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발’은 ‘막사기’로도 불리던 생활그릇인데 밥그릇, 국그릇, 막걸리 사발 등으로 쓰였습니다. 막사발은 주로 일반 백성이 썼던 그릇으로 위가 조금 오그라진 대접 모양을 하고 있지요. 살이 두껍고 겉 표면이 부드럽지 않으며 까칠한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땅에서 얻어진 황토로 빚어낸 막사발은 밝은 빛깔의 장식이 없는 자연스러움이 담겨 소박한 그릇이지만 일본에서는 엄청난 인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일본 도공은 “이런 그릇을 일생 하나라도 만들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하고, 어떤 차인은 이 그릇은 성 하나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또 과거 일본의 실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나 풍신수길은 이 막사발을 정말 좋아했지요. 그래서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부하에게 이 막사발을 주었습니다. 풍신수길의 부하 가운데 쓰츠이 준케라는 성주는 풍신수길의 말을 어겼다가 이 그릇을 그에게 바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막사발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찻잔으로 사용되었는데 끌려간 조선도공이 만드는 막사발은 보물(이도다완 : 井戶
“일천가지 뻗은 논에 삼천석이 될듯하다 / 우리 집 논은 네 귀 잽이 너의 집 논은 샘 뱀이 전답 / 장구 뱀이 얼뜬 매고 물 논뱀이로 들어갑세다. / 일낙서산 해 떨어진다 월출동령 달 솟아 온다. / 얼른 매자 빨리 매자 항두김매기가 이거란다 / (후렴) 에헤야 에헤야 에에에헤야 에헤로다 호무로다” 지금 농촌은 구슬땀을 흘리며 김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위 가사 속에는 해질때까지 부지런히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향두계놀이"는 서도연희극보존회(회장 최경만)가 만들어낸 전통 소리극으로 서도소리는 구성지고 슬프면서도 꿋꿋한 힘이 있는 게 그 특징입니다. 황해도와 평안도를 바탕으로 하는 서도소리는 깊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울림이 강한 노래입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유지숙 전수조교는 향두계를 바탕으로 한 농민들의 화합을 그린 '평안도 향두계 놀이'로 전통 소리극 곧 토종 뮤지컬을 만들어내 무대에 올렸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봄에 좋은 씨앗을 고르는 장면에서 시작해 가을 걷이 후 기쁨을 나누는 장면까지 농촌의 한해 삶
“유월이라 늦여름 되니 소서 대서 절기로다. / 큰 비도 때로 오고 더위도 극심하다 / 초록이 무성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 땅 위에 물 고이니 참개구리 소리 난다 (중략) / 젊은이 하는 일이 / 김매기 뿐이로다 / 논밭을 갈마들여 / 삼사차 돌려 맬 제 / 날 새면 호미들고 / 긴긴해 쉴 새 없이 / 땀 흘려 흙이 젓고 / 숨막혀 기진 할 듯” 이즈음을 소개한 농가월령가 일부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한 번째로 하지와 대서 사이에 드는 소서입니다. 소서는 ‘작은 더위’라 불리며, 이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됩니다. 또 이때는 장마철이라 습도가 높아지고, 비가 많이 오지요. 하지 무렵에 모내기를 끝내고, 소서 때는 논매기를 했습니다. 팥, 콩, 조들은 하지 무렵에 심고, 두렁의 풀을 베고 퇴비 장만도 합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철이므로 푸성귀(채소)나 과일들이 풍성해지고 보리와 밀도 먹게 되지요. 특히 음력 5월 단오를 전후하여 시절음식으로 즐기는 밀가루 음식은 이때 제일 맛이 나서 국수나 수제비를 즐겨 해먹습니다. 생선으로는 민어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이 글은 서울 망우리 공원 묘원에 있는 아사카와 묘 앞에 세워진 빗돌(묘비) 내용입니다. 이 무덤 주인은 한국의 찻그릇, 깨어진 도자기 조각 그리고 정감 어린 소반(상)을 통해 이 땅과 한국 사람을 몹시도 사랑했던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2~1931)입니다. 