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2권, 5년(1423) 10월 8일 기록에는 “환자 한문직(韓文直)이 주방(酒房)을 맡고 있더니, 수박[西瓜]을 도둑질해 쓴 까닭에 곤장 1백 대를 치고 영해로 귀양보냈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수박은 한자말로 “서과(西瓜)”라고 했는데 주방장이 수박 하나를 훔친 죄로 귀양까지 가다니 조선시대에는 수박이 흔한 과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또 세조 19권, 6년(1460) 1월 16일 기록에도 “너희가 비록 각각 술을 올리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 잔을 마시면 너희의 술을 고루 마시는 셈이다.”하고, 친히 먹던 수박[西瓜]을 나누어 좌우의 별운검(別雲劍) 한명회·구치관 등에게 내려 주고, 큰 고기를 좌우의 재추(宰樞)와 야인(野人)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1월 한겨울에도 수박을 먹었다는 이야기인데 저장시설이 있었는지, 남쪽 나라에서 들여왔는지 궁금합니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 때의 잡지 ≪별건곤≫ 제8호에도 수박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은 세계뎍으로 교통이 편하게 된 고로 우리 곳에서 나는 것도 먹을 뿐 아니라 남양(南洋)이나 그 외에 어느 곳에 것이던지 쟈유로 슈입하게 되여서 엄동설한에도 「빠나나」나 「
1926년 11월 1일 창간, 1934년 3월 1일 통권 101호를 끝으로 폐간된 ≪별건곤(別乾坤, 월간문학지)≫에는 별스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1930년 10월 1일에 펴낸 제33호에는 온 나라에 강연하러 다니던 소파 방전환 선생의 글 “연단진화(演壇珍話)”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엔 지방마다 다른 사투리 얘기도 나오지요. “平安北道에 가서 『새장』이라닛가 少年들이 못 알아듯고 갑갑해 하는 눈치인고로 『새색기를 잡아 너어서 길느는 그릇을 여기서는 무어라 하느냐.』고 무르닛가. 『도롱이요』한다. 도롱은 「鳥籠」이란 말이다. 慶尙南道에 갓슬 때는 갓난아기의 오줌 밧어내는 俗稱 기조기를 못 알아듯고 『살두둑이』라 하여야 알아듯는다.” 평안도에서는 새장을 한자말 “조롱(鳥籠)”이 변한 “도롱”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경상도에서는 기저귀를 “살두둑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고 소개하지요. 물론 “살두둑이”는 사전에 오른 말이 아닙니다. 정감있는 사투리들이 모조리 빠진 ≪표준국어대사전≫ 은 맹탕이며 말이 없어짐으로써 문화도 없어져 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남지방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맥이 끊겼던 “꽹말타기(호미씻이)”라는 민속놀이가 있었는데 그 꽹말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 이 시는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금가락지입니다. 얼마나 애타게 그리웠으면 가락지 낄 손가락이 여의었을까요? 그렇게 매창이 그리워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허균의 성수시화에 보면 “유희경이란 자는 천한 노비이다. 그러나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했다.”라고 소개합니다. 유희경은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어린 나이에 홀로 흙을 날라다 장사지내고 3년간 여막살이를 했으며 3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병으로 앓아누운 어머니를 30년간이나 모신 효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여막살이 중에 마침 수락산 선영을 오가던 서경덕의 문인 남언경에 눈에 띄어 주자가례를 배운 뒤 예학(禮學)에 밝아진 그는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때는 으레 초빙되었지요. 미천한 신분이라 관직없이 시를 지으며 지내다가 부안지방에 이르러 명기 매창(1573~1610)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한겨울에 부채 선물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 너는 아직 나이 어리니 어찌 능히 알겠느냐만 / 한밤중 서로 생각에 불이 나게 되면 / 무더운 여름 6월(음력)의 염천보다 더 뜨거우리라.” 위는 조선 전기 문인 임제의 시입니다. 지금이야 선풍기나 에어컨으로 여름을 나지만 옛 사람들은 부채가 여름을 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 부채는 모양 따라 방구부채(둥근부채)와 접부채로 나뉩니다. 