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과장(科場)은 모두 다섯인데 가방끈 짧은 축들은 과장과 과장 사이 건너뛰기가 쉽지 않아 이 과장 따로 저 과장 따로 따로국밥을 차린듯하여 내 식대로 그냥 얘기 하나 옷깃에 실밥 풀 듯 풀어내어 엮었으니 원래 것과 다르다고 지나치게 서운케들 생각은 말아주소 광대놀음 하다 보니 양반이 동네북이라 매양 뚜르르 울리고 남에 것 가로채고 가슴에 나라 ‘국(國)’자 붙이고도 백성은 뒷전이고 하는 짓은 제 잇속이나 챙기는 얌체 중의 얌체니 동네북은 당연지사 허나, 이 마당에선 죽일 놈의 양반은 양반대로 할 말 있고 큰애미 작은애미 시앗싸움 한창이라 귀 열고 들어보면 큰애미는 큰애미대로 작은애미는 작은애미대로 제 할 말이 있겠거니 딴 데 가선 못 할 말 이 마당에선 다 하라고 멍석 한 번 펴보았소 문둥이 문둥북춤을 추는데 아침부터 웬 문둥춤이냐고 돌팔매 날아오고 나물 삶은 뜨거운 물에 입도 데고 뭣도 데어, 서럽고 서럽것소! 강산 두루미로 한반도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녀보니 산도 조져놓고 강도 조져놓아 천형 문둥이 욕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던 것을 그래서 문둥이는 문둥이대로 비비란 놈은 비비대로 제 할 말 조잘조잘 탈바가지 덮어쓰고 노래하니 이보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피가 탁한 것에는 다양한 정의가 있고 또한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어혈(瘀血)이 있고. 간에서 연유되는 것과 비장에서 연유되는 것이 있다. 이를 해결하려는 한의학적 처방과 민간요법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어혈(瘀血)을 풀어주는 방법 피가 탁해지는 것을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멍자국이다. 이는 내부의 모세혈관이 손상되면서 출혈이 일어나 혈액이 본래의 경로인 혈관을 이탈하면서 기능을 상실한 죽은피를 의미한다. 이렇게 피가 탁해진 것을 한의학에서 ‘어혈(瘀血)’이라고 한다. 어혈(瘀血)이란 일반적으로 죽은 피를 뜻하는데 한의학적 의미로는 정상적으로 운행(運行)되지 않은 모든 혈액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러한 어혈(瘀血)을 판별할 때 겉으로 보이는 타박 증상 이외에 꼭꼭 찌르는 듯한 자통(刺痛)과 저린 증상을 의미하는 ‘마목증(痲木症)’을 들 수 있다. 어혈을 풀어주는 한의학의 대표적인 처방은 당귀수산(當歸鬚散)과 사물탕(四物湯)을 기반으로 한 적절한 가감방이다. 우리가 보통 보약이라 할 때 인삼(人蔘)과 녹용(鹿茸)을 떠올리듯 혈(血)을 다스리는 기본 약으로 당귀(當歸)가 있다. 당귀(當歸)의 약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짜> 2021년 9월 2일 목요일 <답사 참가자> 이상훈, 박인기, 우명길, 원영환, 최돈형, 홍종배 등 모두 6명 <답사기 작성일> 2021년 9월 10일 금요일 평창강 제10구간은 한반도면사무소에서부터 한반도뗏목마을을 거쳐 한반도지형 전망대에 이르는 6.8km 거리이다. 지난 7월과 8월은 더위를 핑계 대고 답사를 쉬었다. 답사 참여자들이 다리가 튼튼하기는 하지만 모두 나이가 70을 넘었기 때문에 젊은 시절과는 다르다. 한여름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길을 걷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이 되어 찬반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가 찬성하여 두 달을 쉬었다. 이제 많이 친해진 얼굴들을 두 달 만에 다시 보니 반가웠다. 영월은 삼한시대에 진한(辰韓) 땅이었다. 한강을 점령한 백제의 세력이 커지면서 백제에 속하였는데 100가구가 겨우 넘는 작은 지역이라는 뜻으로 백월(百越)이라 불렀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죽령 이남까지 영토가 확장되면서 백월이 내생군(奈生郡)으로 바뀌었다. 통일신라 시대의 행정 구역 개편 때 내성군(奈城郡)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는 칠십이 넘으신 나이에 운전면허를 따셨다. 사람들이 그 나이가 되면 하던 운전도 내려놓으셔야 할 나이셨지만, 당신은 그 나이에 운전학원을 다니시면서 2종 보통 면허증을 따신 것이다. 한국전쟁당시 보급계 부사관을 하셨던 아버지는 GMC 트럭을 몰고 다니셨단다. 