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크리스마스트리로 쓰이는 나무의 95% 이상이 '구상나무'인데 그 원산지가 제주도임을 아시나요?. 이 나무는 오직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무등산 같은 곳의 해발 1,000m 이상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학명은 “Abies koreana”지요. 분비나무 계통을 뜻하는 “Abies”에 한국 토종이란 뜻의 “koreana”가 붙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이는 영국인 식물학자 어니스트 헨리 윌슨(1876~1930)이지요. 왕벚나무 표본의 첫 채집자인 포리는 1901년부터 수십 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 만여 점의 식물종을 채집했는데 특히 한라산에서 '구상나무'를 채집한 뒤 그저 평범한 “분비나무”로 생각하여 미국 하바드대 아널드식물원의 식물분류학자인 윌슨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윌슨은 이 표본이 무엇인가 다른 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제주에 와 다시 채집해 연구한 끝에 다른 분비나무와 전혀 다른 지구상에
“설피를 신고 길을 나섰다. 양발을 한껏 벌린 채 설금 설금 발을 떼놓는다. 용케도 한길이나 쌓인 눈이 나를 잘 받쳐준다. 여기선 전천후 사륜구동 차가 필요 없다. 현대 문명의 이기들이 무용지물이다. 엄청나게 쌓인 눈길엔 오로지 설피.” - 이정구 수필 "설피" 가운데- 얼마 전 뉴스에는 “설상마라톤대회” 소식이 있었지요. 설상 곧 눈 위에서 마라톤을 한다는 말인데 알고 보니 설피를 신고 크로스컨트리코스(스키마라톤)를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선착순으로 400명을 참가시키는데 참가비 1만 원을 내면 2만 원 상당의 설피를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설피(雪皮)는 겨울철 눈이 많이 내리는 두메산골에서 눈밭을 걸을 때 신발에 덧대 신던 일종의 덧신인데 살피라고도 합니다. 설피는 눈과 닿는 면적을 넓혀 이것을 신으면 쌓인 눈이 깊어도 빠지지 않고 비탈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지요. 대체로 길이 30~35cm, 폭 20~25cm 크기이며 언뜻 보면 테니스라켓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설피는 10년쯤 자란 다래덤불이나 노간주나무 또는 물푸레나무로 만듭니다. 산골 두메마을에 사는
“입춘(立春) 때 붙이는 글은 매양 한 수의 시(詩)로써 문에다 붙이는 것은 불가하다. 문은 하나가 아니며 시를 짓는 자도 많으니, 지금 이후로는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각각 지어서 붙이게 하라.” 이는 성종실록 13년(1482) 1월 9일 치 기록으로 예전에는 입춘을 맞아 시를 짓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입춘 때 문신들은 어떤 시를 지었을까요? 묵은 병은 이미 겨울을 따라 사라지고 / 舊疾巳隨殘盡 경사로운 징조는 이른 봄을 좇아 생겨나네 / 休祥遠早春生 거울같이 맑은 눈, 옻칠같이 검은 머리 / 眼如明鏡頭如漆 이것이 인간의 첫째가는 영화라네 / 最是人間第一榮 - 우성전이 소개한 입춘첩의 일부 - 위 글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우성전(禹性傳, 1542~ 1593)이 쓴 계갑일록(선조 16년, 1583년)에 나오는 글로 입춘첩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시작이며, 봄이 옴을 알리는 입춘(立春)입니다. 예전에 입춘날에는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였는데 입춘축을 다른 말로는 춘축(春祝)ㆍ춘첩자(春帖子)ㆍ입춘서(立春書)ㆍ입춘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는 11월 27일(목) 옥류천 지역에서 청의정 지붕의 이엉 교체 및 짚공예 체험 행사를 실시한다. 이번 행사는 올해로 세 번째이며, 궁궐 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초가인 청의정 지붕을 새로운 짚으로 엮어 얹는 이엉잇기의 재현, 달걀꾸러미 등 짚으로 만들 수 있는 소공예 체험과 우리 전통의 벼(수라벼) 전시 및 시식 등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즐겁고 뜻 깊은 전통 농경문화 체험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지난 해 이런 뉴스를 우린 보았습니다. 