먼저 건너와 있던 형을 따라 조선에 온 그는 일본인임에도 조선어를 유창하게 말했으며, 한복을 즐겨 입었고, 김치를 좋아했습니다. 조선임업시험소 말단직원으로 17년 동안 일하면서 "조선 도자기의 귀신"이란 말을 듣던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를 통해 조선 민예에 빠져든 뒤 박봉을 쪼개 도자기와 소반을 틈틈이 수집했습니다. 한복을 입고 다니다 조선인으로 오해한 일본인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래도 한복을 벗지 않았습니다. 조선임업시험소 한국인 고용원들에게 친구처럼 대했던 그는 폐렴이 악화되어 40살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되자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오. 그리고 조선식으로 장사를 지내주
“겸재 그림은 말년에 더욱 능란해지고 신기해져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며, 세상에서는 겸현(謙玄)이라고 일컬으나 그 아담한 정취는 현재에 미치지 못한다고도 한다.” 이 말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조순이 겸재 그림을 평한 제겸재화첨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웬만하면 알지만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심사정은 조선 후기 2백 년을 대표하는 화가로 사람들이 일컫는 3원3재(三園三齋,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뛰어난 화가입니다. 현재는 중국 남종문인화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한 화가로 관념적 화풍으로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이 세계로 나가게 했다고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말합니다. 그러나 심사정은 할아버지 심익창이 영조 임금을 살해하려 한 무리의 배후라는 죄로 극형을 당한 뒤 몰락한 집안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도 그림에 시 한 수 붙여
“언제부터 걸려 있었나 잿간 흙벽에 외로이 매달린 작은 꼴망태기 하나 / 그 옛날 낫질 솜씨 뽐내셨을 할아버지의 거친 숨결이 아버지의 굵은 땀방울이 / 찐득찐득 배어들어 누렇게누렇게 삭아버린 꼴망태기 하나 /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나무지겟짐 세워 놓고 떡갈잎 물주걱 만들어 / 시원하게 목축이다 흘리신 바윗골 약수랑 싱그러운 들꽃 향기랑 / 소릇이 배어들어 바작바작 삭어버린 꼴망태기 하나” 위 노래는 최병엽 작사, 한동찬 작곡의 동요 꼴망태기의 일부입니다. “망태기”는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써왔던 것인데 새끼 등으로 꼬아 만든 주머니로 물건을 담아서 다니는 데 쓰는 기구입니다. 망탁·망태라고도 하고, 지역에 따라 구럭·깔망태·망탱이라고도 하지요. 어깨에 멜 수 있도록 양끝에 길게 고리를 달아 썼습니다. 망태기는 여러 가지 쓰임새가 있는데 쓰임새와 모양에 따라 이름도 달라집니다. 꼴 곧 말과 소에 먹이는 풀을 담는 꼴망태가 있고, 장기짝을 넣어 두는 조그마한 망태기 장기망태기도 있습니다. 망태기와는 모양이나 쓰임새가 다른 “삼태기”도 있는데 쓰레
우리 전통술은 참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그 맥이 끊겨 잊힌 것들이 많지요. 다행히 아직도 전승돼 오는 것들이 곳곳에 있어서 다행입니다. 향온주(香醞酒)도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인데 서울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특히 향온주는 임금이 마시고 신하에게도 내렸던 술로 유명합니다. 사온서라는 관청에서 궁중 어의들의 관리 아래 술을 빚어 대궐 안으로 들여보냈던 술입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인현왕후가 폐비 되어 사가에 유폐되었다가 복위 되어 환궁하려 할 때 일어설 수가 없었는데 대궐에서 가지고 온 향온주를 마신 뒤 기운을 차렸다고 하지요. 이후 인현왕후 외할머니 집안인 하동 정씨 가문에 전해내려와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맥이 끊겼다가 1988년 고 정해중 선생이 다시 재현했습니다. 향온주는 ≪규곤시의방≫, ≪고사찰요≫, ≪요록≫ 등 13가지의 고문헌에 나옵니다. 이 술을 빚는 특징은 물을 바위틈에서 나오는 석간수(石間水) 만을 쓰는 것은 물론 원료로 차가운 녹두를 쓰기 때문에 술을 빚는 데 6달
