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한자 서예는 ‘전예해행초(篆隷楷行草)’ 곧 전서(篆書)ㆍ예서(隷書)ㆍ해서(楷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로 분류합니다. 글자의 발전과 흘려 쓰는 정도에 따른 분류법이지요.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저는 ‘예서(隸書)’를 가장 좋아합니다. 제가 예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풍스런 맛과 획의 수려함, 가로획이 주는 웅혼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서체는 노예들이 발전시킨 서체입니다. ‘隷’자가 노예 ‘예자’거든요. 사회 초년병 시절에 아이들에게 한자 빽빽이를 시킨 적이 있습니다. 물론 효과가 적지는 않았지만, 억지 반복 속에서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없어 중간에서 그만둔 것이 생각납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 책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필사가 가장 일반적이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내용을 베껴 적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 귀찮은 일을 노예에게 시켜서 하게 합니다. 그것이 예서체가 발달하게 된 배경입니다. 고문은 수많은 판본이 존재합니다. 그 까닭은 필사하면서 잘못 베낀 이유도 있고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 이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책을 단지 머릿속에 기억돼있는 지식을 중심으로 다시 기록했기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제주도에 갔을 때 마상 무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몽골 출신의 출연자들은 말 위에서 서고 매달리고 심지어 물구나무서기도 하는 등 고난도의 마상 무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말과 하나 되어 자유자재로 공연을 펼치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훌륭한 승마자는 말이 아무리 날뛰어도 말에서 떨어지거나 위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승마자의 몸이 말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바닷가에서 파도타기 하는 써핑족을 봅니다. 파도를 잘 타는 사람은 파도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파도에 몸을 맡기고 그 힘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람입니다.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큰물이 나서 소와 말이 떠내려갈 때 소는 살아남지만, 말은 익사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네발 달린 짐승들은 수영을 배우지 않아도 생득적으로 헤엄을 칠 줄 압니다. 고여 있는 물이라면 소나 말 모두 헤엄쳐 난관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큰물에 빠졌다면 문제가 달라지지요. 말은 근육질로 이루어진 만큼 헤엄은 소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런데 왜 빠른 말은 익사하고 느린 소는 살아나올까요? 말은 물살을 이겨내려 애씁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원소는 조조와 대전을 벌이기 전에 진림에게 명하여 조조의 죄상을 성토하는 격문을 쓰도록 명합니다. 【조조의 할아버지 중상시 등은 좌관과 서황과 더불어 요사스러운 짓거리를 하고 탐욕스럽게 수탈을 일삼는 횡포를 부렸다. 그 아버지 승은 균지를 구걸하여 양자가 되었고,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샀는데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치고 요직을 꿰차고 중요한 인물들을 쫓아냈다. 조조는 환관에게 양자로 들어간 더러운 씨알로 본래 덕을 쌓지 않았고 경박하고 교활하여 무기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난리를 좋아하고 재난을 즐겼다.】 작성된 격문은 곧바로 허도의 조조에게 전해집니다. 격문을 접한 조조는 갑자기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지며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지요. “누가 이 격문을 작성했느냐?” “진림이란 자가 지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웃으며 말합니다. "격문 속의 일들은 반드시 무략이 있어야 이룰 수 있다. 진림의 글은 비록 아름답지만 원소의 무략이 모자라니 어쩌겠느냐?" 훗날 조조가 기주를 공격하여 진림을 포로로 잡은 뒤 물었습니다. “경이 이전에 지은 글을 보면 죄상은 나 혼자만의 것이고, 악인에 대한 통박도 내 몸에서 그칠 일이거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 년이라고 합니다. 지구상에 현생 인류가 처음 출현한 것이 약 300만 년 전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진정한 의미인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이 4만 년 전이랍니다. 