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선생님은 어디 사세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은평 뉴타운 4단지라고 하면서 꼭 폭포동이란 이름을 빼지 않고 말해준다. 요즘 도로이름 주소로 치면 나올 수 없는, 그렇다고 예전 지번 주소로 쳐봐도 나오지 않는데 버스정류장 이름이 폭포동이다. 속칭이다.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도 ‘아니 무슨 동네 이름이 폭포동이 있나?’, ‘폭포가 동네 한가운데에 있나?’, ‘은평경찰서 앞 다리를 건너다보면 오른쪽에 인공 암벽이 보이던데 그걸 보고 폭포동이라고 하나?’ ... 등등 나 자신 궁금했다. 그런데 폭포동이라고 할 때의 '동'이란 말은 한자로 쓰면 洞인데 그 글자는 요즈음에는 행정구역의 기초단위로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그것 이전에 '골짜기'라는 뜻이 들어있다. 최근에 종로구 옥인동의 인왕산 자락의 골짜기를 수성동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한자로 쓰면 水聲洞(수성동)이라고 되어 있다. 예전에 이 일대에 비가 좀 오면 그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가 엄청 크고 멋이 있어 사람들이 '큰 물소리가 들리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그렇게 썼고 겸재 정선이 이 골짜기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 있어 최근에 그 그림에 나오는 돌다리를 중심으로 계곡을 다시 복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무더운 여름 날씨가 정점을 치닫고 있다. 말복을 지났으니 이제 더위도 수그러들 것이지만 책상 앞에 앉아있으려면 여전히 덥다. 선풍기를 틀고 있지만, 머리 쪽으로 열이 몰린다. 어쩔 수 없이 꺼내든 부채, 여름 내내 자주 활활 부치던 선면(扇面)에는 네 글자가 써있다. ‘隱惡揚善(은악양선)’이다. 지난해 여름에 안동 도산면에 사시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 갖고 다니시던 것을 내가 빼앗은 것인데,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김병일 이사장이 이근필 퇴계 종손과 함께 퇴계의 친필 중에서 이 글씨를 뽑아 부채로 만들었고 그 가운데 하나를 기념으로 받은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악행은 덮어주고 다른 사람의 선행은 드러낸다”라는 뜻의 이 말은 유교의 경전인 《중용(中庸)》 6장에 나온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순(舜) 임금은 크게 지혜로운 분이실 것이다. 순 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시되, 악(惡)을 숨겨주고 선(善)을 드러내시며, 두 끝을 잡고 헤아려 그 중(中)을 취한 뒤에 백성에게 쓰셨으니, 이 때문에 순 임금이 되신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인으로 평가받는 순(舜) 임금이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 중종 때 우부승지로 있던 송재(松齋) 이우(李堣)는 1512년 늙으신 모친 봉양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동 도산에 와 있으면서 일찍 부친을 여읜 열두 살의 조카 황(滉, 퇴계)에게 《논어(論語)》를 가르치는 한편 그 이듬해인 1513년 봄에는 황의 여섯 살 위 형인 해(瀣, 온계)를 자신의 두 사위와 함께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를 하도록 했다. 이때 이우는 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열한 수의 시를 지어주었는데 첫 시는 이렇다. 讀書人道若遊山 사람들은 말하지, 독서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아서 深淺優游信往還 깊고 얕은 곳을 여유 있게 마음대로 오간다고. 況是淸凉幽絶處 하물며 청량산 그윽하고 빼어난 그곳은 我曾螢雪十年間 내 일찍이 10년간 형설의 공을 이룬 곳임에랴? ... 이우, '청량산으로 독서하러 가는 조씨 오씨 두 사위와 조카 해를 보내며' 여기에서 독서가 곧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는 유명한 화두(話頭)가 하나 생겼다. 퇴계는 숙부, 중형을 따라 청량산에 들어가 길게 공부를 했거니와, 자신에게 공부를 가르치신 숙부의 은공을 생각하며 뒤에 독서하는 것이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는 숙부의 화두를 산을 유람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철은 피서철이라고 해서 사람들은 시원한 계곡이나 바다를 찾아 몸을 식힌다. 그런데 이런 때에 인간의 참된 삶은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종교적인 구도를 찾는 사람들도 절이나 교회의 휴양공간 등을 찾는다. 거기서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거기서 자신의 삶을 재설정하곤 한다. 