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밤 젖은 게 아니라 지니고 있는 거다 그믐밤은 집안인 걸 무엇 그리 바쁜가 온밤을 내리고 내려 땅끝을 간다간다. 누구나 어두운 밤은 싫어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믐달은 보름달을 넘겨 주는 보배다. 따라서 삶에서 밝지 않는 때와 마주치면 비관하지 말고 그믐날 밤을 몸소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 낙천적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잘못은 못 탄 몸 아쉬운 건 휘파람 하늘 땅 가는 바람 이네는 어디 있고 예순을 다 바쳤어도 모자람은 남는구나 제 힘이 아니고 뜻밖에 행운을 얻어 잘 됐을 때 사람은 천하를 쥔 것처럼 독판친다. 그때일수록 겸손하게 더 겸손하게 되돌아 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인생이란 그런 것일 거다.
지금은 흙탕 속에 갇히고 있거니만 폭풍이 미쳐 올 제 운암(雲岩)에 톺아 올라 강토(疆土)의 동서남북을 호령치고 말거다 * 톺아 : 톱다 = 가파른 곳을 오르거나 내리려고 발걸음을 매우 힘들게 더듬다.
불타듯 노을인 듯 온산이 다홍이요 멀고 먼 뫼 사이 는개는 너울너울 젊을 때 못 이룬 뜻이 맘 가람서 노 젓는다 * 남산 : 교토 아라시야마(嵐山)는 가을 단풍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 는개 :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아기손 나무 가랑잎은 늙었는데 몸내는 아가씨니 찾은 사람 발박아 님 사랑 돋우네 타거라 활활 타고서 마쪽 겨레 아뢰어라 *아기손 나무 : 단풍 *마쪽 : 남쪽
남나라 불여름(2) 어제는 아저씨 다음은 누가 갈지 간 넋은 갈 곳 없이 온밤을 흐느끼니 뒤와 마 왜 이렇게도 멀고 먼가? * 뒤 : 북쪽 * 마 : 남쪽 동포 모여 사는 곳에서 어제는 삼촌 돌아가셨으니 내일은 또 누가 갈지. 간 혼은 되돌아갈 고향도 없어 헤매어 줄곧 운다. 땅 이은 북한과 한국이 왜 이렇게도 멀고 마는가?
남나라 불여름(1) 밭나라 서른 해니 아들아이 한창이니 남나라 해바라기 풀 막힌 자리라 키워서 곱게 키워서 한 나라 보고파 * 불여름 : 염천 * 밭나라 : 해외, 바깥나라 * 아들아이 : 손자 * 한창 : 청춘 * 풀 : 기운 * 한 나라 : 통일조국 . 모국을 멀리 떠나 30년을 살면 손자도 청춘이다. 남나라의 해바라기는 피었건만 재일동포는 기를 펴지 못한다. 그것은 모국이 둘로 쪼개지고 있기 때문이니 통일만 되면 다 행복하게 사니 통일일꾼을 곱게 키워내자. . ▶ 김리박 시인 세미나 기사 "망국노,망향자, 재일 교포문학의 현주소는 이것”바로가기
아침 놀 물든 새쪽 저녁녘엔 비가 올지 비 오면 고장 돋아 아비는 술을 하고 어미는 온 밤새우며 어버이를 생각하니. * 새쪽 ; 동쪽 재일동포는 격렬한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국도 오랫동안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니 고향이 그리워 비가 와도 눈물이고 개여도 눈물이었다. 힘 잃은 아버지는 술로 스스로 달래었고 어머니는 부모를 생각하여 스스로 외로움을 달랬다.
잠자는 갓난아기 오는 날은 갈불잎 언제면 맛보겠나 시원한 고장 가을 남땅의 골 가을이야 믿고장을 못 우기리. * 갈불잎 ; 단풍잎 * 골 ; 만(천의 열배) 가을이 깊어가는 밤, 새근새근 잠자는 갓난이는 무슨 꿈을 꿀까? 아마도 곱게 타듯 물든 단풍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일본의 가을이야말로 맑고 아름답다고 우기지만 우리 조국의 가을은 그보다 만 배나 더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21. 불여름(2) 오르며 뒷쪽 찾고 내리며 마쪽 찾고 숨 사이 캄캄길을 얼빠진 사람이냥 아히유 미리내 아래 잠 못 이룰 나그네. * 뒤쪽 : 북쪽, 마쪽 : 남쪽 * 캄캄길 : 암흑길, 미리내 : 은하수 왜정 때 나라와 땅 빼앗긴 우리 한겨레는 목숨을 이으려고 북에 가고 또 만주 땅도 찾았다가 별수가 없어 또 남쪽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흔했다.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한겨레는 올 데 갈 데 없는 귀신과도 같았다. 그러나 은하수를 우러러보면서 고향을 생각하고 되찾아야 할 조국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