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지난 2월 20일부터 8일 동안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벡)에 한국 ‘문화미디어포럼’ 회원들과 우즈벡 국립저널리즘대 공동주관의 미디어 문화 세미나를 위해 타슈켄트와 유네스코 유적 도시인 사마르칸트를 다녀왔다. 느닷없이 세종과 우즈베키스탄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의문이 들 것이다. 먼저 요약하면 나의 발표는 세종이 옛 사람이 아니라 세종이 행한 과학적 변역(變易) 정신이 오늘날 4차산업 시대에도 통하는 정신임을 예증했다.(이에 대한 글은 후에 소개) 이 발표 이외에 얻은 소득으로는 우즈벡 역사에서 세종과 비슷한 시기에 세종처럼 우즈벡 역사의 획을 긋는 인물이 어문학 그리고 천문학에서 있었던 것을 확인한 일이었다. 어문학의 알리셔 나보이(Alisher Navoiy)와 천문의 미르조 울르그벡(Mirzo Ulugbek)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우즈벡은 현재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궁전 터에서는 고구려 사람이 조우관(깃털모자)을 쓴 벽화가 발견된 바도 있어 예부터 한반도와 거래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세종과 우즈벡의 역사적 인물을 비교 연구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업의 기초는 생업이다 업은 생업과 다른 말이 아니다. 이민족인 도도웅와에 대한 답서로 최종 목표는 그들도 생업에 종사하게 하려는 배려를 보이고 있다. 생업 즐기게 : (맹산 현감 박간 등을 불러) "수령은 〈임금의〉 근심하는 마음을 나누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임무가 지극히 중대하다. 그대들은 나의 회포(懷抱)에 부응(副應)하여 백성을 어루만지고 폐해를 없애는 데 힘쓰라.“ 그러자 박간이 ”명령을 받잡고 그 도를 직접 살펴보았더니, 넓게 빈 경작할 수 있는 땅은 비록 많으나, 살고 있는 백성이 드물고 적어서 모두 새와 짐승들의 터전이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백성들이 어려움이 많아서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안하게 살며 생업(生業)을 즐기게 된다면 어찌 빈 땅이 있겠느냐. 그대가 가서 백성에게 갈고 심기를 권장하여 풍성하고 부유함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7년 12월 7일) 박간이 진헌마(進獻馬, 중국의 황제에게 바치던 말)를 점검하니 경작할 수 있는 땅은 많으나, 사는 백성이 드물다고 하자, 임금이 한 말이다. 농사짓게 환경을 만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직의 안정은 생생지락으로 가는 길 직을 갖고 업정신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생생지락(生生之樂)이다. 세종 중기 이래 북방에는 여진족이 때를 가리지 않고 쳐들어와 도둑질을 일삼았다. 이러한 여진은 후에 정묘(인조 5년, 1627), 병자호란(1636)으로 큰 침공을 하게 된다. 그나마 세종이 이 때 변경을 정비해 둔 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어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국경지대에는 주민들의 동요가 컸는데 그 원인은 국경 안쪽에 사는 사람들은 국경지대 가까이 가서 살게 하는데 있었다. 세종 25년 10월 24일의 기사를 참고해 보자. 함길도 도관찰사 정갑손에게 도의 인민을 5진에 입거(入居, 들어가서 머물러 삶) 시키지 않겠다고 했음에도 백성들이 동요하게 두는 것을 세종이 책망한 일이 있었다. “지금 들으니, 도내의 인민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떠들어대기를, 입거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집에 남은 장정들이 떨어져 나가 살기 때문에, 사람은 적고 힘이 미약하여 농사짓기가 어렵고, 사는 집의 정원과 울타리도 가꾸고 고치지도 않아서 살기가 날로 어려워진다고 하여 참으로 놀랬다. 어느 사람에게서 이런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생각하는 정치를 펴는 세종은 백성의 소리를 듣고, 묻고, 생각한다. 그리고 안위에 관계되지 않은 일이라면 독단을 내릴 때도 있다. 이런 과정이 세종이 임금으로서 직에 임하는 자세이고 그 근간에 백성을 생각하는 정신이 업정신이다. 오늘 날 우리는 각기 직(職)을 가지고 일한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 자영업이고 농사직이다.(현재 우리나라 직업의 종류는 1만 4천여 개다. 2013년 기준) 직은 맡은 바 일이다. 그런데 일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한데 이것이 업정신이다. 