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은 집의 둘레나 일정한 공간을 둘러막으려고 흙·돌·벽돌 따위로 쌓아 올린 것입니다. 하지만, 한옥에서 담의 의미는 크지 않습니다. 뛰어넘으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도둑을 막으려는 뜻보다는 그냥 경계로서의 뜻이 더 강합니다. 그리고 한옥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요. 담의 종류로는 먼저 짚을 썰어 넣고 석회를 적당히 섞은 흙으로 다져서 굳힌 흙담(토담)이 있습니다. 또 자연에서 얻은 돌로 쌓아올린 돌담(돌각담)이 있습니다. 돌담에는 사립문을 달면 잘 어울리고, 담쟁이나 머루덩굴을 올리면 참 좋습니다. 그밖에 나뭇가지나 수수깡으로 둘러치는 경계인 울타리, 나무를 돌려 심어서 저절로 울타리가 되게 한 생울타리도 있지요. 흙을 이겨 사이사이에 넣으면서 돌로 쌓아 올린 담으로 죽담이란 것도 있는데 돌담과 흙담의 어울림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담으로 경복궁 자경전에 있는 화초담이란 것도 있습니다. 화초담은 여러 가지 빛깔로 글자나 무늬를 넣고 쌓는 담을 말하는데 꽃담ㆍ꽃무늬담ㆍ조장(彫牆)이라고도 부릅니다. 외로운 세월을 사는 대비의 장수를 비손하는 뜻이 담겨 있지요. 또 한 가지 담은 아니지만 김장밭 둘레에 개나 닭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야트막하게 만들어 두
사극을 보면 죄인을 다루는 의금부와 포도청 등이 등장합니다만 의금부와 포도청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조선시대 법령의 기본으로 삼은 1485년(성종 16)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1865년(고종 2) 편찬된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통해 그 차이를 알아봅니다. 먼저 의금부(義禁府)는 조선시대 사법(司法)기관으로 금오(金吾)·왕부(王府)·조옥(詔獄)이라고도 했지요. 의금부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중죄인을 다스리던 기관으로 신문결과에 따라서 죄인은 사약 또는 귀양 유배 등의 판결이 나는 대역죄를 주로 다뤘습니다. 그에 견주면 포도청(捕盜廳)은 조선시대의 경찰서인데 포청(捕廳)으로 줄여서 말하기도 합니다. 포도청은 주로 도적과 간악한 소인을 체포하는 기관으로 구역을 나누어 야간에 순찰하는 임무를 띄었습니다. 포도청은 좌포도청 ·우포도청으로 나누어, 좌포도청은 한성부의 동부 ·남부 ·중부와 경기좌도(京畿左道) 일원을 맡았고, 우포도청은 한성부의 서부 ·북부와 경기우도(京畿右道)를 맡았습니다. 의금부는 임금 직속기관이며, 그 우두머리는 종1품 판사인데 반해 포도청은 병조의 아래 기관으로 그 우두머리는 포도대장으로 종2품이지요. 그밖에 내금위(內禁衛)
“해마다 요맘때면 입학시험으로 인한 별별 희비극이 만히 연출되는 바 금년에도 발서 이런 류의 사건이 만흔중 특히 平原의 金東植(17)-가명 鏡城의 尹七福(17)-가명-동군의 崔貞煥(17)-가명-등 꼭가튼 17세 소년은 지난달 상순경에 경성에 와서 부내 모 고등보통학교의 입학시험을 보다가 실패를 한 후 집에 도라갈 면목이 업서 멀리 滿洲방면으로 다러나기로 하엿스나 려비를 구출할 수가 업서서 지난 3일 세 소년은 공모하고 三越백화점에 가서 물품 수십여 가지를 절취하여 가지고 이를 입질(入質)하려다 경찰에 발각되야 엄중한 취조를 밧는 중이라 한다.” 위 글은 일제강점기 때의 잡지 ≪별건곤≫ 제72호(1934년 4월)에 실린 글입니다. 청소년들이 보통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자 집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 만주로 달아나기 위한 여비를 만들려고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친 다음 이를 저당잡히고 돈을 빌리려다가 경찰에 걸린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성적부진이라든가 입시실패 등으로 아파트 등지에서 투신자살하거나 친구들과 함께 집단자살하는 예가 있습니다만 일제강점기에도 예외는 아니었나 봅니다. 기대감이 큰 부모님 뵐 면목이 없어 입시에 실패한 경우 가출을 꿈꾸지만, 막상 멀리 떠
