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특히 장마철에는 습기가 많아 곰팡이가 스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면 이부자리며 옷가지들을 내 말리느라 집 안팎은 온통 빨래로 덮여 있습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조선왕조실록은 통풍이 잘 되는 사고(史庫)에 보관이 되어 안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의 관리에는 세심한 주의가 있었습니다. 태종실록 23권(1412) 에는 “포쇄별감(曝曬別監)으로 하여금 찾아내어 싸 가지고 와서 전악서(典樂署)의 악보(樂譜)를 참고하게 하소서.”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여기서 ‘포쇄별감’이란 사고(史庫)에서 서적을 점검하여 축축한 책은 바람을 쐬거나 햇볕에 말리던 일을 맡아보던 별감(別監)을 말합니다. 아예 별감을 두어 관리 했던 것이지요. 별감에서 실제 책 말리는 일은 누가 했을까요? 아랫것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중종실록 36권(1519)에는 “외방 사고(史庫)의 거풍(擧風)하는 일을 외방의 겸춘추(謙春秋)로 하게 하려 하시나 외방 겸 춘추는 사관(史官)이 아닙니다. 사국(史局) 일에 이런 발단을 열어놓으면 사국 일이 가벼워지게 될까 싶습니다.”라는 좀 특이한 상소가 보입니다. 책을 말리는 것쯤은 아무나 할 것
“밤한울 구만리엔 은하수가 흘은다오 / 구비치는 강가에는 남녀 두 별 있엇다오 / 사랑에 타는 두 별 밤과 낯을 몰으것다 / 한울이 성이 나서 별하나를 쪼치시다 / 물건너 한편바다 떠러저 사는 두 별 / 秋夜長 밤이길다 견듸기 어려워라 / 칠석날 하로만을 청드러 만나보니 / 원수의 닭의소리 지새는날 재촉하네 / 리별이 어려워라 진정으로 난감하다 / 해마다 눈물흘러 흔하수만 보태네” 이는 1934년 11월에 나온 <삼천리> 잡지에 실린 월탄 박종화의 <견우직녀> 시입니다. ‘하늘이 성이 나서 별 하나를 쫓으시다’라는 말이 재미납니다. 견우직녀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전설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와 관련된 말도 많습니다. 칠석 전날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타고 갈 수레를 씻는 '세거우(洗車雨)'라고 하고, 칠석 당일에 내리면 만나서 기뻐 흘린 눈물의 비라고 하며, 다음 날 새벽에 내리면 헤어짐의 슬픔 때문에 '쇄루우(灑淚雨)'가 내린다고 합니다. 또 칠석에는 까마귀와 까치가 오작교를 만들려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또 이날은 유난히 부슬비가 많이 내립니다. 칠월칠석 아낙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거나 우
“세조가 또 일찍이 피리[笛]를 부니 자리에 있던 모든 종친(宗親)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학(鶴)이 날아와 뜰 가운데에서 춤을 추니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의 나이가 어렸는데도 이를 보고 홀연히 일어나 학과 마주 서서 춤을 추었다.” 세조실록 1권 총서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세조의 악기 연주 실력은 세종이 칭찬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하지요. 여기서 등장하는 피리는 속이 빈 대롱에 구멍을 뚫고 입으로 불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모두 이르는데 향피리·당피리·세피리 등이 있습니다. 피리는 대나무를 얇게 깎아 만든 것으로 혀(reed)를 꽂아 부는 악기입니다. 한국의 전통악기 가운데 이렇듯 혀가 있는 관악기는 피리와 태평소뿐이지요. 피리는 음역이 넓지는 않지만 소리가 커서 주선율의 연주를 담당하며 무용 반주로 쓰이는 삼현육각 편성에서는 반드시 쌍피리로 편성됩니다. 피리는 매우 오래된 악기로 《삼국유사》에 보면 통일신라 때 거문고와 피리의 두 가지 신기한 악기를 국가의 제천고(祭天庫)에 비장(秘藏)하여 왔다는 기록이 있지요. 또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는 피리가 삼한시대부터 방울[鈴]·북[鼓]·거문고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대금, 태평소 등 다른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김천 명물 과하주(過夏酒)는 여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마셔서 여름을 건강하게 날 수 있다는 술입니다. 과하주는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산림경제(山林經濟)》,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등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발효주는 도수가 낮은 까닭으로 여름철 변질하기 쉽기에 과하주는 발효주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식 소주를 섞어 일종의 혼양주를 마시게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 과하주가 폭탄주의 원조가 아닌지 모릅니다. 