벼슬이 형조판서, 의정부 좌참찬까지 오른 재상 반석평(潘碩枰, ?~1540)이란 사람이 하루는 수레(초헌)를 타고 가다가 초라한 옷차림새로 걸어가는 한 사람을 보자 수레에서 내려 그에게 절을 했습니다. 절을 받은 사람은 반석평이 옛날 종이었던 때 모시던 주인의 아들이었지요. 그리고는 임금에게 자기가 예전 종이었음을 실토하며 자기의 벼슬을 깎아 어렵게 사는 그 주인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려달라는 상소를 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 뜻을 의롭게 여겨 주인집 후손에게 벼슬을 내려준 것은 물론 반석평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게 했습니다. 조선시대엔 신분제도가 엄격하여 종은 절대로 양반이 될 수 없었음은 물론 세습까지 되었고, 첩의 자식 서얼도 벼슬길에 오를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반석평은 종의 신분으로 어찌 재상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요? 조선 후기에 오면 신분질서가 문란해져 돈으로 양반을 사는 일도 있었지만 반석평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니까 여기에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원래 반석평은 재상 집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상이 그의 성품과 재주를 아껴
수원에는 우리나라 농업 발전을 뒷받침하고 있는 농촌진흥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근에는 커다란 저수지 서호 곧 축만제가 있지요. 농촌진흥청이 여기에 자리 잡은 까닭은 바로 서호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정조는 1799년 화성의 서쪽에 커다란 저수지를 파고 축만제(祝萬堤)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곧 서호(西湖)라고 이름을 고칩니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풍년을 비손한다는 뜻이고 서호는 화성 서쪽에 있어 부른 이름이지요. “이 농토를 만든 것은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큰 뜻에서 나온 것인데, 경작자에게 나눠 줄 때는 먼저 아전과 관의 노비로부터 성안의 백성까지 그 힘에 따라 원하는 대로 나누어주라.” 이 글은 화성을 지을 때 있었던 모든 것을 적은 화성성역의궤의 ‘절목’에 나오는 글로써 정조가 왜 서호를 파고 농토를 마련했는지 잘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이때 수원에서 실현된 대규모 수리 시설과 최신 영농방법은 조선후기 농업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농촌진흥청이 2012년까지 전주로 이전 계획을 세우면서 이 유서 깊은 서호도 찬밥 신세가
지금 들에 나가면 수많은 들꽃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흔히 눈에 띄는 타래난초도 있지요. 꽃대궁을 돌아올라가는 아름다운 타래난초는 외떡잎식물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잔디밭, 논둑, 무덤가에 5월부터 여름 내내 꽃이 핍니다. 그런데 이 타래난초가 무덤가에 피면 꽃이 줄기를 타고 빙빙 꼬여 피므로 후손들 하는 일이 꼬여서 안 좋다고 뽑아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타래난초를 곰곰이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게 다음 “들꽃글방” 카페지기님의 이야기입니다. “나선형 계단을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그렇게 오르다 보면 어디가 나올까요. 긴 꽃대궁도 꽃들의 행진에 신이 났나 봅니다. 꽃대 끝에 눈길을 주면 거기에도 익어가고 있는 꽃망울이 달려선 까딱거리고 있어요.”라는 마음으로 바라본 까닭입니다. 사실 타래난초는 작은 꽃대에 핀 수많은 꽃이 질서를 아주 잘 지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걷는 행복》을 쓴 작가 이브 파칼레는 타래난초의 꽃부리가 하나하나 열리는 품이 마치 항성의 궤도에 키스를 하는 듯하다고 했다지요. 타래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