우리 아버지는 이를 ‘제무시 도라꾸’ 라 부르셨다. 전쟁 전 따로 운전을 배우신 적은 없었지만 전쟁 당시 전방 부대에 보급품을 운반하시다가 아마 다른 운전병에게 배우셨나 보다. “면허 따위 없어도 내가 강원도 그 험한 산길로 얼마나 다녔는지 모른다.”라고 늘 주장 하셨는데, 결국에는 칠순이 넘어서야 운전면허증을 따셨다. 운전면허도 없던 젊은 시절에도 아버지는 운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가끔 아버지와 택시를 타고 갈 때나, 버스를 타고 갈 때, 간간이 운전사가 왜 운전을 저따위로 하느냐며 자주 불평을 해 대셨다. 나는 그렇게 투덜대는 아버지가 민망하게도 해서, “운전면허증도 없는 분이 왜 그리 다른 사람을 타박하십니까?”라며 핀잔을 드려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운전면허를 따신 아버지는 작은 자동차 하나를 사서 당신이 다니시던 곳, 전쟁 당시 전투하시던 곳에 가보고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양반은 잘나서 오방색 도포에다 팔자걸음 합죽선 손에 쥐고 권세 으쓱, 이리 오라 저리 가라 어르고 달래다가 휭하니 저들끼리 지져먹고 볶아먹고 개평 한 줌 아니 주고 심산유곡 땡중은 내려와서 그나마 저자 울린 객주 처자 제 것인 양 요모조모 뜯어보고 보료에 앉았다가 금침에 누었다가 온갖 호사 다 누리니 이놈 말뚝이가 스스로 마당 펴고, 스스로 노래하며 징치하고 등 두드릴 지경에 이르고 말았소 욕하고 싶은 이는 맘껏 욕들 해도 좋소 어차피 삼현육각(三絃六角) 앞세우고 어사화(御史花)도 못 썼으니 허랑한 광대들 불러 모아 매구 치고 쉬다 울다 엎어지며 놀다나 가고 싶소 고성오광대 구경을 한 십년 다녀본께 놀이치고는 참 재미지고 춤사위가 독특하니 그 감칠맛이 진국입디다 이 놀이는 말보다 몸짓이 우선이라 이 춤에서 저 춤으로 건너뛰다 아차! 놓친 사연들도 있음 직하여 당신들은 탈춤으로 놀고 나는 입심으로 놀아볼까 하고 노래를 시작했던 게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 황희와 더불어 황금시대를 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맹사성(孟思誠)이다.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부터 세종 20년(1438)까지의 문신으로 태종과 세종 시대 사이 6조를 두루 걸치며 참판과 판서를 지냈고 세종 9년(1427)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좌의정이던 황희와 한 팀을 이루었고 이후 세종 13년(1431) 황희가 영의정이 되자 좌의정에 올라 조정을 관장했다. 76살이 되던 세종 17년(1435)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세종은 주요 정사에 대하여서 자문했다. 온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고려의 맹희도(孟希道)이며 고려 말기 최영(崔瑩) 장군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우왕 12년(1386)에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동부대언(同副代言)ㆍ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그는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했으나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연대기를 음악 중심으로 살펴보자.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한의사는 일반적으로 진맥해서 병증을 파악한다. 지금은 양방의 소견도 참고하지만 본래 한의학의 변증(辨證) 방법은 ‘망문문절(望聞問切)’이다. 곧 보고, 듣고, 묻고, 만져서 이루어내며 그 가운데 진맥은 만지는 것 중의 하나다. 실제로 이러한 여러 가지를 참고하고 종합해서 판별하는데 이러한 변증의 시작은 망(望), 곧 보는 것부터다. 보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형상(形相)’이라 하고 이를 깊이 파고들어서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형상학(形相學’), ‘골상학(骨相學)’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의사들이 안색을 살펴 기운의 허실과 청탁을 살피는데, 경륜을 가진 연로한 한의사들이 흔히 말하는 ‘혈색이 좋아졌다’, “안색이 밝아졌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곧 얼굴을 보고 대강의 건강을 유추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혈색(血色)이라 표현하는 혈(血)이 진짜 피의 색인 것이다. 