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달 미국 여행길, 요세미티 공원 근처 어느 펜션의 앞 마당에 앉아있는데 조금 괴상하게 생긴 나뭇잎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 옆 미루나무는 우리나라 것과 같은데 이 나무는 뭐지? 단풍나무 종류인가? 전에 살던 문래동 아파트단지에도 비슷한 잎 모양의 나무가 있던데... 단풍나무 종류가 아닐까, 하고 단풍으로 검색해 보니 노르웨이단풍이라는 것이 비슷하다. 그런데 다시 보니 잎 모양이 달라도 매우 다르다. 그러면 뭘까? 궁금하던 차에 펜션에 비치된 컵에다 차를 따라 마시다가 옆을 보니 거기에 답이 있었다. 오크(Oak)나무였다. 오크통을 만드는 나무. 옛날 70년대에 많이 듣던 팝송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의 오크나무. 이 나무의 잎이 이렇게 생겼고 이게 그 나무구나. 원 나도 참. 그렇게 이 오크나무란 이름을 긴 세월 듣고 지났는데 정작 그 나무와 나뭇잎을 나이 70이 넘은 이 가을에 미국 산골에 와서야 알게 되다니... 탄식과 자조를 겸한 한숨을 내쉬며 집 주위를 돌아보니 집집마다 입구 쪽에 이 나무가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 한국인들 시골집 주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운명이 때로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좋은 벗이 해주는 위로는 천군만마보다 더 힘이 날 때가 있다. 이덕무와 박제가도 그랬다. 서얼로 태어나 가진 재주를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울분을 삼켜야 했던 그들은, 서로가 가진 슬픔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상대의 귀한 재능을 알아봐 주고 독려해 주며, 어려운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갔다. 강민경이 쓴 이 책, 《운명아, 덤벼라!》는 신분이 주는 한계에 힘없이 굴복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한 이덕무와 박제가의 우정을 담았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덤벼라!’는 자세로 맞서 분투할 때, 견고할 것 같던 운명도 슬쩍 길을 비켜주었다. 두 사람은 외적으로는 매우 달랐다. 우선 이덕무는 박제가보다 아홉 살이 많았다. 이덕무는 큰 키에 마른 편이고,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졌다. 이덕무는 유순한 성격이었고, 박제가는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p.28) 내 삶에 대해 감히 누가 이러쿵저러쿵할 수 있단 말입니까? 태어나기 전부터 삶이 정해져 있다고요? 내 힘으로 삶을 어찌할 수 없다고요? 운명이 나를 들었다 놨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나라고 그깟 운명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우리 겨레가 한문을 끌어다 쓰면서 우리를 잃어버리고 중국을 우러르며 굴러떨어진 역사를 ‘중세 보편주의’에 어우러진 문명의 전환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중국의 한문 문화에 싸잡혀 들어간 것이 중세 동아시아 보편주의에 어우러진 발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문은 그런 중세 보편주의를 이루어 내게 해 준 고마운 도구였다고 한다. 이런 소리는 이른바 중화주의자들이 셈판을 두들겨 꿍꿍이속을 감추고 만들어 낸 소리인데, 우리나라 지식인들까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중세 보편주의’란 서유럽 역사에서 끌어온 말이다. 이 말은 르네상스 이전에 모든 유럽 사람이 라틴말을 쓰면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던 시절[중세], 가톨릭[보편]교회의 가르침[주의]을 뜻하는 말이다. 라틴말이 유럽에 두루 쓰인 것과 한문이 동아시아에 두루 쓰인 것이 닮았다고 섣불리 ‘중세 보편주의’를 끌어다 붙였겠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다. 우선 동아시아에는 고대를 받아서 근대로 넘겨주는 ‘중세’란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기원전에 만들어진 정치ㆍ사회 체제가 19세기 말까지 거의 그대로 되풀이되었을 뿐 아니라, 한문의 위세 또한 19세기 말까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구는 태양 주위를 쉬지 않고 공전하였다. 김 과장이 나목에서 미스 나를 만난 지도 넉 달이 지나 10월이 되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퇴근 무렵, 김 과장은 갑자기 나목과 아가씨가 생각났다. 그사이 두어 번 술집에 갈 기회는 있었지만 김 과장은 일부러 나목은 피하였다. 