업정신은 몸과 정신이 합쳐 이루어지는 의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통칭 직과 업을 합치어 직업이라고 부른다. 많은 청년과 50대가 직이 없다고 산에 오르거나 SNS를 하지 말고 동남아로 가라고 한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결국 하차하게 됐다. 이 이야기 속에는 모든 사람이 직을 찾고만 있을 뿐 업정신 이야기는 빠져 있다고 여겨진다. 내가 무슨 일을 왜 하고자하며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하는 생활에 대한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세종은 직과 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직과 업을 강조한 세종 실록의 기록에는 먼저 직의 종류 그리고 백성이 매일 먹고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이 독단을 내리는 때 세종의 정치는 사맛[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통해 나타난다. 많은 경우 신하들과의 토론을 나누지만 그 마지막은 임금의 결단이 따른다. 그 결단은 생각/사유의 결과이기도 하다. 세종 이도의 사유세계는 유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뿌리에는 불교가 있고 마음속에는 심학이 있다. 정신의 핵심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가에 집착하지 않은 포용성이다. 이는 임금이라는 직(職)에 충실한 실천적인 실용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직에 대한 태도는 유교적인 것만이 아닌 불교의 ‘업’ 개념이 섞여 있다. 그리고 도학, 심학 그리고 종교와 풍속의 영역에서 무가, 풍수도 이해하려 했다. 결코 한 사상에 매몰되지 않고 그 사상을 백성[나라]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가늠했다. 세종은 사맛 정신으로 정치를 수행하며 마지막은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대면하여 듣고 토론을 거치지만 확신이 가는 일은 권도로서 독단 처리하게 된다. 독단(獨斷) : 무릇 일이 의심나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지만은 의심이 없는 것은 독단으로 하는 것이다. (《세종실록》 30/7/18) 凡事之可疑者則謀於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스스로 결정하기 : 독단위지[獨斷爲之] 생각하는 사람의 마지막 실현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하고 생각하여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이는 신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임금인 세종이 결정하는 일은 개인의 일인가, 나라의 일인가. [화가위국] : 예조에서 고하기를, 전 왕조 말엽에 정치는 산란하고 민심은 이탈하여, ...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태조〉를 추대하시어 ‘집을 변하여 새 왕조를 이룩’[化家爲國]하셨습니다. (《세종실록》 즉위년 9월 11일) 惟我上王殿下應時決策, 倡義推戴, 化家爲國。(참고: 이한수, 《세종시대 家와 國家》, 한국학술정보[주], 2006) 임금이면서 개인일 수 있는 한 근거는 왕조국가가 한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바로 왕가는 아니다. 그러나 양녕 문제에서 ‘이것이 비록 일가의 일이라 하여도 또한 나라에 관계되는 것’이라 하였다. 나라가 한 가족의 연장선에 있다는 의식이 있다. 가사와 국사 : (상왕이 양녕의 산릉 제사 참여를 못하게 명하다) 이천(利川)과 거리가 멀지 않으니, 양녕으로 하여금 효령의 예(例)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생각하는 정치인 세종은 신하인 관리들과는 현실정치에서 다른 먼 앞을 보는 눈과 깊이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해 본다. 관리는 자기가 맡은 직(職)의 위치에서 자기 업무에 충실하면 된다. 나라의 큰 책임을 진 사람은 현재의 일만이 아닌 미래에 벌어질 결과를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소인배는 과거에 얽매이고 관리는 현재에 살고 지도자는 미래에 눈[視點]을 두고 살 것이다. 여기 한 예로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대비한 세종의 멀리 보는 눈을 살필 수 있다. 멀리보기[후일지효-後日之效]의 눈 세종은 임금으로 날마다의 일을 처리하는 것 외에도 나라의 미래를 보고 ‘천년사직’을 유지해 가야 한다. 나라의 경계를 지키는 일이 그 중 하나다. 김종서(1390~ 1453)와 조말생의 예가 있다. 후일지효(後日之效, 김종서에게 4진의 형세와 앞으로의 추세를 보고하게 하다): 오늘날 변방을 개방하는 것으로써 상책을 삼으면 의심이 없다. 