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萬波息笛)은 신라 때 만들어진 신비한 피리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낮이면 갈라져서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 되는 신비한 대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이 만파식적을 불면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에는 비가 그치며, 백성의 만병이 낫고, 높이 치는 파도가 가라앉으며, 신라를 향해 왔던 적병이 물러갔다고 하지요. 이 만파식적을 바로 대금의 원형으로 봅니다. 대금은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으로 나누는데 일반적으로 정악대금은 산조대금과 견주어 듣기 어렵고 연주하기도 어렵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 정악대금을 편하고 아름답게 연주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이삼 스님이 그분으로 스님은 교통사고로 오른쪽 팔이 마비된 분인데 외팔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 “여음적”을 손수 만들고, 연주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스님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지요. 이삼스님은 이번에 대금정악 전곡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내놓고 그 기념으로 연주회를 엽니다. 오는 10월 2일(토요일) 늦은 7시 30분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리는 연주회에는 거문고 김선한, 가야금 송인길, 장구 사재성, 피리 곽태규, 해금 윤문숙 등 이 시대 최고의 정악 연주
강원도(북한) 통천군 통천읍에는 총석정(叢石亭)이 있습니다. 총석정은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주위에 현무암으로 된 여러 개의 돌기둥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지요. 그래서 이를 그림으로 그린 화가가 많습니다. 특히 정선은 여러 점의 작품이 남아 있고, 김홍도, 이인문, 이재관, 허필, 김하종 등이 즐겨 그렸습니다. 똑같이 총석정을 보고 그린 그림이지만 가장 많이 그린 정선의 작품을 보면 일절 색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수묵만으로 물결치는 파도를 그렸으며 김홍도는 파도소리에 새소리까지 들릴 듯 섬세하고 정감있게 그렸지요. 그런가 하면 초상화를 잘 그린 이재관은 얌전하고 꼼꼼한 모습으로 총석정을 그립니다. 하지만 이인문(1745-1821) 은 김홍도만큼은 알려지지 않은 동시대 화가로 주눅 들지 않은 자신만의 색채를 표현해 수채화처럼 총석정을 그렸다는 평을 받습니다. 이처럼 유명한 화가이든 무명화가이든 나름대로 특징을 살려 그린 총석정은 그래서 더 흥미로운지 모릅니다. 그림에서도 정선이나 김홍도 같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만 있다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장미꽃이나 백합 같은 한두 종의 꽃만 피어있는 정원과 같겠지요. 다양한 개성과 자
“미역국을 단숨에 마셔 버리고 빈 그릇을 살강에 놓는데 사립 쪽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위 글은 한승원의 ≪해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전 한옥 부엌에는 “살강”이란 것이 있었지요. 살강은 부엌의 부뚜막이나 조리대 위의 벽 중턱에 가로로 기다랗게 드리운 선반을 말합니다. 살강은 보통 대나무로 발을 엮거나 긴 통나무를 두 개 엮어서 만드는데 밥그릇이나 반찬그릇을 올려놓고 쓰기에 편하게 한 것입니다. 살강은 대부분 1층의 구조로 되어 있지만, 더러 살강 위에 한 개의 선반을 더 얹어서 2층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는데, 위 칸에는 소반이나 허드렛상을 얹어 놓는 등 부엌을 더 넓게 쓰기 위한 수납공간이었던 것이지요. 어머니께서 누룽지를 긁으시면 언제나 살강 위에 놓아두셨습니다. 하지만, 종종 쥐란 놈이 먼저 실례를 하기도 해서 어머니께서는 누룽지를 담은 그릇을 더 큰 그릇으로 덮어두곤 하셨지요. “살강”, 이제 보기 어려운 것이지만 살강을 보게 되면 어머니께서 “얘야 살강 위에 누룽지 있다.”라고 하실 것만 같습니다.