불교도 기독교도 천주교 가톨릭도 이 점은 공통인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이 믿고 따라는 가르침은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1994년 9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존 메인 세미나에 주인공으로 초청됐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존 메인 신부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국제적으로 열리는 이 세미나를 준비한 신부들은 자신들이 가려 뽑은 성경 사복음서의 대표적인 구절들을 미리 달라이라마에게 건네주고 그것에 대해 강의해줄 것을 제의했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이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 달라이 라마는 북런던에 있는 미들섹스 대학의 강의실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강의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종교를 믿으면서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자신이 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계절의 변화를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전령사는 꽃이라 하겠다. 3월에 매화가 피고 4월에 벚꽃, 개나리가 만발하다가 5월에는 장미가 피기 시작해 6월에 온통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는데 7월에는 우리나라가 연꽃 천지로 변한 것 같다. 예전 함창 공갈못가에 많이 피어 민요도 많이 만들어졌다지만 요즘엔 서울 근교 양평의 세미원을 비롯해 멀리 무안 백련지의 연꽃단지도 그렇고 지자체들의 노력으로 전국에 연꽃이 피는 곳이 엄청 많아졌다. 좀 부지런을 떨어 아침 일찍 연밭에 나가서 막 피어나는 연꽃 봉우리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아름답고 고결한 꽃이 나올 수 있는지 새삼 감탄하게 된다.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애련설’(愛蓮說)이란 글에서 “국화는 꽃 중의 숨은 선비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함인데, 연꽃이야말로 꽃 중의 군자로다”라고 칭찬한 이후 우리나라 선비들은 더욱 연꽃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아니하니 줄기의 속은 통하고 겉은 곧아서 덩굴이나 가지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맑고 우뚝하게 서 있는 모습” ... 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한국의 노인은 지금도 변소에 갈 때 조용히 허리를 일으키며 <총독부에 다녀온다> 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조선총독부에서 호출장이 오면 가지 않고는 못 배겼던 시대 어쩔 수 없는 사정 그것을 배설에 빗댄 해학과 신랄함 서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시골에서 상경한 듯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한복을 입고 까만 모자를 쓰고 소년이 그대로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순수함 그 자체의 인상이었다 일본인 여러 명이 선 채로 일본어를 조금 지껄였을 때 노인의 얼굴에 두려움과 혐오의 표정 획 달려가는 것을 봤다. 천만 마디의 말을 쓰는 것보다 강렬하게 일본이 해온 짓을 거기에서 봤다. 이 시의 제목은 <총독부에 다녀온다>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아마도 일제시대 한국 민족이 당한 아픔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낀 모양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인가? 뜻밖에도 일본인 여성이었다. 2006년 2월 21일 일본 최대의 일간지인 요미우리는 1면 맨 밑에 있는 칼럼난인 <편집수첩(編集手帳)>에서 “시대에 뒤떨어져”라는 제목의 시 하나를 인용하면서 이례적으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애도한다. 자동차도 없고 워드프로세서도 없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조 2대 정종 2년인 1400년 3월 15일, 임금은 권근(權近)을 정당 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大司憲)으로 발령을 내었다. 나흘 후인 3월 19일 대사헌 권근(權近·1352∼1409)은 경연(經筵)에서 임금에게 “신이 본래 혼미하고 우직하며, 젊었을 때 일을 경험하지 못하여 관리들의 이치(吏治)에 서투릅니다. 전하께서 신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하게 사번부(憲司)의 장이 되게 하시니, 진실로 황공하고 진실로 기쁘나, 중외에 웃음을 남길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도 한 가지 얻는 것이 있으니, 어찌 올릴 사항(事項)이 없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 관대히 굽어 실피셔서, 혹시 올리는 말이 이치에 해롭지 않거든 특별히 유윤(兪允)을 내려 주소서.”라고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보름 후인 4월 5일에 봄 가뭄이 심해지자 임슴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봄이 가무니, 벼나 곡식들이 풍성하지 못할 징조인가 두렵습니다. 