예전 우리 초가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지붕 이엉을 새 것으로 바꾸곤 했지요. 20여 년 전만 해도 농촌 늦가을 들녘에 서면 마당에서 사다리를 타고 이엉을 지붕에 올려주고 지붕에서는 이엉잇기를 하려고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광경을 보곤 했습니다. 우리네야 지붕에 오르면 떨어질까 봐 엉금엉금 기었지만 이엉잇기의 재주꾼들은 지붕을 마치 놀이터처럼 여기는 듯 했지요. 해마다 이엉잇기가 힘들었던 농민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 울긋불긋 스레트지붕으로 고치는 새마을 사업에 손뼉을 친 이도 있지만 지금 와서는 오히려 그런 지붕이 흉물스럽
“우리나라의 시골 학교에 예전에는 학전(學田)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그래서 유생(儒生)들이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항상 먹을 것이 없음을 괴롭게 여기니, 청컨대 학전을 주어 양육(養育)하여 학업을 성취하게 하소서.” 이는 성종실록 11년(1480년) 4월 16일 치 기록으로 한 경연(經筵)에서 시강관(侍講官) 안침(安琛)이 한 말입니다. 이에 성종은 “경기·강원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향교(鄕校)에 학전(學田)을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지요. 성종임금은 그 뒤인 성종15년 11월 26일에도 “재(齋)에 기숙하는 가난한 선비가 비록 향학심(向學心)이 있더라도 양식을 가져오기가 어려워서 학궁(學宮)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므로, 특별히 학전(學田)을 내려 곤궁함을 구제하면 공부에 거의 도움이 있을 것인데, 노사신이 실지로 보탬이 없다고 이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알지 못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뒤에 영의정까지 지낸 노사신이란 이가 학전은 실제 보탬이 없고 나랏돈만 허비할 뿐이라며 반대했지요. 이렇게 일
예부터 꽃을 소재로 한 그림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화에서 꽃과 새를 그리면 화조도(花鳥圖), 벌과 함께 그리면 화충도(花蟲圖)라고 하는데 특히 꽃과 나비를 그리면 화접도(花蝶圖)라고 합니다. 이런 그림을 잘 그린 이로 우리는 신사임당을 꼽습니다만 조선말기 화가 일호(一濠) 남계우(南啓宇, 1811~1890)는 나비만 그린 뛰어난 화가로 유명합니다. 얼마나 나비 그림을 잘 그리는지 “남나비”, “남호접(南胡蝶)”으로 불릴 정도였으니까요. 남계우의 나비 그림은 매우 세밀한 사실화의 극치를 이룹니다. 진한 빛깔들을 써서 나비의 다양한 형태와 아름다운 색깔을 잘 나타내었으며, 꽃과 어울려 한층 생동감 있는 느낌을 줍니다. 또 다른 남계우의 나비그림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군접도(群蝶圖)”는 무려 150가지의 나비가 그려졌는데 서울·경기 지방의 150가지 나비들을 모두 그렸다고 하지요. 그래서 이 군접도는 현대생물학이 참고할 정도로 그 학문적 값어치가 크다고 합니다. 그는 나비 그림을 그릴 때 나비를 책 사이에 말려두었다가 종이를 위에 얹고 숱으로 밑그림을 그리거나
해학으로 절망의 시대를, 청빈으로 재상의 길을 걸은 오성대감이라고 일컬어지는 이항복(李恒福, 1556년~1618년).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정치가·시인·작가지요. 어려서부터 죽마고우인 이덕형(李德馨)과의 우정 이야기 “오성과 한음”으로, 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오성대감이 훌륭한 인물로 자라기까지 어머니 최 씨의 자녀교육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지요. 이항복은 어렸을 때 무척 장난이 심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타일렀지만 그래도 듣지 않자 어머니는 집안 사당 앞에 가서 칼을 앞에 놓고 머리를 풀어헤칩니다. 그리고 소복을 한 채 식음을 전폐하고 조상에게 자식을 잘못 가르친 죄를 빌었습니다. 이를 본 이항복은 어머니가 죽으려하는 것으로 알아 깜짝 놀라며 용서를 빌었지요. 그러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는 너를 이 어미가 잘못 가르쳤구나. 자식을 잘못 기른 죄로 조상 앞에 갈 면목이 없어 죽지도 못할 죄인이니 머리를 잘라 조상께 사죄드리려 한다. 남자가 호탕하고 의리가 강한 것이야 말할 수 없이 좋은 일이나 그 호탕함이 충분한 인격과 교양으로 받쳐지
