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짚신나물일까? 저 씨앗을 자세히 보세요. 갈고리 같은 게 있지요. 아직 덜 여물어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저것이 산길 걷는 나그네의 짚신에 달라붙어서 이동을 했다네요. 무임승차의 달인이죠. 그래서 짚신나물이란 이름이 붙었어요." 다음 “들꽃글방” 카페지기님의 맛깔스러운 글입니다. 이 글을 보고 어떤 이는 자신도 “다른 이의 사랑에 무임승차를 하고픈 때가 있는데 이 짚신나물에게 한 수 배울까?”라고 말합니다. “짚신나물”은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한국·일본·중국·인도·히말라야·몽골·시베리아 등지의 풀밭이나 길가에서 자랍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용아초, 선학초, 황화초, 탈력초, 짚신풀, 지선초 등의 여러 이름이 있는데 용아초(龍牙草)라는 이름은 이른 봄철에 돋아나는 새싹이 마치 용의 이빨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한방에서 뿌리를 뺀 모두를 용아초(龍芽草)라는 약재로 쓰는데, 지혈제로 소변출혈·자궁출혈·각혈·변혈 등 각종 출혈 증상에 씁니다. 북한에서 펴낸 동의학 사전에는 “이 식물을 위암·식도암·대장암·간암·자궁암·방광암 등에 쓴다.”라고 적혀 있는데 짚신나물은 암 치료에 부작용이 없을 정도로 좋다고 합니다. 선학초라 불리는 것은 다음 이야기가 전해
“십오 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 하루 놀려다가 뚜드려 맞았네 / 몽두리 맞고서 굴 안에 끌려와서 / 천장이 떨어져서 이 세상 이별했네 / 죽은 아 꺼내서 손발을 만지면서 / 눈물을 흘리면서 이름만 불러봤네 / 감독놈들 몽두리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석탄 담아 내라 했네.” 위는 "강제연행된 조선인 석탄광부의 노래" 중 일부입니다. 지난 8월6일부터 17일까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주관으로 '경술국치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이 있었습니다.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나가사키,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 등지의 조선인 강제노동현장과 여러 추도시설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도쿄의 야스쿠니신사에 무단 합사(강제로 합동 제사)된 조선인 2만 1천명의 영혼을 하루 속히 분사(유족이 원하는 곳에서 제사 지내는 일)되도록 요구하는 답사일정이었습니다. 위 노래가사를 전해준 분은 강제연행된 조선인 2세인 배동록 할아버지로 시모노세키일대를 안내해주시면서 어머니와 함께 전쟁 중 일본군의 잔학성과 만행을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꿋꿋이 알려오신 분입니다. 올해 67살로 11월 10일 우스이초등학교에서 700회의 증언을 앞두고 있는 배 할아버지는 시모
혜강(惠岡) 최한기(1803~1877)는 저술한 책이 1천 권에 이를 만큼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알려진 것은 모두 1백 권 정도이고,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은 80여 권이라고 전합니다. 그의 책 가운데 ≪인정(人政)≫ 제12권 ‘잡기(雜技)’를 경계함에는 “무용(無用)한 일에 마음을 쓰는 자는 반드시 유용한 일에 소홀하고, 유용한 일에 전심(專心)하는 자는 반드시 무용한 일을 천히 여겨 버린다. 잡기에 탐혹(貪惑)이 깊어지면 인도(人道)를 폐하면서까지 즐거움에 탐닉하며 가산(家産)을 탕진하면서 법을 범하게 된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잡기’냐 아니냐는 그것에 돈을 거느냐 순수하게 즐기느냐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심리록(審理錄)≫ 제1권(1777년)에 보면 태천(泰川) 사람 양만덕의 글이 나옵니다. 내용을 보면 “양만덕 등이 돈내기를 하는데, 신봉춘이 돈을 구걸하자, 돈은 주지 않고 말이 불손하다고 하여 양만덕이 목을 졸라 즉사시키고 시체를 저수지에 버렸다.”든가 위원(渭原) 사람 이명중이 “조정화와 돈내기를 하다가 치고받고 싸움을 하여 이튿날 조정화를 죽게 하였다.”와 같은 기사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띕니다. 최한기가 말한 ‘인도(人道)를 폐하고 자