혈액의 색깔이 피부에 투영되어 고스란히 외부에 노출되고 특히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므로 얼굴의 혈색으로 건강상태를 파악하되 실질적으로는 얼굴의 색을 살펴서 혈액의 건강상태를 유추하는 것이다. 혈색을 좌우하는 다양한 요소가 있는데 이를 크게 분류하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한강의 발원지가 바뀌자 우통수가 있는 평창군은 섭섭했다. 특히 월정사 측에서 실망이 컸다. 그래서 평창군과 월정사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2015년에 월정사성보박물관 옆에 ‘한강시원지체험관’을 만들었다. 얼마 전에 내가 체험관에 들어가 보았는데, 우통수 모형관을 만들어 놓았다. 한강의 근원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인 《세종실록지리지》에 “오대산 수정암 옆에 물이 솟아 나오는 샘이 있는데, 색과 맛이 보통과 다르고 그 무게 또한 그러하여 우통수라 한다. 우통수는 금강연이 되고 한수(漢水)의 근원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수는 한강의 옛 이름이다. 한강의 발원지 지위를 검룡소에 넘겨주고, 이제 우통수는 한강의 ‘역사적 시원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대학 동창생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동창생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1974년 군에서 제대한 뒤에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를 했다. 그때 동창인 ㄱ 교수를 나의 사촌 여동생에게 중매한 적이 있다. 중매는 실패하였고, 간호사였던 여동생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서 잘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ㄱ 교수가 왜 여동생이 싫다고 했는지 물어보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이 몸은 말뚝이올시다 천하고 못난 탈놀음의 어릿광대 팔자는 오그라들고 청승은 늘어난다고 뛰어봐야 벼룩인 말뚝이올시다 주인공은 애시당초 언감생심이라 이 마당에서 저 마당으로 한고비 넘길 때나 스리슬쩍 등장하여 익살맞은 몸짓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엑스트라급 조연이오 하지만 말뚝이 없는 탈마당은 재미는 고사하고 막힌 가슴 뻥 뚫어 줄 그 무엇도 없는 맹탕이 되고 마니 그 또한 소용됨이 꽤나 쏠쏠한 놈이라는 항간의 추임새도 있긴 있나 보옵디다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누가 제주도를 이야기하면 성산포의 채바다 시인을 생각한다. 1996년에 <하멜기념사업회>를 만들어 25년째 활동 중이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멜이 표착한 터에는 <난파 희생자 위령탑>을 세우고 해마다 여러 행사를 해 오고 있다 96년, 97년, 2001년에는 제주에서 뗏목 배를 타고 목숨을 건 항해로 대한해협을 3번이나 건넌 바다의 사나이 해양탐험가다. 채길웅 이란 자신의 이름을 채바다로 바꾸고 제주-강진, 고대 뱃길, 왕인 박사 뱃길, 삼별초 뱃길로 탐험을 이어갔다. 1653년 하멜 일행 64명을 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이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풍랑으로 제주에 표착했을 때 하멜은 그때 나이가 23살이었으며 선원 중에는 15살 전후의 10대도 있었다. 그래서 채바다 시인은 젊은이들의 도전을 기대하며 해양대국을 꿈꾸도록 독려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주고, 해양의 역사를 알리고, 왜곡된 일본 역사문화를 일깨워준 공로로 대통령 표창과 해양수산부 장관상인 <장보고상>도 받았다 값어치 있는 일에 흥미를 갖고 일을 한다면 늙음을 치료하는 최고의 처방이라 믿는다는 78살 채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