시내를 내려다보는 김천시 남산 꼭대기 부근에 오래된 우물 과하천(過夏泉)이 있는데 이 우물은 경북 무형문화재 제22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곳을 지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우물물을 맛보고 중국 금릉의 과하천 물맛과 같다고 칭찬한 뒤 과하천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물로 과하주를 빚지요. 또한, 1921년 잡지 《개벽 제18호》에 권덕규 씨의 ‘경주행’이란 수필문이 있는데 “過夏酒 조키로 有名한 金泉을 거쳐 한 停車場 두 정거장 세이다가 大邱에 나리기는 해가 기울어서라”라는 글에 김천의 과하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더운 여름 땀 흘리고 난 어스름 저녁 느티나무 아래서 이웃과
하늘을 향해 늠름하게 뻗은 가지 사이로 푸른 구름이 흘러갑니다. 천 년의 세월을 말없이 지켜온 이 은행나무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546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울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되어 도봉구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지요. 은행나무 앞에는 조선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 무덤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은행나무는 아들을 점지해주는 용한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절박한 마음으로 어스름 새벽에 은행나무 밑에서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피눈물을 흘리며 빌던 아낙의 꿈속에 곤룡포를 입고 금관을 쓴 임금이 나타나 아들을 낳도록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돌아온 뒤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전통사회에서 신목(神木)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잘 나타내주는 이야기로 요즈음도 정월대보름이면 해마다 경로잔치 겸 나무에 대한 제사를 올린다고 합니다. 이 나무 나이는 800살에서 1,000살 전후로 짐작되며, 높이 24m, 가슴높이의 둘레 9.9m로 주변의 고층 아파트 키와 맞먹는 크기로 예부터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마다 이 나무에 불이 났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기 한 해 전에도 나무에 불이 나서 소방차가 불을 끈 적이 있다고 전합니다. 그간 건강하던 은행나무는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에 보면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와를 날렸다. 서난전(瑞蘭殿)의 발이 날려간 곳을 모르며, 임해문(臨海門)과 인화문(仁化門) 두 문이 무너졌다.”라는 기록이 보여 이미 신라 때에도 발은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태종 22권, 11년(1411) 11월 1일 기록에는 "궁중에 모두 갈대 발[葦簾]을 쓰고 또 선 두르는 것을 없애라고 명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새 대궐의 발을 베[布]를 써서 선을 꾸몄으므로 임금이 노하여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라는 기록도 나옵니다. 이어서 숙종 4권, 1년(1675) 10월 20일) 기록에는 “동양 옹주(東陽翁主)의 집이 얕아서 이웃집에서 보이는 곳에 있었으므로, 옹주가 그 집을 사기를 청하자, 선묘께서 특별히 갈대 발[葦簾]을 내려 주어서 가리도록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 많은 임금이 검소한 자세로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름철 한옥에는 꼭 발을 걸어두었습니다. 발은 직접 들어오는 햇볕을 가리기도 하고 안쪽 풍경을 가리기도 했으며 문을 활짝 열어 둘 때보다 발을 침으로써 시원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발의 재료로는 대나무를 곱게 갈라 만든
어제는 무더위의 막바지를 뜻하는 말복(末伏)이었습니다. 복날 우리 겨레는 예부터 개고기를 많이 먹었는데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먼저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사기’에 이르기를 진덕공 2년에 처음으로 삼복제사를 지냈는데, 4대문 안에서는 개를 잡아 해충으로 농작물이 입는 피해를 방지했다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전합니다.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 만큼 개고기를 일찍부터 식용으로 썼음을 말해줍니다. 또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요리책인 규곤시의방에는 개장, 개장국 누르미, 개장찜, 누런개 삶는 법, 개장 고는 법 등 우리나라의 고유한 개고기 요리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17세기 중엽에 정부인 안동 장씨가 쓴 ≪음식디미방≫에도 “개장”, “개장꼬치누루미”, “개장국누루미”, “개장찜”, “누렁개 삶는 법”, “개장 고는 법” 등이 나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상차림에 구증(狗蒸)이 올랐다는 것을 보면, 개고기는 임금님의 수라상에도 올라가는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농가월령가에는 며느리가 친정에 갈 때 개를 삶아 건져 가는 풍습이 나옵니다. 조선시대엔