그것을 계산하면 지구 나이의 0.00086%만큼만 인류가 살아왔다는 이야기지요. 그 4만 년의 기간에도 문자가 없었던 시기를 선사시대라고 하고 문자가 발명되어 기록으로 남긴 때부터를 역사시대라고 하는데 대략 BC 5000년을 기준으로 합니다. 선사시대는 문자가 없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을 갖고 생활상을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뗀석기니 간석기니 청동기니 철기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지요. 문제는 남아있는 것들이 썩거나 없어지지 않는 물질들인 것이고 그 외 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것은 속단이나 예단할 수 없어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인도나 야생으로 돌아간다면... 오랜 시간 걸리는 돌을 다듬거나 흙을 빚어 그릇으로 사용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취하기 쉬운 나뭇잎으로 그릇을 만들어 쓰거나... 무른 목질의 재료를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어 쓰겠지요. 문제는 그 일상의 재료들이 오랜 세월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때문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모든 식물은 뿌리를 내릴 땅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옥토이든, 바위 틈새이던, 화분이던 간에 말이지요. 가끔 집안에 놓인 화분을 보며.. 좀 더 너른 공간에 좀 더 많은 햇볕과 자연을 접하지 못하고 성장을 제한당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개인의 정서적 안정감과 행복을 위하여 식물을 홀대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대하지만 식물의 본성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으니까요. 특히 석부작(石附作)이니 목부작(木附作)이니 하는 아주 식물에게 필요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하면서 그 살아있음의 아슬아슬함을 즐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분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술원에 가서 팔뚝만 한 굵기로 자라 최소화한 크기(미니멀사이즈)의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간 속에서 조금씩 이뤄놓은 성취물이 감탄으로 다가오긴 하지만 분재를 사거나 기를 생각은 없습니다. 그만한 돈도 없을뿐더러…. 기르다가 십중팔구는 고사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시 인간의 눈요기를 위하여 삶을 재단 당하고 이리 꼬이고 저리 비틀리며 팔다리를 잘리고 성장을 방해받고 인고의 세월을 견뎌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열대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어른 키 두 배 높이의 커피나무를 쉬 볼 수 있습니다. 비교적 가난한 나라인 라오스를 여행할 때도 집집마다 커피콩을 따서 말리는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에서 가을 고추 말리듯 흔한 장면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라오스에는 시눅커피가 유명했지요. 지금은 강릉이 커피거리를 만들고 커피 박물관을 운영하며 커피의 선두주자로 군림하고 있지만 사실 춘천이 커피의 역사는 더 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공지천이 있지요. 공지천에는 에티오피아 참전탑이 있습니다. 6.25 당시 에티오피아 강뉴부대가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참전을 기리기 위한 탑을 세웁니다. 1968년 제막식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가 직접 참석하였고 그 자리에서 에티오피아 원산커피를 지속해서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지요. 그 약속은 쿠데타로 실각하기 전까지 지켜집니다. 서울에서 에티오피아 원산커피를 맛보기 위하여 공지천을 찾았으니 공지천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된 이유이지요. 지금도 에티오피아 원산커피를 마시려면 에티오피아 집을 방문하면 됩니다. 2층 자판기의 500원짜리 커피가 에티오피아 원산이거든요. 우리나라는 커피가 생산되지 않지만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요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 가운데는 ‘뜨거워지는 지구’도 있습니다. 아직 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동토의 왕국인 시베리아가 영상 40도의 가마솥더위를 보이는 것은 쉬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베리아에서 무려 2만 1,000톤에 달하는 경유가 유출되었는데 뜨거워진 지구 덕에 영구 동토층이 녹아 지반이 내려앉은 것이 그 원인입니다. 영화는 미래사회를 투영합니다. 