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악기들 중에서 입으로 불어 소리 내는 악기를 흔히‘피리’또는‘퉁소’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부르는 것은 잘못 전해오는 명칭인 것이다. 모차르트의 유명한 오페라 중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진 마적(魔笛)을 우리말로는 요술피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적(笛)을 피리로 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휘파람을 구적(口笛), 입피리라는 말도 쓴다. 그러나 우리음악에서 말하는 적, 예를 들면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같은 악기는 취악기이지만 종적(縱笛)이 아니라 횡적(橫笛),즉 가로 부는 취악기를 의미한다. 피리는 반드시 소리를 유발하는 혀(舌), 또는 서를 관에 꽂아서 세로로 부는 관악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입으로 부는 악기를 모두 피리요 퉁소라고 구분 없이 부르는 것은 마치 서양의 관악기를 금관악기든 목관악기든 모두 나팔이라 통칭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전통음악에서의 피리는 대나무 관대, 즉 죽관(竹管)에 8개의 구멍을 뚫고‘겹혀(double reed)’흔히‘서’라고 하는 리드를 꽂아 부는 악기를 말함이다. 피리처럼 겹혀를 쓰는 서양 관악기에는 오보에(ob
누구이 허수아비 비웃으면 불이 솟고 대밭에 우뚝 솟은 대나무는 봄이 한창 이 여름 누구는 울고 또 누구는 웃었는가 * 누구이 : 누군가가 * 갈걷이 : 가을 걷이 * 결잠 : 겨울잠 아무리 과학만능 시대라 해도 허수아비를 비웃으면 안 된다. 그가 온 여름 벼를 지켜낸 일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정종실록 (1399)1년 기묘 기록에 보면, 중추원 부사 구성우의 처 유씨는 계집종 영생을 죽이는 등 악행을 저질러 헌사(憲司)에서 유씨를 죽이기로 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범한 죄가 크기는 하지만, 봄·여름은 만물이 생장하는 때라, 옛 법에도 죽이는 것을 꺼렸으니, 추분(秋分) 뒤를 기다려서 단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레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서서히 음의 기운이 커진다는 24절기의 16째 추분입니다. 요즘 추분에 대한 생각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옛 기록에는 한결같이 제사를 지낼 만큼 신성시 했던 날이지요. 특히 춘분과 추분뒤에는 춘사일(春社日), 추사일(秋社日)이라고 해서 농사 시작 때는 농사가 잘 되는 마음으로 가을걷이 때는 수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추분은 해가 북에서 남으로 적도를 통과하는 때여서 낮밤의 길이가 같아지는데 이는 더함도 덜함도 없는 중용을 뜻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살아가면서 중용을 지키기가 쉽지 않지만 중용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자세지요. 오늘날 24
조선 4대 세종큰임금(1397~1450)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세종큰임금은 세계 최고의 글자인 한글을 만들고 그 밖에 천문학, 농업, 음악 부분에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있지요. 특히 박연도 놀랄 정도의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던 세종은 세종악보를 창안한 것은 물론 직접 봉래의라는 음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봉래의(鳳來儀)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관현악(管絃樂)으로 지은 방대(尨大)한 춤곡입니다. 봉래의는 <전인자(前引子)>,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豊亨)>,<후인자(後引子)>의 다섯 가지 음악으로 구성됩니다. 그 가운데 <여민락(與民樂)>은 <치화평(致和平)>과 함께 지금도 연주되는 곡이지요. 본래 “여민락”은 《맹자》의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하편의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온 말인데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다'라는 뜻입니다. 세종큰임금은 이와같이 음악에서도 백성과 함께 하려는 마음을 지녔던 분입니다. 또한 세종은 말을 타고 가다가 농부를 보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음은 물론 일산(햇빛가리개)까지 치우도록 했다는 이야기
공예기술 관련 중요무형문화재로는 조각장, 장도장, 두석장, 백동연죽장, 유기장, 금속활자장, 주철장과 함께 “입사장(入絲匠)”이란 것도 있습니다. 입사장은 금속그릇의 표면을 작은 정으로 쪼아 다른 금속을 끼워 넣거나 덧씌워 무늬를 놓는 일을 하는 장인을 말하며 중요무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주로 놋이나 쇠로 만든 그릇에 은입사(銀入絲)를 하지만 금입사(金入絲)도 있습니다. 은입사로 만든 유형문화재 가운데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향로인 국보 제75호 이 있습니다. 향로에는 57자의 은입사 글자가 있는데, 그 내용으로 미루어 우리나라 향로로서는 가장 오래된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이름에 “함은향완”이라는 것은 은입사라는 뜻이며 곧 은상감(銀象嵌)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향로 전체에 무늬가 음각되어 있는데, 6개의 동그라미 안에 '범(梵)' 자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에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지요.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은 선과 가는 선을 적절히 배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서남쪽 병풍산에는 곤룡포 무덤이 있습니다. 곤룡포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벼슬아치가 이 무덤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갔지요. 