내일은 가을의 길목 입추입니다. 밤새 열대야에 고생을 하고 있지만 하늘 저편에서는 가을소식이 다가옵니다. 입추(立秋)는 가을절기가 시작되는 날이며, 24절기의 열세 번째로 말복 앞에 찾아오지요. 생각 같아서는 말복이 오고 입추가 올 것 같지만 실제는 입추가 먼저 옵니다. 주역에서 보면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을, 여자라고 해서 음기만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조금씩은 겹쳐 있다고 하는데 계절도 마찬가지지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면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이 역할을 입추와 말복이 하고 있지요. 입추부터는 김장용 무, 배추를 심기도 하지만 농촌도 한가해지기 시작하니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고 합니다. 벼가 한창 익어 가는 계절인 입추 무렵 비가 닷새 동안만 계속돼도 날이 개기를 비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지요. 태종실록 36권(1418) 8월 7일 기록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백곡(百穀)이 결실할 때인 지금 오랫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리니, 8일에 기청제를 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청제를 하는 동안에는 성안으로 통하는 물길을 막고, 성안의 모든 샘물을 덮으며, 물을 쓰면 안 되는 것은 물론 소변을 보아서도 안 되었습니
경기민요(京畿民謠)는 서울·경기 지방에 전승되어 오는 민요인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최근 열린 “황제, 희문을 듣다” 공연은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의 법고창신 정신을 제대로 살린 근래에 보기 드문 훌륭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공연을 지켜본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은 “이렇게 젊은 소리꾼이 새롭게 색다른 무대를 꾸민 것을 크게 칭찬 해마지 않는다. 특히 청중을 황제로 해서 경기소리의 격을 한층 높인 것도 칭찬해주고 싶으며, 노랫가락을 시조 가락에 올려 부른 시도도 정말 좋았다. 또 청중과의 교감을 익살스러운 소재를 선택해서 재미나게 청중과 교감하려는 노력도 수준급이어서 크게 손뼉을 쳐준다.”라고 말했지요. 공연 중 “사람-휘몰아가는 잡스런 노래 맹꽁이”, “놀이-개 넋두리/각색 처녀장사치 흉내”는 이희문 특유의 동작과 표정 그리고 뛰어난 소리로 관객을 꼼짝 못하게 한 수작이었습니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이희문으로 채우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간 그의 예술성은 가히 천부적이라는 평이었습니다. 여기에 경기소리와 시조창을
“앞내에 물이 주니 / 천렵을 하여 보세. 해 길고 잔풍하니 / 오늘 놀이 잘되겠다. 벽계수 백사장을 / 굽이굽이 찾아가니 수단화(水丹花) 늦은 꽃은 / 봄빛이 남았구나. 촉고를 둘러치고 / 은린옥척(銀鱗玉尺) 후려내어 반석에 노구 걸고 / 솟구쳐 끓여내니 팔진미 오후청(五候鯖)을 / 이 맛과 바꿀소냐.” 이 내용은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4월령〉에 있는 천렵을 소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천렵(川獵)을 “주로 여름철에 남자들이 냇물이나 강가에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는 것”쯤으로 알고 있는데 위 농가월령가 4월령에서 볼 수 있듯이 여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일반 백성만이 즐기던 것은 아니었지요. 태종실록 7년(1407)에 보면 임금은 완산 부윤(完山府尹)에게 전지를 내려 회안 대군(懷安大君)의 천렵 등을 허락하게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왕실에서도 천렵을 즐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물고기만 잡았던 것도 아닙니다. 1929년 8월 1일자 별건곤 제22호에 김진구씨의 팔도 기행문을 보면 “安州名物로는 도야지갈비 불고기이지만 그것 보담도 「三伏中의 닭 川獵』일 것이다.”라는 글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