사람이 죽으면 장사를 지내는데 그 절차 중에 노제(路祭)라는 것이 있습니다. 발인할 때 문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견전제(遣奠祭)’ ‘견전’ ‘노전(路奠)’이라고도 합니다. 삼국사기 권 제32에는 4대도제(四大道祭) 장소가 나오는데 “동쪽으로 고리(古里), 남쪽으로 첨병수(幷樹), 서쪽으로 저수(渚樹) 북쪽에는 활병기(活倂岐)에서 지내고, 압구제(壓丘祭)·벽기제(氣祭)도 지낸다.”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이 노제의 한 형식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압구제’는 봉토에 올리는 제사 ‘벽기제’ 벽사 곧 잡귀를 물리치는 제사의식으로 짐작됩니다. 태종실록 10권(1405)년 에 보면, 예조에서 장례와 제사 절차에 관한 법을 올렸는데 “상사(喪事)는 집안의 넉넉하고 넉넉지 못한 것에 맞게 해야 하는데 지금 대부(大夫)·서인(庶人)들은 재물이 있는 자는 사치를 극진히 하여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구하고, 재물이 없는 자도 세속을 따라서 빌리고 꾸기까지 하니, 심히 성현의 교훈을 남긴 뜻이 아니며 노제의 본뜻은 신구(神柩)를 쉬는 것인데, 망령되게 불배(佛排)를 베푸니, 또한 신명(神明)에게 제사하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다만 백병(白餠)과 과상(菓床)만을 베풀어 신
“서울 생활은 어버이 뜻이 아니요 / 강호에 있자면 왕은을 저버리네 / 문안은 자주 꿈속에 드렸거니와 / 난을 들으니 다시 넋이 빠지누나 (중략) / 자당께선 참으로 탈이 없으신지 / 천지간에 두 줄기 눈물만 흐르네” 이는 고려 말의 위대한 문장가로서 당대에 사회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시고(牧隱詩藁)》제4권에 나오는 시 일부입니다. 예전에 관리들은 짬짬이 고향집 부모님을 그리며 시를 짓고 또 시간이 나면 찾아뵙길 공손히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영달을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보다 뒤에 두기도 했지요. 태조실록 14권(1398)에 보면 제주 판관(濟州判官) 김과(金科)라는 사람은 늙으신 어머니 봉양을 위해 자신의 판관자리를 취소해달라고 임금께 상소하는 기록이 보입니다. “임소(任所)로 가고자 하였으나, 신의 염려되는 것은 신의 어머니가 지금 이미 75세이온데, 늙고 쇠약하여 병석(病席)에 누워 조석으로 생명을 보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신이 이미 3년 동안이나 분묘(墳墓)를 지키고 있어 오랫동안 봉양을 못하였사온데, 지금 또 어머니를 떠나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면 혼정신성(昏定晨省)이 사이가 뜨고
오늘은 24절기의 열네 번째 절기로 입추와 백로 사이에 드는 처서(處署)입니다. 아직 불볕더위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지만 여름이 지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한 것처럼 가을 하늘은 멀지 않았습니다. 낱말 그대로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서 풀이 더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두렁이나 산소의 풀을 깎아 벌초를 합니다. 또 여름 동안 습기에 눅눅해진 옷이나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포쇄도 이 무렵에 하는데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속담처럼 파리 모기의 성화도 줄어갑니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낭군의 애(창자) 끊으려 가져가네.’라고 말한다.” 위는 남도지방에서 처서와
“全州여자의 요리하는 법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맛도 맛이어니와 床배 보는 것이라던지 만드는 번때라던지 모도가 서울의 여자는 갓다가 눈물을 흘리고 湖南線 급행선을 타고 도망질할 것이다.” 위 글은 1926년 창간된 월간문학지 ≪별건곤(別乾坤)≫ 16호에 있는 “팔도여자 살림살이 평판기(八道女子 살님사리評判記)” 일부입니다. 음식에 관한 한 서울 여자가 전주여자를 보면 눈물을 흘리고 호남선 급행열차를 타고 도망질할 것이라며 재미있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팔도여자 살림살이 평판기”에는 경기도 여자부터 시작해 각도 여성들의 특징을 이야기합니다. 그 특징들을 살펴보면 경기도 여자는 “침공(針工)” 곧 바느질을 잘한다고 했으며, 강원도 여자는 나물을 잘한다고 했고, 황해도 여자는 장사를 잘한다고 하지요. 또 경상도 여자는 길쌈을 잘하고, 전라도 여자는 음식을 잘하며, 평안도 여자는 농사를 잘 짓고, 함경도 여자는 시장을 잘 본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충청도 여자는 특색이 없는 것이 특색인데 황간 영동의 여자들은 연시감을 많이 먹어서 두 볼이 퉁퉁하고 온양여자는 온천욕을 많이 하여 살결이 보드랍고 서산여자는 어리굴젓을 많히 먹어 입살이 붉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특