오늘은 24절기 중 추분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입니다. 이날을 기준으로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며 가을도 그만큼 깊어가지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추분의 의미는 이것이 다일까요? 아닙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것은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균형의 세계를 뜻합니다. 지나침과 모자람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가운데에 덕(德)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중용의 뜻이 있지요. 그런가 하면 추분엔 향에 대한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추분의 들녘에 서면 벼가 익어가는데 그 냄새를 한자말로 향(香)이라고 합니다. 벼 화(禾) 자와 날 일(日) 자가 합해진 글자이지요. 한여름 뜨거운 해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벼는 그 안에 진한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도 내면에 치열한 내공을 쌓아갈 때 저 내면 깊이엔 향기가 진동하지 않을까요? 또 들판의 익어가는 수수와 조, 벼들은 강렬한 햇볕, 천둥과 폭우의 나날을 견뎌 저마다 겸손의 고개를 숙입니다. 내공을 쌓은 사람이 머리가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는 것과 벼가 수많은 비바람의 세월을 견뎌 머리가 수그러드는 것은 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이렇게 추분은 중용과 내면의 향기와 겸손을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운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는 추석, 가배절, 중추절, 가위, 가윗날로도 불립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 가운데서 ‘추석’이란 말을 가장 많이 쓰는 듯합니다. 과연 어떤 말이 가장 바람직할까요? 먼저 ‘중추절(仲秋節)’은 가을을 초추(初秋), 중추(仲秋), 종추(終秋) 3달로 나누어 음력 8월 가운데에 들었다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또 가장 흔하게 쓰는 ‘추석’은 옛 중국 유가(儒家)의 경전인 ‘예기(禮記)’에서 나온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과 중국에서 중추(中秋), 추중, 칠석, 월석 등의 말을 쓰는데 중추의 추(秋)와 월석의 석(夕)을 따서 "추석(秋夕)"이라 한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추절도 추석도 중국에서 유래한 것일뿐더러 그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신 '한가위'라는 말은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으로 토박이말입니다.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그 유래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추석’이나 ‘중추절’보다는 뜻이 분명한 아름다운 우리말로 넉넉한 '한
가로등도 없고, 플래시도 없고, 자동차의 불빛도 없던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어떻게 다녔을까요? “차려 온 저녁상으로 배를 불린 뒤에 조족등을 든 청지기를 앞세우고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위 예문은 김주영의 ≪객주≫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조족등”이라는 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밤길을 밝히는 도구였지요. 조족등(照足燈)은 밤거리에 다닐 때에 들고 다니던 등으로 댓가지로 비바람에 꺼지지 않게 둥근 틀을 만들고 그 안에 촛불을 켜는 등입니다. 특히 조족등은 순라꾼이 야경을 돌 때 주로 썼다고 합니다.조족등을 이름 그대로 풀어 보면 비출 조(照), 발 족(足), 등잔 등(燈) 자를 써서 발을 비추는 등이라는 뜻이 되지요. 아무리 먼 길이라도 발밑을 보아야만 갈 수 있으므로 “천리길도 한 걸음 부터”라는 속담과 뜻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조족등 없이 칠흑 같은 깜깜한 밤길을 가려면 돌부리에 채일 수도 있고, 물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으며, 움푹 파진 곳에 헛짚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초롱불 수준인 조족등이 밝아야 얼마나 밝았겠느냐만 어두울 땐 이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요즈음 점점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앞날에 한 줄기 빛도 없다고 하는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인정받습니다. 국보 제306호로 지정된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1206∼1289)이 75살이던 충렬왕 7년(1281)에 편찬한 역사서이지요. 그런데 그 삼국유사를 오늘날까지 지켜낸 이가 있습니다. 차를 즐겨 마시고, 언제나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던 고 이병직 선생은 내시화가로 유명한 분이었지요. 그 이병직은 '쌀 7,000석 꾼'으로 불린 갑부였는데 자유당의 농지개혁으로 땅을 잃은데다가, 교육사업에 거액을 투자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끝내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그 뒤 이병직은 세상을 뜨기 직전 양손자 곽영대에게 평생을 사모았던 ≪삼국유사≫, ≪제왕운기≫(보물 418호), 청동(靑銅)은입사향로(보물 288호) 등을 내놓으면서 "형편이 어렵거든 팔아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곽영대는 셋방살이를 전전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거액을 제시하며 팔라는 사람들의 유혹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손길이 닿고 겨레의 혼이 담긴 유물들을 단지 생활이 어렵다고 함부로 내다 팔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가난으로 고통이 조여오자 삼국유사를 껴안고 여러 번 울었다고 곽영대는
우리 속담에는 “원님 덕에 나발 분다.” 또는 “사또 덕에 나발 분다.”라는 것이 있지요. 원님은 자신이 필요하여 행차를 하지만 행차 때 부는 나발 덕에 우연히 이익을 얻을 때 곧 윗사람 덕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발”은 무엇일까요? “나발(喇叭)”은 놋쇠로 된 긴 대롱을 입으로 불어 소리 내는 관악기입니다. 원래 이름은 한자로 “喇叭”이어서 “나팔-喇(나)”, “나팔 叭(팔)”로 ”나팔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보통은 센소리를 피해 “나발”이라고 합니다. 나발은 지공(손가락으로 막는 구멍)이 없어 한 음을 길게 부는 악기인데 태평소, 나각, 자바라, 징, 북과 함께 대취타(조선시대 군악대)에 편성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풍물굿에도 쓰입니다. 여기서 한자로 “螺髮”이라고 쓰는 또 다른 나발이 있습니다. 이는 불상(佛像)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如來像, 진리의 세계에서 중생 구제를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부처)의 머리카락을 말하지요. 강원 동해시 삼화사에 있는 보물 제1292호 “철조노사나불좌상”의 머리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절은 당간지주(幢竿支柱)로부터 시작됩니다. 당간은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말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절에 큰 행사가 있으면 당간 위에 깃발을 달아 신도들이 절을 찾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세워진 절에는 당간지주가 없지요. 대신 오래된 절에 가면 으레 당간은 없고 당간지주만 있는데 이것은 당간이 쇠(철)로 만든 것이라 녹슬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당간지주는 분황사(芬皇寺) 것으로 여기엔 거북으로 된 간대가 남아 있습니다. 공주 반죽동(斑竹洞) 당간지주(보물 150)와 갑사(甲寺) 철당간과 지주(보물 256), 금산사(金山寺) 당간지주(보물 28)에는 기대가 완전히 남아 있어 당간지주의 원형을 볼 수 있지요. 특히 중초사터(中初寺址) 당간지주(보물 4)는 흥덕왕(826년) 2월에 완성했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간지주 양식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서울에서 가까이 있는 당간지주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장의사의 옛터에 동서로 마주 서 있는 “장의사터당간지주”입니다. 장의사는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지금의 논산으로 추정)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 장춘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