먼저 방구부채는 부채살에 비단이나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모양의 부채로 단선 또는 원선이라고도 합니다. 방구부채에는 태극 무늬가 그려진 태극선, 오동잎처럼 생긴 오엽선, 왕의 행차에 쓰이던 파초선, 부채의 모양이 연잎과 같은 연엽선, 부채 바닥을 ‘X’ 모양으로 나누어 위와 아래는 붉은색, 왼쪽은 노란색, 오른쪽은 파란색을 칠하고 가운데는 태극무늬를 넣는 까치선, 공작선 등이 유명하지요. 또 접부채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데, 접어서 쥐고 다니기 간편한 부채라는 뜻의 쥘부채, 거듭 접는다는 의미의 접첩선 등으로 불립니다. 접부채의 종류에는 꼭지를 스님의 머리처럼 동그랗게 만든 부채인 승두선(僧頭扇), 바깥쪽에 마디가 있는 대를 사용한 부채인 죽절선, 부채살도 많
조선시대 선비들에겐 <의관정제(衣冠整齊)>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의관정제란 “격식을 갖추어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옷 매무시를 바르게 하는 것을 뜻하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기본 예의였기에 선비는 모름지기 아무리 더워도 옷을 훌렁훌렁 벗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선비들은 어떻게 여름을 났을까요? 책을 늘 가까이하는 선비들은 평상시엔 솔바람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피서였습니다. 그리곤 가끔 계곡에서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이란 걸 하기도 했지요. 또 양반이면서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김매기를 돕기도 했습니다. 이열치열의 한 가지였지요. 그런가 하면 선비들도 산행을 좋아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자이며 영남학파의 우두머리였던 남명 조식 선생은 1558년 여름날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 여행을 떠났지요. 조식의 산행은 지리산 곳곳의 유적들을 통해 역사 속 인물들을 생각하며, 세금이 무거워 백성이 고통을 받는 현실을 기록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지리산 산행은 자신이 선비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재충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지요. 또 추사 김정희는 7월 뜨거운 여름날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탁본했는데 여름 무더
이등박문이 조선 통감으로 와 있을 때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조선을 문명 된 나라로 만들려면 우리는 먼저 여자와 유아들이 매운 음식을 먹는 것을 금지할 필요가 있으며 (중략) 한국인들의 기억력이 없다는 것과 또 인내하는 기운도 없으며, 성공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업은 용두사미 격으로 끝내버리는 까닭이 대부분 매운 음식을 많이 먹는 데 원인이 있는 것 같음.” 밥맛이 없는 여름날 우리는 풋고추와 고추장 그리고 보리밥만 있으면 그만이지요. 또 보리밥에 여러 가지 나물들을 한데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으면 기가 막힙니다. 이런 말을 들으시는 독자 여러분은 모두 침을 꼴깍 삼키시는 건 아닌지요? 그만큼 우리 겨레는 고추, 고춧가루, 고추장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외국 여행을 하는 한국인들에게 고추장은 필수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거의 모든 음식에서는 고춧가루가 빠지지 않는데 특히 김치에 고춧가루는 젓갈과 더불어 아주 중요한 양념입니다. 고춧가루는 김치에 들어가서 젓산균의 성장을 도와 김치를 맛있게 익도록 하며, 잡균을 억제합니다. 또 고추의 성분 중 "캡사이틴"은 미생물 발육을 억제해 김치의 저장성을 높여주는 것으로
"때는 인조 8년 / 삼수진 사람들은 / 패랭이 심어 / 목숨을 부지했다네 / 땅은 거칠고 / 산은 험한 곳 / 관리도 오지 않는 땅 / 촉촉히 나리는 곡우비에도 / 벼 심을 논배미 없는 / 삼수진 사람들은 패랭이 심어 / 목숨 연명했다네" 고야 님의 “패랭이”란 시입니다. 패랭이꽃은 석죽화(石竹花)·대란(大蘭)·산구맥(山瞿麥), 구맥(瞿麥)이라고도 불리는 토종 들꽃으로 낮은 지대의 건조한 곳이나 냇가 모래땅 등 척박한 땅에서 자랍니다. 꽃은 6∼8월에 피고 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 분홍빛이지요. 꽃을 뒤집으면 옛날에 역졸, 부보상들이 쓰던 패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석죽화(石竹花)라는 이름은 바위틈 같은 메마른 곳에서도 잘 자라고, 대나무처럼 줄기에 마디가 있어서 붙었습니다. 인조실록 23권(1630)에 보면 “삼수진은 두 강 사이에 끼어 있는데 지대가 높고 척박하며 기후는 추워서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성 안의 민가가 7,8가구도 못 되며, 다만 구맥(패랭이꽃)을 심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패랭이꽃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처럼 꽃꽂이용으로 팔아 먹고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며 교맥(蕎麥)이라 해서 메밀처럼 식용으로 키운