신이 언관(言官)으로서 감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근심하고 두렵게 생각하여, 다시 금주령을 내려 나라의 비용을 절약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금주령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모든 식물은 다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데, ‘이름 없는 풀’이라고 한다면 그 풀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그래 나에게도 이름이 없고 "어이 거기 이름 없는 사람?"하고 부르면 "왜 멀쩡한 남의 이름을 놔두고 그렇게 부르는거야?"라며 짜증이 날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그 많은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들 이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얼마나 불러 주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든 것은 십 년도 더 전인 2009년, 부산에 있을 때 일간신문에서 이런 글을 본 이후였다. "와! 신갈나무, 너 참 튼튼하게 생겼구나, 얼레지 오랜만에 만나네. 기린초가 있는 것을 보니 붉은점모시나비도 찾아오려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숲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을 비로소 하나하나 구분하여 알아본다는 의미이며, 식물과의 인연의 시작을 말한다. 시인의 말처럼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듯이 우리가 이 나무들을, 풀들을 불러 주었을 때 그들은 의미가 되고 의도가 되며, 행복과 지혜를 건네기도 하는 그 무엇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까지 몰랐던, 눈부시게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을 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며칠 전 하지가 지났다. 벌써 지난 것이다. 새해를 맞아 우리들의 마음에 희망을 채우면서 이제는 코로나 사태가 풀리겠지 하다가 안 되어 백신만 기다리며 매일매일을 보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하지가 지나고 한해의 절반도 지나간 것이구나.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버트란드 러셀이 묘비명에 새긴 것으로 전해졌는데, 원뜻은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원뜻과 상관없이 이 말 그대로 어여부영하다가 어느새 하지(夏至)를 그냥 보내버린 셈이다. 하지를 지난 만큼 이제 낮이 줄어들고 밤이 길어지고 있는데, 요즘엔 그냥 하루가 지난 것이지만 옛날에는 이런 하지나 동지에 대해 꽤나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천문을 살피고 기상 변화를 기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치세(治世)의 기본이지만, 기상 변화를 미리 예측하기 어려웠던 고대에 나라에서 정월에 관대(觀臺)에 올라 하늘을 보고 음양의 기운, 사시사철의 흐름을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24절기 중에 어떤 때는 분(分)이고 어떤 때는 지(至)인가? 이런 천지와 음양의 변화를 옛사람들은 ‘분지계폐(分至啓閉)’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고 한다. 춘분과 추분은 봄과 가을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국의 5세기 초, 이른바 남북조 시대에 대륙 남쪽에는 송(宋)나라가 있었다. 당(唐) 이후 들어선 송(宋)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유송(劉宋)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에 단도제(檀道濟, ?~436년)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흔히 “도망가는 것이 제일 좋은 책략이다”라는 36계의 저자로도 알려진 이 장군은 군을 잘 통솔하며 국정도 잘 이끌어 북쪽에 있는 위(魏)나라도 어쩌지 못했는데, 혼자 너무 잘나간다고 시기한 송나라의 권신과 왕족들이 왕명이라고 속여 궁으로 부르자, 그 부인이 이상한 일이라며 들어가지 말라고 했지만, 단도제는 왕명을 듣지 않을 수 없다고 들어갔다가 살해되었다. 장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건을 내동댕이치며 “어찌 너희들이 만리장성을 스스로 허문단 말이냐(壞汝萬里長城)!”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쪽의 위나라 사람들은 “이제 두려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며 수시로 강을 건너 남쪽을 침범하였다. 1623년 3월 12일(음력) 김류, 김자점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옹립해 집권한 것이 인조반정인데, 서울에서 왕을 바꾸는 데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