어떻게 보면 순수했던 짧은 시간의 추억이 더럽혀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사무실 창밖으로 비를 맞으며 뚝뚝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려니까 아가씨의 귀여운 얼굴을 보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솟아났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해도 아가씨의 모습은 계속 어른거렸다. 내가 왜 이럴까?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혼자 가기에는 아무래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김 과장은 박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길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박 과장도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박 과장은 선뜻 좋다고 대답했다. 둘은 늘 가던 돼지갈비집에 먼저 들렸다. 소주잔을 비우며 김 과장이 물었다. “박 과장님, 왜 사람들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할까요?” “글쎄요, 김 과장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즉위년(1418) 8월 11일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기를 “아아, ...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하였다.” (《세종실록》 즉위년 8/11,1418) ‘시인발정(施仁發政)’은 중국 고사에서 먼저 ‘발정시인(發政施仁)’으로 나왔다. 양혜왕 장구 상’에 ‘今王發政施仁・使天下仕者皆欲立於王之朝・耕者皆欲耕於王之野・商賈皆欲藏於王之市・行旅皆欲出於王之塗・天下之欲疾其君者皆欲赴愬於王・其如是孰能禦之’로 되어 있다. “지금 임금께서 정사를 하실 때 인정을 베푸시는 것은 천하에서 벼슬하려는 사람이 모두 임금의 벼슬에 오르기를 바라게 하고, 밭을 가는 사람이 모두 임금의 들판에서 밭을 갈기를 바라게 하고, 장사하는 사람이 모두 임금의 시장에서 물건을 두기를 바라게 하고, 여행하는 사람이 모두 임금의 길에 나오기를 바라게 하고, 천하에서 자기 임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모두 임금께 나아가 하소연하기를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그러면서, 파는 것을 상(商), 생활하면서 파는 것을 고(賈)라고 하고, 정사를 할 때 인정을 베푸는 것은 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한 달 예정으로 미국 LA에 건너온 지 열흘이 되는 날이다. 폴게티 미술관을 찾은 이야기를 쓴다. 2023년 10월 17일 화요일이다. _________<<<<<<<<<<_______ 인생은 짧고 예술은 남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얻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모든 일이 그럴 수 있다면 그만큼 인식의 깊이가 깊어지고 오류나 실패의 확률도 줄어들 것이다. 그 점에서 올해 나는 특별한 해를 경험하고 있다. 지난 6월에 일본의 한 시골동네를 40년 만에 다시 가서 그 동네에 얽힌 과거의 역사와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하반기에는 10년 만에 다시 미국 LA에 와서 이곳의 훌륭한 미술관을 다시 가 볼 행운이 온 것이다. 그 미술관은 미국 LA북쪽 베벌리힐스(속칭 비벌리 힐즈)에 있는 폴 게티 미술관이다. 폴 게티(Paul Getty 1892~ 1976)는 미국의 석유사업가로 1913년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와 함께 석유사업을 시작해 유전을 사들인 것이 대박을 쳐서 1920년대에 게티 오일이란 회사로 엄청난 부호가 된다. 그는 곧 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자선당! ‘착한 성품을 기른다’라는 뜻의 자선당은 세종이 큰아들인 세자 ‘향’에게 선물한 세자궁이었다. 경복궁 동쪽에 있어 ‘동궁’으로 불렸던 이곳에서 문종은 자랐다. 그러나 자선당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궁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며 궁궐이 불탔고, 이때 자선당 또한 주춧돌과 기단석만 남은 채 모조리 불타버린 까닭이다. 우리아가 쓴 이 책, 《돌아온 자선당 주춧돌》은 세종이 세자를 위해 지은 ‘자선당’에 쓰였던 주춧돌이, 임진왜란 때 화재에 불타고 고종 때 다시 지어졌다가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일본에 실려 가는 수모를 당하는 신산한 세월을 겪은 끝에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자선당이 다시 지어진 것은 수백 년이 지나 흥선대원군 때가 되어서였다. 