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를 종이처럼 얇고, 실처럼 가늘게 쪼개어 부드럽게 한 ‘대오리’를 형형색색으로 물 들이고서, 베 짜듯 다양한 무늬를 놓아가며 엮어 짠 고리(상자)를 “채죽상자(彩竹箱子)” 곧 “채상(彩箱)”이라고 합니다. 옷고리나 반짇고리 등 안방에서 고리나 상자로 사용되는 부녀자의 죽공예용품으로 “채협”이라고도 하지요. 대를 재료로 하여 가공한 죽세공품 중에서 가장 정교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 채상 만들기입니다. 대오리에 다양한 빛깔로 물들여 그 무늬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염색을 하지 않은 ‘소상(素箱)’도 대나무의 겉대와 속대가 서로 다른 빛깔의 무늬를 만들어내 오묘하지요. 결이 어찌나 고운지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무늬 ‘채(彩)’ 자 대신 비단 ‘채(綵)’ 자를 붙여 채상(綵箱) 곧 ‘비단 같은 상자’라는 고운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좋은 채상을 임금에게 진상하면 나라에서 참봉(參奉)이나 봉사(奉事) 벼슬을 내렸다지요. 민간에서도 보통 폐백이나 혼수 등에 쓰는 귀한 물건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했습니다. 통풍이 잘되어 곰팡이가 생기지 않고, 오래 담아 두어도 냄새가 배지 않는 상자입니다. 채상은 대나무가 많이 나는 남부지방에서 주로 썼고, 중부 이
연자방아는 연자매라고도 하는데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은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이를 소나 말이 끌게 하여 돌리면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데 쓴 큰 맷돌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마을의 너른 터나 당산나무 아래 하나씩 있었는데 이곳을 연자방앗간 또는 연자맷간이라 하였지요. 근대적인 기계가 나오기 전까지는 곡식을 찧거나 빻는 기구로 절구방아, 디딜방아, 물레방아, 연자방아 등을 썼습니다. 맷돌, 절구방아, 디딜방아는 사람의 힘으로 돌리고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해 돌렸으나 연자방아는 소나 말 등 가축의 힘을 써서 돌리는 것으로 개인의 재산이 아닌 마을의 공동 소유물이었지요. 연자방아를 돌릴 때는 소가 어지럼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눈을 검을 헝겊으로 가려준다고 하지요. 방아채를 소에 연결하여 돌리면 낟알들이 방아확 밖으로 밀려 떨어져 쌓이고, 방아확꾼은 나온 알곡을 빗자루로 쓸어서 방아축이 있는 가운데로 모아 줍니다. 연자방아는 혼자 쓰는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씀으로써 공동체의식을 키웠던 농사도구였지요. 모를 심을때부터 김매기를 거쳐 가을 걷이를 마칠때까지 우리 겨레는 더불어 일했고 농사의 마지막 단계인 방아찧는 일까지 서로 도우며 공동체 의식을 다
올 8월 29일은 국치 100돌이 되는 날인 동시에 백범 김구 선생 탄신 134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때를 맞아 백범이 인천 감옥(감리서)을 탈출하여 도피생활을 했던 여정을 자전거로 답사하는 대장정이 진행 중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인 이규봉 배재대 교수는 지난 7월 14일 인천 감리서터를 출발하여 부천, 서울 양화진 절두산공원을 거쳐 오산-논산-무주-남원-김제-광주-목포-완도-보성-순창-하동-진안-대전-공주 마곡사에 이르는 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번 자전거 일주는 백범이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중위 스치다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인천감리서에 투옥된 후 1898년 탈옥해 삼남지방으로 도피했던 노정과 관련된 유적지를 모두 찾아 나선 길로 총 거리 1,470km에 이르는 장대한 여정이지요. 이 행사는 강제병합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사적지연구회(회장 이봉원),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 청년백범의 공동 후원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간 아무도 밟지 않은 길! 국내 처음으로 시도되는 백범 가신 길 1,470km를 답사하는 이규봉 교수는 지금 한여름 뜨거운 폭염이 내리쬐고