과거 영화의 내용이 지금 현실이 된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제작자의 상상과 과학적 검증이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테스피크'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인간의 무력함과 재연재해를 극복해 가는 주인공들의 사투를 그린 영화로서 개발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자연의 힘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인간의 군상을 그려냈고 '샌 안드레아스'는 진도 9 규모의 강진으로 파괴되어가는 도시에서 아내와 딸을 구하기 위한 주인공의 피눈물 나는 역경을 그렸습니다. '2012'는 고대 마야시대부터 예언된 인류의 멸망이라는 소재로 지진, 화산, 해일 등 재난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이지요.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인류의 모습과 그 와중에 가족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요즘 아이들에게 놀이 문화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슬기전화(스마트폰)와 컴퓨터 게임으로 통칭되는 아이들 소비활동을 놀이문화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유년 시절에는 마당, 옥상, 골목길, 운동장, 얼음판과 같은 공간과 형제자매와 더불어 놀러 오갈 수 있는 친구들과 같은 인적자원과 비석치기나 자치기, 사방놀이, 고누, 실뜨기, 고무줄, 굴렁쇠, 그네..... 등등의 도구가 있었지요. 공간, 인적자원, 도구는 놀이 문화를 이루고 있는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생존을 위하여 고통을 참아가며 제약된 상황에 참여하는 활동이 '일'이라면 생존을 떠난 자발적 활동으로 즐거움과 흥겨움이 있는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 활동이 '놀이'이지요. 어쩌면 노래, 노리개, 노릇, 놀림, 노름 등도 그 어원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스콜레’로 ‘여가’라는 뜻입니다. 곧 '놀이 문화를 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학교라는 공간이었지요. 그런데 학교는 여가와는 반대로 '체계적인 지적 훈련을 받는 장소'라는 뜻을 갖게 되었으니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변변한 놀이도구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명산(名山)은 대부분 명찰(名刹)을 품고 있습니다. 또 대부분 절은 등성이에 짓지 아니하고 산의 품안에 푹 안겨 계곡 내부에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물을 얻기도 쉬울뿐더러 산불의 재앙에도 어느 정도 대비가 되기 때문이지요. 산사에 가면 처마 끝에 풍경이 매달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청아한 종소리를 내는 풍경은 공이가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지요. 어찌 보면 하늘이 파란색이니 하늘을 배경 삼아 물고기가 노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절에는 물고기 모양이 많습니다. 풍경도 그러하려니와 절에서 사물(四物)이라고 해서 소리로 중생을 깨우는 물건이 있는데 법고, 운판, 범종, 목어가 그러합니다. 이 목어(木魚)가 나무로 만든 물고기 형상의 악기이지요.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파내어 울림통을 만든 것이 목어입니다. 목어는 환생한 물고기로 자신의 몸을 두드려 속죄함으로써 다른 생명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수행적 의미가 있습니다. 산사(山寺)를 지나다 보면 은은한 독경소리와 청아한 목탁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목탁(木鐸)의 탁자는 방울을 의미하는 글자이지만 원래는 목어에서 변형되어 나온 것으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린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다른 의견이나 정서로 인하여 서로 충돌하여 대립할 때 갈등이란 표현을 씁니다. 갈등이라는 낱말은 덩굴식물의 칡(葛)과 등나무(藤)의 한자가 조합된 글자이지요. 칡은 주변에 아주 흔한 식물입니다. 자른 단면에서 액이 나오는데 갈색으로 한 번 물들면 빠지지 않습니다. 그 갈 자가 칡갈(葛) 자인 것이지요. 칡의 가루를 갈분(葛粉), 칡뿌리를 갈근(葛根)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 한자에 연유합니다. 칡은 왼쪽으로 덩굴을 감으며 성장하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덩굴을 감으며 자랍니다. 만약 이 둘이 만나 서로 얽히면 풀기 힘든 모양이 되고 나무의 성질이 질겨 자르기도 힘들고 뿌리도 잘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갈등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지요. 이방원이 하여가에서 만수산 드렁칡을 언급했는데 드렁칡이란 ‘언덕진 곳에 얽혀있는 칡덩굴’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덩굴식물은 지탱식물에 의지하여 자라게 되는데 자연의 공생과는 거리가 멉니다. 일단 터를 잡고 나면 허락 없이 이웃 나무를 칭칭 감고 자라는데 자라는 속도가 빨라서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가지요. 광합성을 위해 공간을 몽땅 점령해 버린 데다가 잎도 넓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