자선당이 완공되며 고종의 아들인 순종이 자선당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 시기도 잠시, 결국 순종은 일본의 위협에 자선당을 지키지 못하고 창덕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p.35)자선당 터로 흥선대원군이 신하들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자선당과 비현각을 지어라. 세자궁은 조선의 미래이다. 주변의 강한 나라들이 조선을 넘보려고 하지만 내가 있는 한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한문을 끌어들이지 않았던 시절, 우리 겨레는 땅덩이 위에서도 손꼽힐 만큼 앞선 문화를 일으키며 살았다. 비록 글자가 온전하지 못하여 경험을 쌓고 가르치는 일이 엉성했을지라도, 입말로 위아래 막힘없이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하나로 어우러져 살기 좋은 세상을 일구어 이웃한 중국과 일본을 도우며 살았다. 이런 사실이 모두 우리나라 고고학의 발전에 발맞추어 알려진 터라 기껏 지난 삼사십 년 사이에 밝혀졌다.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로만 보아도, 우리 겨레는 구석기 시대에 이미 대동강 언저리(검은모루, 60만 년 전)와 한탄강 언저리(전곡리, 26~7만 년 전)와 금강 언저리(석장리, 4~5만 년 전)에서 앞선 문화를 일구며 살았다. 무엇보다도 구석기 말엽인 일만 삼천 년 전에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드러났다. 그것은 이제까지 세상에서 맨 먼저 벼농사를 지었다고 알려진 중국 양자강 언저리의 그것보다 삼천 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게다가 청원군 두루봉 동굴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꽃을 바치며 장례를 치른 신앙생활의 자취까지 드러나, 구석기 시대에 이미 높은 문화를 누리며 살았던 사실도 밝혀졌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아가씨는 왠지 이 남자가 좋아졌다. 술자리에서 별별 남자를 다 만났으나 이 남자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가씨가 담배를 한 대 꺼내어 입에 물었다. 김 과장은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 많이 피나?” “하루에 한 갑 정도요.” “담배를 끊지 그래. 나중에 시집가 임신하면 애기에게도 나쁘고.” “잘 안 끊어져요.” “약국에 금연 껌이 나왔다던데, 한번 먹어 봐. 내가 다음에 올 때 사올게. 그때까지 아가씨가 이 집에 있다면.” “언제 오실 거에요?” “글쎄, 돈 펑펑 쓸 수 있는 사업가도 아니고 봉급쟁이가 이런 델 자주 올 수가 있나. 가을이 되어 은행나무가 노랗게 변하기 전에 한 번 오지.” “꼭 한번 오세요.” 이제는 조금 친해진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 법이다. 밤 12시를 훌쩍 넘어 밤이 깊어지자, 김 과장은 은근히 지갑이 걱정되었다. 그저 아가씨가 시키자는 대로 마주앙과 안주를 계속 주문했는데 술값이 얼마가 나올지 감이 안 잡혔다. 이윽고 계산서가 나왔다. 아뿔싸, 낭패였다. 원고료로 받은 5만 원을 훨씬 넘었다. 지갑을 꺼내어 원고료 5만 원에다가 아내에게서 “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일본의 역사 중심이었던 교토나 도쿄에서 한참 떨어진, 거의 일본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한 미술관이 일본 으뜸 정원이라는 평가를 20년째 받아오고 있는 것을 아는 분들이 많지는 않겠는데, 필자는 이 미술관을 두 번이나 방문하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지난 6월 중순 10년 만에 다시 방문한 이 ‘아다치미술관’이란 곳, 관람객들과 함께 복도를 따라가며 멋진 정원을 내다보던 중에 한 건물 입구 벽에 낯익은 사인이 눈에 들어오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魯山人’이라는 한자 사인이었다.‘ 그것은 일본 근대의 유명한 도예가인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 魯山人, 1883~1959)의 탄생 140돌을 맞아 마련한 특별전시실 입구였다. 마침 폐막 열흘 전이었다. 운 좋게 전시장을 발견하고 전시된 도자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동백꽃사발(椿碗)도 있었다. 10년 전에는 이런 시설이 없었는데, 3년 전에 새로 전시실을 마련하고 해마다 그의 작품과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 魯山人, 1883~1959)은 근대 일본의 전설적인 예인(藝人)이다. 도예가인 동시에 서예가, 전각가이며 무엇보다도 음식의 격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