이 곤룡포 무덤은 병자호란 그리고 인조와 관련 있는 곳입니다. 무슨 사연으로 곤룡포가 임금의 무덤에 있지 않고 여기 묻혀 있을까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꾼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 남한산성에 인조가 피신하러 갈 때 전세가 불리하다는 소식이 연달아 들리자 겁을 먹은 수행원과 군졸들이 하나, 둘 도망쳤고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를 데리고 사공도 없는 나룻배로 겨우 송파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강은 건넜지만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눈까지 내리자 인조는 신하들의 등에 번갈아 업혀가면서 남한산성으로 오릅니다. 그러다 더 이상 갈 수 없어 길가에 지쳐 주저앉아 있을 때 산에서 내려오는 서흔남이란 나무꾼을 만났습니다. 이때 나무꾼은 임금을 업고 짚신을 신은 발로 피를 흘려가며 무사히 빙판길을 올라 임금을 남한산성까지 모셨습니다. 이때 서흔남은 소원을 말해보라는 인조의 물음에
일본에서 건너온 화투를 보면 12달을 상징하는 것들이 거의 꽃과 나무 그림이다. 1월을 나타내는 것은 소나무고, 2월 매화, 3월 벚꽃, 4월 흑싸리, 5월 난초, 6월 모란,7월 홍싸리, 8월 달, 9월 국화, 10월 단풍, 11월 오동, 12월 수양버들을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화투에는 식물들이 그려져 있을까? 서양의 카드에는 다이아몬드나 왕관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말이다. 이러한 답은 일본의 고전 속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 나팔꽃으로 불리는 아사가오는 일본의 평안시대(平安時代, 794-1192) 이후 문학작품 속에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하나는 무상함이요, 다른 하나는 남자에 대한 사랑이다. “아침에 일어나 꽃을 보려하니 벌써 시들어 버리는구나”(新古今集), “믿음직한 그대 얼굴을 보는 듯 피어난 꽃”大和物語과 같이 나팔꽃에 대한 시가 있는가 하면 일본 고전수필의 백미라고 하는 즈레즈레구사(徒然草, 139단)에는 봄과 여름의 꽃으로 제비붓꽃(杜若), 패랭이꽃(撫子), 등나무(藤), 황매화(山吹)를 꼽고 있다. 특히 등나무는 일본 최고의 시집인 만엽집에서 ‘가난한 어부가 해 입는 등나무 옷’이라는 표현이 있으나 고킨슈(古今集)에
일본인들처럼 오마모리(부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신사(神社)나 절에 가면 반드시 부적을 파는 곳이 있는데 다양한 모양새만큼이나 지니고자 하는 목적도 제각기 다르다. 좋은 일이 생기도록 비는 뜻에서 몸에 지니는 것으로는 운이나 복 불러오기, 건강 지키기, 학업성취, 이사안전, 교통안전, 안산기원, 연애성취, 금전운, 사업번창, 출세, 승진 등 인간세상에서 빌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그 대상이며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는 액막이(厄除け)나 마귀 쫓아내기(魔除け) 용 부적을 몸에 지니기도 한다. 또한 가정이나 회사, 절, 신사 같은 공간에 걸거나 놔두는 오후다お札)는 크기가 크지만 오마모리(お守)는 몸에 지니는 것으로 크기도 작고 앙증맞은 것들이 많다. 이러한 부적은 가방이나 자동차 안에도 놓고 책상 위에도 놓아두는 등 사람에 따라서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부적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부적을 파는 곳은 주로 신사와 절인데 신사에서 파는 것은 부적이 곧 신체(神體)를 뜻하는 것으로 신사의 이름이나 축복의 말이 쓰여 있으며 신사에 모시는 신상(神像)의 다양한 모습으로 부적을 만들어 팔고 있다. 절에서 파는 부적은 그
“명치44년 2월(1911년) 조선은행 건축도 무사히 낙성식을 마쳐 나는 은행 측으로부터 5천 엔을 보너스로 받았다. 그 돈으로 경성 남대문 밖 봉래정 봉학산에 내 집을 지었다. 부지는 5,000평으로 남산이 바라다 보이고 한강물이 마치 정원수처럼 발아래 굽어보이는 명승지인데 내 나이 33살 때 일이다. 봄이면 산 정상에 올라 한강의 경치를 즐기는데 마치 극락에 이른 것 같았다.” 33살 청년의 나이에 부지 5천 평의 대저택을 지을 만큼 조선에 건너온 초보 건축가의 조선생활은 풍족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전인 1907년에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조선에 건너와 조선은행의 공사 감독을 맡았다. 한반도와 만주의 경제권을 쥐려는 포석으로 착수한 일본 제1은행 한국 총지점(조선은행 본점)이 조선에서의 첫 공사 감독이었다. 일본 하마마츠 출신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1880.2.8-1963.12.21)는 일본의 건축가로 조선, 만주를 비롯하여 출신지인 시즈오카 현의 공공건물 건축에 많이 관여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공부가 죽기보다 싫어 아버지로부터 무척 꾸지람도 많이 들었던 그는 전기기사가 꿈이었으나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여 훗날 조선은행의 설계를 맡게
“메이지신궁은 메이지천황의 성덕을 영원히 존경하고 사모하고자 국민들의 뜨거운 정성으로 만든 곳입니다. 이곳은 메이지천황과 쇼우켄황태후의 신령을 기리는 곳으로 정초 신사 참배지로 전국최고의 참배자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이지신궁의 한국어판 자료에는 친절하게 메이지신궁의 역사와 경내도 그리고 신사참배 방법 등이 자세히 쓰여 있다. 젊은이들의 거리인 하라주쿠와 NHK방송국에서 가까운 이곳은 일본 최고의 신사참배지로 부각되고 있을 뿐 아니라 꽃창포 정원으로 유명하여 종종 일본인 친구들이 나를 이곳으로 안내하곤 한다. 육중한 도리이를 지나 20여만 평에 이르는 경내에는 명치왕 사후에 전국에서 보내온 10만 그루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 마치 원시림에 들어선 기분이다. 일본의 신궁(神宮)은 신사(神社)나 대사(大社) 보다는 급이 높은 곳이지만 신사이든 신궁이든 한국의 사당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들 시설은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는 시설이라는 점에서는 한국의 사당과 같은 역할이지만 다른 점은 문중 단위가 아니라 전 국민이 참배한다는 점에서 좀 독특하다. 또한 메이지신궁 같은 곳과 달리 후시미이나리대사 같은 곳은 농업번창의 신을 모시는 등 반드시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