오늘은 24절기의 열다섯 번째 절기인 백로(白露)입니다. 이때쯤이면 밤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지지요. 원래 이때는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데 더없이 좋은 때입니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내리쬐는 하루 땡볕에 쌀이 12만 섬(1998년 기준)이나 더 거둬들일 수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비가 너무 내려 기청제라도 올려야 할 판입니다. 옛 어른들은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구절을 잘 썼는데, 백로에서 추석까지 시절을 포도순절이라 했지요. 그 해 첫 포도를 따면 사당에 먼저 고한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주렁주렁 달린 포도알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의미이고, 조선 백자에 포도 무늬가 많은 것도 역시 같은 뜻입니다. 어떤 어른들은 처녀가 포도를 먹고 있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 때문이지요. 부모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을 때 ‘포도지정(葡萄之情)’을 잊었다고 개탄을 합니다. ‘포도의 정’이란 어릴 때 어머니가 포도를 한 알, 한 알 입에 넣어 껍데기와 씨를 가려낸 다음 입
“물시계 소리는 낮아지고, 등불은 반짝이니 / 비단 휘장은 차고, 가을 밤은 깊어라 / 변방 옷을 다 지어 가위는 차가운데, / 창에 가득 파초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네.” 허난설헌의 작품 추야사(秋夜詞)입니다. 이미 옷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가위가 차가워졌는데 옷을 드릴 임은 오지 않습니다. 가위는 2개의 날[刃]을 엇걸어서 옷감·종이·머리털 등을 자르는 기구로 교도(交刀), 전도(剪刀), 협도(鋏刀)라는 말로도 불리었습니다. 가장 오래된 가위 유물은 기원전 1000년경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철제 가위라고 하는데 양털을 깎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도 경주 안압지에서 가위 유물이 나왔지요. 늘 옷을 짓는 일을 하던 옛 여인들은 바늘, 자, 다리미 등과 함께 가위는 아꼈습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규중 부인들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침선의 7가지를 의인화하여 인간사회를 풍자한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같은 작품도 나왔지요. 그 규중칠우쟁론기에는 “교두 각시 양각(兩脚)을 빨리 놀려 내달아 이르되, ‘척부인아, 그대 아모리 마련을 잘 한들 버혀 내지 아니하면 모양 제대로 되겠느냐. 내 공과 내 덕이니 네 공만 자랑마라.’”라며 가위가 잘난
“유밀과(油蜜菓)”란 우리 고유의 과자로 밀가루나 쌀가루 반죽을 적당한 모양으로 빚어 바싹 말린 후에 기름에 튀겨 꿀이나 조청을 바르고 튀밥, 깨 따위를 입힌 과자로 밀과 유과 약과 등을 말합니다. 지금은 흔해빠진 과자지만 예전에는 귀하고 사치스러운 기호식품으로 왕실과 귀족 집안에서 이런 약과를 만들려고 곡물, 기름, 꿀을 허비한다 하여 이를 금한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고려사절요 제13권에는 “지금부터는 유밀과를 쓰지 말고, 과일로 대신하되, 작은 잔치에는 3그릇을 넘지 말고, 중간 잔치에는 5그릇을 넘지 말고, 큰 잔치에는 9그릇을 넘지 말게 하며, 찬(饌) 역시 3가지를 넘지 말게 할 것이며, 만약 부득이하여 더 쓰게 되더라도 포(脯)와 젓을 번갈아 들여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이대로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죄를 물을 것이다."라고 해서 유밀과를 함부로 쓰면 벌을 주었습니다. 또 태종실록 35권 18 년 기록에도 “혼인하는 집에서 3일에 유밀과상(油蜜果床)을 차리는 것은 실로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이 보일 정도로 유밀과는 함부로 먹기 어려운 과자였지요. 최남선의 조선상식에서는 ‘유밀과’를 조선에서 만드는 과자 가운데 가장 좋은 상품이며 이를 만
1905년 11월 17일 오후 을사늑약이 강행된 덕수궁 앞과 회의장 안은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기병 800명, 포병 5,000명, 보병 2만 명이 서울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하지요. ≪한말외교비화(1930)≫에 보면 “슬피 부르짖는” 참정대신 한규설이 별실로 끌려나가는 순간 이토 히로부미는 다른 대신들을 보며 “너무 어리광을 부리면 죽여 버리라.”라고 크지 않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한규설·민영기·이하영은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지만 11월 18일 새벽 1시쯤 이완용을 필두로 이지용·이근택·권중현·박제순의 을사오적은 매국노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42년 해외독립운동 지도자들 앞에서 황제의 특사 헐버트는 고종황제가 늑약에 동의도 비준도 하지 않았다고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역사에 기록될 가장 중요한 일을 증언한다. 황제는 일본에 항복한 적이 결코 없다. 긍종(肯從)하여 신성한 국체를 더럽힌 적도 결코 없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미국의 협조를 구하고,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조선인 모두에 고한다. 황제가 보이신 불멸의 충의를 영원히 간직하라.” 이처럼 당시 고종 황제는 나라를 되찾으려고 온 힘을 다하
