의부는 국내 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1925년 일제의 기습 공격으로 고마령에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선생은 독립군 활동이 주춤해지자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들을 처단함으로써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1926년 5월 국내로 들어왔다. 선생은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자격으로 황해도 평산을 거쳐 경성에 잠입한 후 동소문파출소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안성 부호의 아들을 처단하고, 이천 현방경찰주재소와 백사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 이수흥 선생 일제 경찰은 선생의 신장이 5척에 불과하다는 단서를 잡고 관내에 거주하던 키 작은 젊은이들 조사하였다. 3천 여 명이 동원된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투쟁을 이어가던 선생은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선생은 3년의 예심 끝에 경성지방법원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춘곡 임치정(林蚩正, 1880. 9. 26 ~ 1932. 1. 9 )선생은 1880년 평안남도 용강군 산남면 홍문동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던 1900년까지 약 7~8년간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자원하여 아내를 고국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도미하였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선생은 사탕농장에 배속되어 노동자로서 미주생활을 시작하였다. 1903년 8월 7일 선생은 홍승하, 윤병구, 안정수, 이교담, 박윤섭, 문홍석, 임형주, 김정국 등 주로 기독교 감리교 출신 인사와 유학생들과 함께 구국정신 고취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정치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신민회 창립 후 선생 등은 동족단결, 민지계발(民智啓發), 국정쇄신을 강령으로 설정하고 홍승하를 회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같은 해 12월 2일에는 하와이 카우아이(kauai)와 카파(kapaa)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27일 이강이 국내로 파견된 것을 기점으로 이재명, 오대영이 파견되었고, 10월 24일에는 이재명의 매국적 처단 협조와 국내와의 통신연락을 위해 선생이 국내로 파견되었다. 선생은 1907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안공근 [1889~1940] 선생은 1889년 7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안태훈 진사와 조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1906년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 등에서 영어 및 일본어를 배우고 1907년 3월 경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후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거 직후 중국 대련에서 안중근 의사를 면회하고, 사형이 집행된 후 여순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망명을 선택하게 된다. 형 안정근과 함께 1910년 5월경 평양에서 북간도를 거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갔고, 안중근의사의 주요 활동지이자 단지동맹의 근거지인 연추로 옮겨가 안창호선생의 도움으로 정착하였으며, 1912년 6월부터 상트페테르브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으나 경비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4년 4월경에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형이 개설한 상점에서 일하던 중 1914년 9월에 김정국처단사건을 주도하였고 형 안정근과 함께 대규모 농장 경영을 통한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힘쓰기도 하였다. 1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김원식선생은 1907년 7월 이후에 강원도 북부에서 군사를 모아 활동을 전개한 항일의병장이다. 그는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친일파들을 척결하고 한국의 자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반일활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이어 일제는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과 1907년 7월의 정미조약-군대해산을 통해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내정과 외교상의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전국 각지에서 애국지사들이 분연히 일어나 치열하게 항일활동을 펼쳤다. 정미조약-군대해산 이후에 일어나 강원도 북부에서 활동한 김원식도 그러한 의병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미조약-군대해산 이후에 강원도 북부의 산악지대에서도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이들 항일의병들은 1907년 9~10월 2달간 춘천관찰부를 포위하고 거센 공격을 펼쳤을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당시 평민과 향리의 후손인 박선명, 최천유, 지홍민, 최영석, 길희정 등은 분연히 일어나 춘천 인근에서 항일활약을 펼쳤다. 이로써 강원도의 의병피해자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재혁 (1895~1921) 선생은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아버지 박광선과 어머니 이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사립육영학교(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들어가 근대적 교육을 받았고,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최천택(崔天澤)오택(吳澤)과 의형제를 맺고 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1913년 선생과 최천택 등은 구세단을 조직, 활동하다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어 1917년 6월 거금 700원을 조달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중국, 싱가포르 등지에서 무역상으로 일하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고, 1920년 4월경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참여하게 된다. ▲ 박재혁 선생 의열단은 1920년대 전반기 암살과 파괴 방식으로 강도 높은 의열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주요 일제기관들에 대한 동시 투탄거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관련자 20명이 체포되어 거사가 좌절되자 이에 대하여 복수를 결의하게 되었다.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동래 부산에서 거사를 계획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인 총독부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일제경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에서 김문환과 임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숙(1898.3.10~1969.4.12,호:雲巖) 선생은밭일을 도우며, 한문과 소학교 공부를 하였다. 1916년 서간도로 망명하려다가,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서 불교에 입문하고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월초(月初)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근대사회과학에 눈떴다. 3.1운동 때에는 양주, 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김사국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듯하다. 1921년 봄 출옥 후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무산자동맹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김한, 조봉암 등과 교류하였다. 1923년 초 승려 5명과 함께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民國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선생은 사회주의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한인 유학생사회에서 이름을 떨쳤다. 선생의 숙소가 한인아나키스트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사실에서 시사되듯이, 선생은 의열단(義烈團) 단원 및 한인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진보적인 근대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30분경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정거장 앞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한국민족운동사상 첫 의열투쟁이 만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장인환(張仁煥,1876.3.10~1930.5.22)과 전명운(田明雲), 두 의사가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제 한국침략의 앞잡이로 광분하던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 steve ns)를 총살 응징한 것이다. 스티븐스가 일본 정부와 한국 통감부의 특별 밀명을 띠고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 정거장에 도착, 승용차에서 내려 페리빌딩에 들어서려는 순간 역사적인 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육혈포라 불리던 권총을 들고 대기 중이던 전명운 선생이 먼저 앞으로 다가서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실탄이 총열과 맞지 않아 불발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총대를 잡고 총두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맹타하고 돌아서 달아나려 하였고, 스티븐스는 그를 뒤쫓아 잡으려 하였다. 이 순간 스티븐스의 뒤에서 역시 권총을 품고 기다리던 장인환이 세 번 방아쇠를 당겼다. 첫발은 스티븐스와 전명운이 뒤엉켜 움직이는 바람에 빗나가 도리어 전명운의 어깨에 관통상을 입혔고, 제2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