뜻밖에 첫해의 큰 눈[雪]과 이듬해의 큰 역질(疫疾)로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고, 지난해의 적변(賊變, 도둑의 변)으로 지치고 죽은 사람이 또한 적지 않았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내 뜻으로는 오히려 대사를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생각하는 정치를 편 세종은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에서 백성은 개인적으로 종교를 가지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나라의 이념과 관계없이 개인이 갖는 정신적 세계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세종의 가족인 수양은 불교에 심취해 있으며 세종의 뜻을 받아 여러 불경을 펴내는 것을 도운 실마리를 다음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수양대군과 성임의 대화를 보자. (이하 실록내용 대화체로 구성) 수양대군 : 너는 공자의 도(道)와 석가가 누가 낫다고 이르느냐. 주서 성임(成任) : 공자의 도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읽어서 대강 그 뜻을 알거니와, 석씨(釋氏)에 이르러서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알지 못합니다.” 수양 : ‘석씨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은 하늘과 땅 같을 뿐만 아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비록 좌소용마(挫燒舂磨)* 하고자 할지라도 베푸는 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한 것이다.” (《세종실록》 30년 12월 5일) * 좌소용마(挫燒舂磨) : 몸을 꺾어 태우고 찧어서 가는 것. 세종, 불교 선언이 아니라 신하들의 인지를 기대 세종 또한 불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이 생각하는 임금이었다는 것은 열 번 이야기해도 지나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을 보는 동안에 ‘생각이 일깨워져서[因以起意]’ 여러 가지로 정사에 시행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세종 20/3/19)” 세종은 생각하는 임금이었다. 실록 속에서 ‘사고(思考)’에 속하는 비슷한 말무리로 ‘중념(重念)’, ‘상념(常念)’ 따위가 있다. 중념은 말 그대로 ‘무겁게 생각하다’이다. 어려운 주제이기에 무거운 것이다. 세종의 양위와 양녕대군에 대한 2건이 있다. 중념(重念) : 거듭 생각하옵건대(重念) 전하께옵서 신을 세워 후사를 삼으실 적에도 오히려 감히 마음대로 하시지 못하고 천자에게 아뢰어 결정하셨거든, 하물며 군국의 막중한 것을 마음대로 신에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세종 1권 총서) ‘상념(常念)’은 ‘늘 깊이 생각하다’ 이다. (‘상념’에 대한 원문은 모두 91 건이고 그 가운데 세종 7건이다. 참고로 ‘념(念)’은 깊은 생각이다) 상념(常念) : 지금 지운(志云)이 인덕전의 아들이라고 사칭하였으니 죄가 크다. 그러나 나는 ‘항상 생각하기’[然予常念,]를 사람의 죄가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더라도 만약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이번 호에서는 한 번 더 잠시 며칠 전의 세종 행사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금년은 특히 세종이 임금에 오른 지 600돌이어서 여러 행사들이 있었다. 한 해를 정리하는 뜻을 겸하여 ‘세종대왕즉위600주년모두모임’ 주최로 지난 12월 10일 세종 문화회관 세종홀에서는 관련 인사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우리의 과제’라는 강연과 감사장 수여식 그리고 작은 음악회가 있었다. 강연은 이어령교수가 우리말이 갖는 특성에 대한 주제였고 발표문은 따로 없어서 그날 들은 것을 기초로 가)요지를 살피고 나)훈민정음의 뜻을 통해 세종 즉위 600돌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가) 이어령 교수: 우리말은 단순히 소리를 옮겨 놓은 글이 아니다. 말과 글에서 말이 아들이라면 글은 사생아다. 훈민정음은 말을 표현하수 있게 창안된 것이지 단순히 글을 적은 기호가 아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 나라는 망했으나 산과 강은 그대로 있다. 이는 중국 당나라의 시성으로 불리는 두보(杜甫, 712~770)의 ‘춘망(春望)’ 첫 구절로 실정과 내란으로 어지러운 세태를 견주어 그렸다. 많은 경우 “나라는 깨뜨려졌어도(國破) 산하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석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