세조실록 7권, 3년 (1457) 4월 18일 기사에는 복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복날 설명은 음 기운 곧 가을기운(금,金) 이 일어나려다 양 기운 곧 화(火) 기운인 여름기운에 눌려 엎드려 숨어있는 것이 복날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더운기운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지요.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에 보면 복날을 '서기제복(暑氣制伏)'이라 해서 더위를 피하는 날이 아니라 더위를 꺾는 날 곧 더위를 정복하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더위를 겁내어 피하는 피서'避暑'보다는 더위를 제압하고 누른다는 발상이 참 신선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겨레는 더위를 물리쳤을까요? 더위를 이기는 방법으로 이열치열이란 게 있지요. 삼계탕 같은 뜨거운 음식으로 몸을 보하는 것이 그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양반들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김매기를 도왔습니다. 또한, 복날 풍속에 '복날 시내나 강에서 목욕을 하면 몸이 여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날에는 아무리 더워도 목욕을 하지 않는데 다만, 초복에 목욕을 했을때 중복과 말복 날에도 목욕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낮에는 삼계탕 한 그릇과 수박 한 덩이를 팍 잘라서 이웃과 함께 나눠 먹고 팔 걷어붙이고 열심히
‘한일 평화를 여는 역사여행’에 얼레빗 독자 다섯분만 모십니다 4343(2010). 07. 16. 00 이번에 여름방학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최하는 아주 뜻 깊은 ‘한일역사탐방’ 프로그램이 있어 소개해드립니다. 프로그램 내용을 보시면 알겠지만 개인이나 일반 단체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 위주로 엄선된 역사여행이기에 얼레빗 독자께 소개합니다. 후회 없는 역사현장 탐방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번 답사여행은 모집 인원 좌석이 한정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에 참석하실 분은 서둘러 연락하셔서 좋은 체험을 나누시길 바랍니다. 연락처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 02-969-0226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사무국장 :010-2207-0364 2010. 7. 16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사룀
임금의 사위 곧 공주의 남편을 부마라고 합니다. 조선 후기 세도가 안동 김씨 문중의 김현근(金賢根)은 조선 제23대 순조임금의 첫째 공주 명온공주(明溫公主)와 혼인해서 부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마 김현근이 심한 정신병으로 발작을 해 집안은 물론 동네를 온통 소란하게 만들어 부마의 체면이 깎였지요. 그래서 왕실과 김씨 문중에서는 김현근의 정신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했으나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하는 수없이 마지막으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경악법(驚愕法)으로 치료코자 했지요. 경악법이란 딸꾹질을 할 때, 깜짝 놀라게 하여 딸꾹질을 멈추게 하는 것처럼 환자를 매우 놀라게 하여 환자의 몸속에 있는 악귀를 쫓아낸다는 치료법입니다. 밤이면, 김현근을 마당 한가운데 앉혀놓고 무당이 대나무 큰칼을 만들어 양손에 들고 요란한 가락에 따라 춤을 추면서 환자의 둘레를 빙빙 돌았습니다. 그러다 환자가 잠깐 졸거나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틈을 타서 가지고 있던 죽도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면 환자가 크게 놀라고 그 덕분에 몸에 붙은 악귀를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 집에서는 매일 죽도를 들고 춤을 추는 소리와 죽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담 밖까지 들려 나와
“해가 한낮이 되려는데 빛이 갑자기 엷어져 / 처음에는 담장 밖에서 징소리 들리더니 / 잇달아 쿵쿵 북소리 사방으로 퍼지네 / 깜짝 놀라 문밖에 나가 해를 쳐다보니 / 어슴푸레 해 주변에 물체가 있는 듯 / 아이 불러 물동이에다 맑은 물 담게 하고 / 그 물동이 바닥으로 태양을 살펴보니 / 태양이 반쯤 이지러져 조각달과 같아 / 참담한 하늘 모습에 깊은 시름에 잠겼네” 위 글은 고려말의 문신 정추가 쓴 《원재고》에 나오는 시로 일식에 대해 읊은 것입니다. 일식(日蝕) 곧 해가림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요. 조선시대에는 일식이 있으면 구식례를 했습니다. “구식례(救食禮)”는 일식이나 월식(月蝕)이 있을 때 이를 괴이한 변고라 하여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월대(月臺) 곧 섬돌에서 해나 달을 향해 기도하며 자숙하는 의식이지요. 천문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는 물동이에 물을 담아놓고 거기에 비치는 해를 관찰했습니다. 태양이 반쯤 이지러져 조각달과 같았다는 것을 보아 부분일식이었던 듯합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일식을 음기가 성하여 일어나는 이변