“고초장, 된장, 간장, 뗏장, 아이고 아니로고나 초장화, 초장화, 초장화, 장화초, 장화초 아이고 이것도 아니로구나. 이것이 무엇일까? 방장, 천장, 송장, 접장 아이고 이것도 아니로구나. 이것이 무엇일까? 갑갑하여 못살겠네.” 위 노래는 판소리 “흥부가” 중 “화초장 타령” 일부입니다. 부자가 된 흥보를 찾아간 놀부는 방안에 있는 화초장을 보고 그걸 빼앗아서 돌아오지요. 신이 난 나머지 “화초장, 화초장….” 하고 노래를 부르던 놀부는 또랑 하나를 건너뛰다 그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초장, 된장, 간장, 뗏장” 하면서 “장” 자가 들어간 온갖 이름을 다 불러보는 장면입니다. 화초장(花草欌)은 문판에 꽃 그림을 그려 장식했으며, 장 안에는 해충의 침입을 막으려고 한지나 비단을 발라 둔 옷장이나 의걸이장(위는 옷을 걸게 되고 아래는 반닫이로 된 장)이지요. 화초장은 놀부가 욕심을 내서 직접 지고 갈 만큼 아름다운 장입니다. 조선시대 안방에는 꼭 이 아름다운 화초장이 있었지요. 화초장은 화류목 또는 화초목이라고 부르는 모과나무의 목재로 만듭니다. 조선시대 안방을 장식했던 화초장, 이젠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가구입니다.
아담한 숲 길은 언제 걸어도 좋습니다. 꽃피는 봄도 좋고 녹음 우거진 여름도 좋으며 낙엽 고운 가을, 그리고 흰 눈 내리는 겨우내 상림은 우리를 기다립니다. 신라 진성여왕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인공으로 조성한 숲이라고 하지만 전혀 인공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천여 년의 세월도 세월이거니와 자연을 벗하며 씻어내린 아름다운 마음이 빚은 소담스런 정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인 상림은 소나무, 노간주나무, 개서어나무, 갈참나무, 느릅나무 등이 골고루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조사된 식물은 총 91속 116종류로 우거진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며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에 장원으로 급제한 천재소년 최치원을 그려보는 것도 의미가 깊을 것입니다. 신라말에 귀국한 조국의 현실에서는 자신의 개혁안이 실현될 수 없음을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하는 그는 그러나 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상림 숲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상림 숲과 같은 마을 숲은 마을 사람들의 정서적 안정은 물론 생물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바람을
조선시대에도 백과사전이 있었습니다. 홍봉한(洪鳳漢) 등이 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쓰인 책은 1614년(광해군 6)에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이지요. 《지봉유설》의 폭넓은 지식을 보면 권2의 외국조에 섬라(暹羅, 태국), 진랍국(眞臘國, 캄보디아), 방갈자(榜葛刺, 방글라데시), 안남(安南,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은 물론 불랑기국(佛狼機國, 포르투칼), 남번국(南番國, 네덜란드), 영결리국(永結利國, 영국) 등 유럽 나라들의 정보까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름들은 당시 중국이 한자로 표기하던 것을 들여온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지봉유설》은 당대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종합한 문화백과사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돋보이는 것은 우리 겨레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근거가 되는 문헌상의 출처를 명확히 밝혔다는 점도 칭찬할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