“보릿고개”란 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는 지금도 여전히 굶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50~60년대 까지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며칠씩 굶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엔 “보릿고개”라는 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했었습니다. 그러면 그 “보릿고개”란 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조선왕조실록≫에도 보릿고개를 뜻하는 말이 나오는데 물론 한자로 쓰여있지요. 맨 먼저 보이는 것은 세조실록 11권 4년(1458) 2월 7일의 춘기(春饑)인데 “봄의 가난한 때”라는 뜻입니다. 또 명종 11권, 6년(1551) 1월 18일의 “궁춘(窮春)”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궁춘‘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밖에 명종 32권, 21년(1566) 2월 23일의 “춘빈(春貧)”, 현종 5권, 3년(1662) 3월 14일의 “춘기(春飢)”, 숙종 8권, 5년(1679) 3월 6일의 “춘기근(春飢饉)”, 숙종 58권, 42년(1716) 8월 8일의 "춘궁(春窮)", 고종 3권, 3년(1866) 5년) 3월 26일의 "궁절(窮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특히 “보릿고개”라는 이름으로 딱 들어맞는 “맥령(麥嶺)"은 정조 12권, 5년(1781
오늘은 우리 겨레가 명절로 즐겼던 음력 6월 15일 유 두(流頭)입니다. 유 두는 유둣날이라고도 하는데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의 준말이지요. 이것은 신라 때부터 있었던 풍속인데 가장 원기가 왕성한 곳으로 보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면 액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특히 식구나 이웃과 같이 머리를 감고, 술을 돌려 마심으로써 공동체임을 확인했습니다. 유 두의 시절음식은 햇밀가루로 국수, 떡을 마련하고 새로 익은 참외, 수박으로 조상신이나 땅의 신 등에게 유 두제사(유 두천신)를 지낸 후 나누어 먹습니다. 이렇게 하면 악귀를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유 두날엔 참외꽃이 떨어지고, 참외가 열릴 무렵 국수를 삶아 참외밭에 가서 참외덩쿨에 국수가락을 걸치면서 “외가 주렁주렁 내리소.”하고 비는 외제를 지냅니다. 유 두일에 해먹는 음식으론 유 두국수가 있었는데 햇밀로 국수를 눌러 닭국물에 말아 먹는 것입니다. 그밖에 구절판, 상화병, 밀쌈 ,편수, 미만두, 수단, 건단, 연병이란 것도 먹었지요. 유 두날은 삼월삼짇날, 칠월칠석, 구월중양절과 함께 우리 겨레의 명
“지상엔 온통 더위 천지 / 광한전(달나라에 있다는 궁전) 월궁으로 달아날 재주 없으니 / 설악산 폭포 생각나고 / 풍혈 있는 빙산이 그리워라” 이 내용은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이 시문을 모아 펴낸 ≪동문선(東文選)≫이란 책에 나오는 시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두 번째로 오는 “대서(大暑)”이지요. 한 해 가운데 가장 더운 때라고 하여 대서(大暑)라 불렀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대단하고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지기도 하는데 한차례 소나기가 내리면 잠시 더위를 식히기도 하지만 다시 뙤약볕이 더위를 먹게 합니다. 이때 뙤약볕에서 땀 흘려 농사짓는 농부들은 솔개가 드리울 정도의 작은 그림자 솔개그늘이 정말 반갑기만 하지요. 소나기가 온 뒤 마당에 미꾸라지들이 떨어져 버둥거립니다. 빗줄기 타고 하늘로 치솟았다가 땅으로 떨어진 것인데 추어탕을 해먹으면 기운이 난다고 합니다. 또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 대신 잉어(혹은 자라)와 오골계로 끓인 “용봉탕”, 검정깨로 만든 깻국탕인 “임자수탕”, 보신탕, 삼계탕 등을 보양식으로 즐겨 먹었습니다. 무더위엔 불쾌지수가 높아질뿐더러 자꾸 더위를 피하고만 싶은데 9세기 동산양개 선사(禪師)의 ‘너 자신이 더위가 되어라.’라는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