“대나무는 본래 대장부에 견주었고 / 분명히 아녀자와 가까운 것이 아니었는데 / 어찌하여 침구로 만들어져서 / 억지로 부인이라 이름 붙였나 / 내 어깨와 다리를 괴어 편안하게 해주었고 / 이불 속으로 들어와서는 벗이 되었네 / 비록 다소곳이 남편 시중은 못 들지만 / 방 안에서는 내 몸을 독차지하게 되었네” 위 시는 고려시대 문신이며, 명문장가인 이규보의 죽부인 일부입니다. 죽부인(竹夫人)은 대[竹]를 쪼개어 매끈하게 다듬어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옛 침구지요. 누워서 안고 자기에 알맞게 원통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속이 비어 있어 공기가 잘 통하고, 대나무의 표면에서 느끼는 차가운 감촉 등의 특징을 써서 만든 것인데, 여름에 홑이불 속에 넣고 자면 더위를 한결 덜 수 있었지요. 죽부인은 어머니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의 것을 쓰지 않는 것이 예의였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관속에 합장하거나 불에 태웠습니다. 당나라에서는 무릎에 끼고 자는 대라는 뜻으로 “죽협슬(竹夾膝)”이라 불렀고, 송나라에 와서 죽부인이라 불렀는데 죽희(竹姬, 대나무 첩), 죽노(竹奴, 대나무종) 등으로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왜 지어미 “부(婦)”를 쓰지 않고, 지아비 “부(夫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활자 인쇄술을 계승·발전시켜 “금속활자 공화국”이라 부를 정도로 다양한 활자를 만들어 썼습니다. 책을 펴내거나 활자를 만드는 관청도 고려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태종(1403)은 주자소를 설치하고 동활자 수십만 자를 주조하고 이를 조선 최초의 활자인 “계미자(癸未字)”라 하였지요. 그 뒤 세종시대에 오면 1420년(세종 2년)에 앞선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개량한 금속활자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자자는 너무 가늘고 작아 보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지요. 그래서 다시 나온 활자가 갑인자인데 1434년(세종 16) 갑인년 9월에 만든 금속활자입니다. 세종의 명에 의해 주조된 갑인자(甲寅字)는 글자체가 부드럽고 아름다웠습니다. 갑인자는 금속활자 인쇄술이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활자로 활자주조에 참여한 인물들이 당대 최고의 과학자나 기술자였던 만큼 활자의 모양도 이전 활자들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과학적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조판도 밀랍이 아닌 나무 조각이나 종이 등으로 빈틈
경교장은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이 살던 집입니다. 백범은 귀국한 1945년 11월 이후부터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했지요.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로서 임시정부 국무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 '남북 정치지도자 회담'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곳입니다. 그동안 이 건물은 강북삼성병원 일부로 써왔는데 최근 서울시가 2011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로 복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강북삼성병원의 원무실로 쓰였던 1층 서쪽 방은 임시정부 환국 후 국무회의가 열렸던 귀빈 응접실로 복원되며, 약품창고로 사용되었던 2층 가운데 방과 동쪽 방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와 서재로 복원됩니다. 또 그간 병원시설로 활용되면서 변형되었던 건물 안 벽이나 사라진 창문 등도 모두 1945~1946년 당시의 임시정부 청사의 모습으로 되살려낼 예정이지요. 서울시는 경교장이 백범 선생이 돌아가시고서 각국 대사관ㆍ의료시설로 사용되면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었는데 이번 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