“1958년 5월 8일(적십자의 날)에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병석에 있거나 은퇴한 교사들, 불우한 처지의 은사를 방문하거나 위로한 것을 시초로 스승의 날을 제정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며, 1963년 5월 26일에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J.R.C.)에서 5월 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사은행사를 하였으며, 1965년부터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로 변경하여 각급학교 및 교직단체가 주관이 되어 행사를 실시하여왔다. 스승의 날을 세종대왕 탄신일로 정한 이유는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우리 민족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 뒤 1973년에 정부의 서정쇄신방침에 따라 사은행사를 규제하게 되어 '스승의 날'이 일시 폐지되었으나, 일부 학교에서는 이 날을 계속 기념하였고, 1982년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조성을 위하여 다시 부활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날은 기념식에서 교육에 큰 공헌을 한 교육자들에게 정부에서 훈장수여와 표창, 포상을 하며 수상자에게는 국내외 산업시찰의 기회가 주어진다.” -다음-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은 5월15일이다. 위대한 한글을 만든 우리들의 스승이라 그가 태어난 날을 스승의 날로 했다지만 오늘날 이 내용을
“버선에 모래를 담는 법은 곧 갑옷을 무겁게 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군사를 잘 훈련시키는 자가 군사들에게 철갑(鐵甲)을 겹쳐 입게 하였다가, 전쟁에 임해서는 벗어버리게 하였으니, 또한 몸을 가볍게 하여 용기를 배양하는 방도인 것이다. 근래에 군사들을 점열할 때 각각 초리(草履)·화구(火具)·전대(纏帶)·표자(瓢子)를 지니게 하는 것 또한 좋은 법이다.”라는 기록이 순조실록 11권, 8년(1808) 8월 1일 자에 보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표자가 곧 표주박이지요. 표주박은 음력 8월경 첫서리가 내릴 무렵 조롱박이나 길고 허리가 잘룩한 호리병박을 반으로 타서 끓는 물에 삶은 후 껍질을 말려 만듭니다. 표주박은 세종실록 지리지 충청도편에서 쌀ㆍ콩ㆍ꿀 등과 함께 공물로 바치는 품목에도 들어 있습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표주박은 물을 퍼내는 데 썼다고 쓰여있지요. 그리고 표주박은 술독에 띄워 놓고 술을 떠내거나, 장조랑바가지라 하여 간장독에 띄워 놓고 간장을 떠내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표주박은 전통혼례에서 신랑 신부가 서로 잔을 바꿔 마시는 합환주(合歡酒)를 마시는 데 쓰기도 합니다. 또 조백바가지라 하여 표주박에 장수·화목을 상징하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번지에 있는 세종의 둘째따님 정의공주와 남편 안맹담 묘가 단아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비문을 쓰고 공주의 넷째아들인 안빈세가 글씨를 썼다고 전해지는 “양효 안공 신도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어 있지요. 묘소보다 한 단 아래에 자리 잡은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비석 위에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받든 섬세한 모양이 새겨진 이수를 모두 갖춰 조선시대 신도비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보기 드문 신도비라고 합니다.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년∼1477)는 세종 임금의 8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는데 언니 정소공주가 일찍 죽는 바람에 세종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으며 매우 총명하여 훈민정음 창제 때 세종을 크게 도운 공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여러 대군이 풀지 못한 사투리 문제를 곧 풀어내어 큰 상을 받았다고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전해 내려옵니다. 출가 후에도 공주의 네 아들 이름을 세종이 손수 지어줄 정도로 아버지 세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공주의 둘째아들이 태어났을 때 닭이 뽕나무 위에서 울었다 해서 상계(桑雞)라고 지어주었지요. 공주는 관찰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