인간은 아련한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인지 모릅니다. 60, 70년대 우리가 살았던 그때와 지금은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달라져 그 아련한 흔적은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획한 “그때를 아십니까?”는 벌써 이번 주로 44회를 기록했으니 어언 1년이 되어갑니다. “그때를 아십니까?” 처음은 교실 흑판의 나무탁자와 그 위의 찌그러진 양은 쟁반, 빛바랜 누런 주전자, 얄궂은 컵을 썼습니다. 그 뒤 무쇠난로와 양은도시락, 쥐잡기, 흑백텔레비전, 주판, 정관수술, 뮤직박스와 디제이 같은 것들이 등장했지요. 그런데 이런 추억들을 직접 확인하고 느낄 수 있는 곳들이 온 나라엔 여러 군데 있습니다. 먼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 예술인마을의 “한국근현대박물관(031-957-1125, www.kmhm.or.kr)이 눈에 띕니다. 이곳 3층 역사관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한국전쟁 올림픽 등 근현대 정치 100년사 관련 자료들이 있으며, 1~2층 문화관에는 문방구, 헌책방, 만화방, 교실풍경, 중화요리점, 교복점, 분식점 등 풍경을 재현했고, 지하1층 풍물관에는 초
갓은 예전에 어른이 된 남자가 머리에 쓰던 의관의 하나로 고종황제의 갓이 중요민속문화재 제45호에 지정되어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전고종(傳高宗)갓”이 그것입니다. 이 갓은 진사립으로 만든 기법이 정교하며 보통 임금이나 높은 벼슬을 가진 사람들이 썼습니다. 갓의 재료는 머리카락보다 더 가는 죽사(竹絲)와 중국산 촉사를 한 올 한 올 입힌 것으로 갓 중에서 으뜸으로 꼽는 갓입니다. 진사립 가운데서도 특히 임금이 쓰는 갓은 갓 아래에 중국산 실을 물들여 꼰 붉은 실을 돌리지요. 또 갓의 꼭대기부분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중앙을 향해 있는 네 마리의 박쥐무늬와 네 개의 구름무늬가 섞여 있습니다. 보통 사대부들이 쓰던 갓은 흑립(黑笠)이라고 불렀으며 임금이나 왕세자가 쓰는 것은 두면(頭冕)이라고 했지요. 마미(馬尾: 말총)로 되어 있으면 ‘마미두면’ 또는 ‘마미립(馬尾笠)’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보기에도 세련되고 단아한 이 고종갓은 현재 세종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863년에 황제가 되어 1919년 독살 당할 때까지 과연 고종은 이 진사립을 몇 번이나 썼을
오늘은 고종이 1919년 덕수궁 함녕전 서온돌에서 68살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 날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건강한 모습이었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후 여러 가지 독살설이 퍼졌습니다. 독살설이 퍼진 까닭은 고종황제의 팔다리가 죽은 뒤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는 점과 죽은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들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전의(왕실의 의료를 담당하던 관리)가 홍차에 비소를 넣었다는 소문과 독이 든 식혜 또는 한약을 마신 뒤 죽었다는 소문들이 빠르게 퍼져나가 이에 격분한 국민은 삼일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지요. 고종 황제뿐만이 아닙니다. 24년 전인 1895년에는 명성황후가 일제 순사의 손에 처참하게 죽었지요. 일제 순사 와타나베는 명성황후의 가슴에 칼을 박고 주검을 불태우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황제와 황후 양전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입니다. 그들은 왜 명성황후와 고종황제를 그렇